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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 1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1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평점 :
소설의 배경은 바야흐로 1866년 무렵으로, 경제불황이 극심한 시기다. 기계공이었던 에티엔은 술주정으로 인한 가벼운 폭력으로 철도회사에서 쫓겨난 뒤, 일을 찾아 '돈으로 이루어진 산'이라는 의미의 '몽수' 탄광지대로 들어선다. 에티엔은 라 보뢰 탄광에서 탄차운반부로 일하게 되고, 600미터 땅 아래에서 탄광노동자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탄광은 몹시 열악한 환경으로, 두더지 굴과 같은 막장에서는 몸을 바로 펼수도,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실 수도 없다. 또한 제대로 된 보호시설도 장비도 없이 석탄을 캐고, 운반하는 광부들은 힘겨운 일에 대한 정당한 보수를 받지못해 늘 굶주림에 허덕이며 한세기 전 부터 대대로 바위를 뚫어왔다.
에티엔 역시 고된노동으로 인해 기계와 같이 변해가며 석탄을 캐는 일상의 중압감에 짓눌리지만, 문득 그러한 노동자의 부당한 삶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 그는 무지했지만 글을 읽고 쓸 줄 알았으므로 공평하지 못한 삶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책을 읽고 생각하면서 지적으로 깨어난다. 뿐만아니라 그는 자신이 알게된 것을 노동자들에게 교육하기에 이른다.
주어진 운명에 순종하며 '삶이란 그런 것'이라는 체념을 해왔던 탄광노동자들은 에티엔을 통해 부르주아들의 착취를 깨닫고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주장하며 반항과 투쟁을 배워나가는데, 이는 주변 탄광까지 모두가 궐기하는 탄광노동자 전면파업으로 확대된다.
두달간 이어진 파업으로 인해 노동자들은 극심한 굶주림으로 아사 직전에까지 이르렀음에도 사람답게 살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할 것을 다짐하지만, 동원된 군인들의 발포로 결국 파업을 풀고, 다시 탄광으로 내려간다. 두달 간의 파업으로 굶어 죽었거나, 총에 맞아 죽은 이들은 죽었기에 땅 아래에 묻혔고, 산 자들은 살기 위해 다시 땅 아래로 내려가게 된 것이다. 언뜻 이런 상황은 이들의 파업이 실패로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파업은 탄광노동자들의 존재와 실상을 세상에 알렸고, 노동에 합당한 몫을 주장하는 노동자들은 언제고 부르주아들의 안락한 삶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일깨웠다는 의미에서 두달은 무의미하지 않은 것이다. '파종의 달, 싹트는 달'이라는 의미의 '제르미날'은, 어둡고 음습한 땅 속으로 되돌아갔지만, 그 속에서 새로운 기운을 싹틔우는 노동자들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이다.
반면 한 세기 전부터 운좋게 채굴권을 쥐면서 탄광의 주주로서 대대로 부르주아가 된 이들은 생존을 위해 투쟁해 본 일이 없기때문에 어떤면에서는 살기위해 아귀같이 덤벼드는 노동자들에 비해 더 순진무구한 모습이다. 바로 그레구아르 일가 같은 경우겠는데, 그들은 늦둥이 외동딸을 위해 쓰는 돈 외에는 사치나 향락을 즐길 줄 몰랐고, 자신들은 그저 조용하고 정직하게 자신들의 삶을 살아갈 뿐이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적선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으로 자신들이 쥔 '부'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것을 다 갖은 이가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미미한 아량에 불과할 뿐, 자신들이 누리는 안락함이나 경제적 '부'에 관해서는 일말의 의문도 품지 않는다. 아무런 노력없이 자신들이 대대로 물려받은 부가 그들에게는 너무도 정당한 권리였고, 부의 분배를 원하는 자들은 그들에게 강도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순종과 체념만이 자신들의 운명이라고 믿었던 노동자들이나 대대로 물려받는 '부'가 정당한 자신들의 것이라고 믿는 부르주아들이나 결국에는 교육이 부족했던 것이 아닐까. 교양과 세련된 매너를 몸에 익힌 부르주아들이지만, 정작 인간으로서 품어야 할 의문이나, 그에 대한 해답에는 무지한 것이다. 아니, 거머쥔 '부'를 놓지않으려고 일부러 무지했던 것일 수도 있겠다.
