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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세부터 헬로라이프 스토리콜렉터 29
무라카미 류 지음, 윤성원 옮김 / 북로드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오래전 20대에 막 들어선 그때,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읽었다. 단지 제목이 너무 좋아 고른 책이였는데, 그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기지촌이며, 마약 중독, 혼음파티와 폭력, 그리고 상상하기 힘든 변태적 성관계까지. 그 모든 것들을 이해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고, 그저 일본이란 나라가 그런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그저 변태적인 19금 소설이라고 덮고 말기에는 아까운 무엇이 있었다는 것을 어렸던 날에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금기에 대해 끝없이 갈망하는 두려움없는 청춘이랄까 뭐 그런것을.

그후로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제법 찾아 읽었다. 단순히 호기심에서도 그랬지만, 안되는 것이 없다는 자유로운 생각에도 불구하고 정말 되는 것은 너무도 없다라는 답답함에서 였다. 현실에서 성취하지 못한 것들을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읽으며 소소하게 혹은 침침하게 터뜨리고 싶었던 것은 아니였나 생각된다. <고흐가 왜 귀를 잘랐나>, <오디션>, <그래, 연애가 마지막 희망이다>, <sixty nine>, <너를 비틀어 나를 채운다>, <자살보다 SEX>로 이어진 무라카미 류에 대한 호기심은 딱 거기까지. 더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고, 궤도이탈을 꿈꾸는 나에게 무라카미 류가 주는 위안은 변태적인 호기심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이십년이 훌쩍 지난 지금 다시 만난 무라카미 류. 그도 나이를 먹은 것인지, 예전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위태위태하던 그의 이야기가 평이해졌다고 할까, 이제야말로 땅 위에 발을 딛고 쓴 소설같다고 할까, 제목이 이미 모든 걸 말하고 있지만 그의 이번 소설에서는 불가능을 꿈꾸는 다른 종류의 젊음 같은 것은 더이상 없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쳐, 그 모든 것을 경험하고 난 후에 찾아든 노년과 같은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나카고메 시즈코는 쉰네 살에 이혼했다. 그후 그녀는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판매 직원으로 일하며 결혼상담소를 전전한다. 인도 시게오도 역시 쉰네 살에 오랫동안 근무해오던 작은 출판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하고, 일용직 노동자를 전전하며 노숙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토미히로 타로는 중견 가구 업체에서 조기 퇴직했다. 그는 조기퇴직우대제도에 따른 특별가산금으로 캠핑카를 마련해 아내와 일본 전역을 여행다닐 계획을 세우지만, 자기만의 시간을 주장하는 아내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자 크게 당황한다. 다카마키 요시코의 남편은 38년동안 일한 중견 광고 대리점에서 정년퇴직하고 블로그 등으로 소일하며 거의 집안에서 지내지만, 어쩌다 방문하는 이웃에서는 평소의 그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여 다카마키 요시코를 불쾌하게 한다. 그러한 이유로 그녀는 남편과 말 한마디 하려하질 않고, 애견 보브에게만 사랑을 쏟는다.

시모후사 겐이치가 대형 트럭 운전사로 잘나가던 때는 연봉이 5백만 엔을 넘었지만, 예순살이 되자 회사에서 해고됐다. 젊은 시절 이혼하고 버는 돈은 족족 유흥에 썼던 탓에 예순이 넘은 그에게 남은 것은 작은 아파트와 나날이 줄어가는 통장과 끝없이 부푸는 고독감이다.

 

일본의 경제적 호황기에 젊음을 받쳐 공헌한 그들은 일찍이 유례가 없는 장기침체로 인해 조기퇴직을 하거나 현역에서 물러났다. 체력적으로도 그렇지만, 정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불가능에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그런 나이가 아닌 것이다. 더군다나 때는 바야흐로 선례가 없는 경제적 불황기. 모두가 가난하고 돈이나 물건이 귀하던 시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다 맞은 뜻하지 않은 무기력한 시절인 것이다. 문제는 말이야 선례가 없다는거야.(179쪽)

까닥 잘못 발을 내딛는 순간 끝을 모를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는 때에 필요한 것은 현실 감각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당장의 먹을것 만을 생각하며 살아가기에는 너무 낭만적인 존재인가 보다. 나카고메 시즈코는 결혼상담소의 만남 주선에 빨간 속옷을 꺼내입고, 인도 시게오는 발등에 떨어진 불에도 불구하고 친구를 돕기 위해  그에게는 생명수와 같은 물을 양보하며, 시모후사 겐이치는 꽃뱀일지 모르는 여자에게 돈을 건네려 한다. 문제는 생활비보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 고독감이다. 따스함 같은 게 그립다.(314쪽)

 

더이상 어리지 않고, 그렇다고 다 자란 것도 아닌 그 시절,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사나워지는 시기인 사춘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라 명명한다. 그렇다면 더 이상 젊지도 않고, 그렇다고 늙었다고 볼 수도 없는 이들의 시간은 무어라 불러야 할까. 해 질 녘 모든 사물이 붉게 물들어 언덕 너머로 보이는 실루엣이 개인지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이라는 낮도 밤도 아닌 시간,  '개늑시'가 바로 이때 아닐까. 젊지 않으니 더이상 불분명한 모험에 자신을 걸지 않지만, 딱히 늙은 것도 아니니 안주할 수도 없는 시간, 개도 늑대도 아닌 그러므로 아직은 긴장감을 늦출 때가 아니라고 무라카미 류는 말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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