한편 에티엔은 지적으로 성숙해질 수록 무지하고 어수룩하며 천박한 노동자들과 자신을 구별하고 싶어했다. 그는 노동자들에게 연민의 마음을 갖고, 그들의 처지를 바꾸기 위해 노력할 수록 자신이 노동자들의 우두머리이며, 세상의 중심이라는 자만심 역시 커져 갔다. 그런만큼 노동자들의 무지가 더 천박하게 여겨졌고, 그들이 깨어나기에는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에 절망하며,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한 것이다. 에티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르주아의 근성을 닮아가고 있었던 것인데, 나는 에티엔을 보면서 타고난 노동자도 타고난 부르주아도 있을 수 없으며, 어쩌면 인간들은 모두 '자신만'은 부르주아가 되고싶어하는 이기적인 동물이 아닌가 싶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부르주아들의 행태가 부당하고 정의롭지 못한 일로 여기는 것이 당연하지만, 될 수만 있다면 누구나 부르주아가 되어 아무런 노력없이 물려받은 부를 정당한 자기 몫이라고 주장하기 쉬운 종자가 바로 인간이 아닌가 하는 비참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여기 프랑스 노동자들은 보물을 캐내서는 이기주의와 나태함 속에 틀어박힌 채 혼자서만 잘먹고 잘살려 하고 있어. 평소에는 부자들에게 반기를 들고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것 같아도, 막상 자신에게 뜻하지 않은 재물이 생기면 그걸 가난한 이들과 나눌 수 있는 용기가 없다는 말이지. 당신네들이 자기만의 재물을 소유하거나, 부르주아를 향한 반감이 단지 그들 대신 부르주아가 되려는 욕심에서 비롯된 거라면, 당신들은 절대 행복해질 자격이 없는 거야. -2권, 177쪽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노동자들의 가난을 끊고 공평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인물로 에티엔 외에도 라스뇌르와 수바린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변혁을 이루기위한 방법에서는 서로 차이가 있었는데,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바쿠닌을 신봉하며 새로운 세상을 위해서는 먼저 모든 걸 부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수바린은 국가나 정부, 사유재산, 종교 따위들이 존재하지 않을때,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말한다.
에티엔은 자본가와 부르주아의 횡포를 무너뜨리고 노동자들이 주인이 되며, 계급이 사라지고 민중이 국가를 장악했을 때에야 비로소 새로운 세상을 약속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온건한 라스뇌르는 혁명과 같은 과격한 방식보다는 기회가 생길때마다 회사가 해 줄 수있는 개선을 요구하면서 점차로 세상을 바꾸어나가는 인내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한다. 폭력을 동반한 혁명보다는 은근하면서도 끈기있는 변혁을 꿈꾼다는 점에서 나는 라스뇌르의 주장에 공감했지만, 피를 뿌린 혁명이 없었다면 세상은 절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큰틀에서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을 뿐더러, 평등과 박애를 실천하면서 모두가 행복해지는 세상은 인간이 이루어내기에는 도통 부자연스러운 그런 세상이라는 믿음은 더 팽배해졌다. 끊임없는 진보를 통해 무지와 상스러움으로부터는 이만큼 벗어났지만, 거대자본에 잠식되어 돈을 쫒는 천박함에 대해서라면 오히려 모두가 한통속이 되어 돌아가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아닌가.
에밀 졸라가 총 20권의 루공과 마카르 가문의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한 루공마카르 총서를 썼다는 것 역시 처음 알았다. 에밀 졸라는 루공마카르 총서를 통해 유전적인 면과 사회학적인 면이 한 가문에 어떻게 이어지며, 개인에게는 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제르미날>은 루공마카르 총서의 열세번째 작품이다.
루공마카르 총서를 모두 읽어보고 싶은 욕심은 크지만 번역되어 있는 책이 그다지 많지는 않다. 그렇지만 이미 잘 아려져 있는 <목로주점>이나 <나나>, <여인들의 행복백화점>역시 이 총서의 일부분이라는 것이 무척 반갑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