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한 사람]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신중한 사람
이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중한 자는 저지르거나 부수거나 걷어차지 못한다. 신중한 자는 보수주의자여서가 아니라 신중하기 때문에 현상을 유지하며 산다. 현상이 유지할 만한 가치가 있기 대문이 아니라 현상을 유지하지 않으려 할 때 생길 수 있는 시끄러움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현상을 받아들이고, 그 때문에 때때로 비겁해진다. -47쪽
신중하지만 치밀하지는 못한 편이라는 평을 아내로 부터 듣는 Y는 자신을 드러내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그가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신중한 사람이기 때문인데, 그가 신중한 이유는 주위사람들과의 불편한 관계를 참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작가의 주장이다. 그러니까 작가가 말하는 신중하다는 의미는 자신이 선택한 것, 또는 자신이 주장한 것의 결과로 야기될 주변과의 불편함을 참아내지 못한다는 뜻이다.
 
Y 는 오랜 꿈인 전원주택을 경기도 양평에 지어두고도 아내와 딸의 반대로 전원주택에 들어가지 못한다. 대신 그는 원하지 않는 해외파견 근무를 아내와 딸의 요청으로 받아들이고, 전원주택은 이웃남자에게 관리를 부탁하고 매달 얼마간의 관리비를 송금하기로 한다. 3년후,  Y는 기러기 아빠가 되어 혼자 귀국하는데, 이번에도 역시 아내와 딸이  Y가 나이지리아에 근무하는 대가로 머물렀던 영국에 잔류할 것을 강력히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도  Y는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지 않음으로써 아내와 딸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는 것으로 그 자신의 신중함을 드러낸다. 여기까지는  Y의 신중함이 남편이나 아버지로써 마땅히 가족을 생각해 보일 수 있는 신중함, 혹은 양보로 이해되었으나,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혼자 돌아온 Y는 이번에는 걸릴 것 없이 양평으로 향하지만, Y가 짓고 가꾸고 다듬었던  꿈의 전원주택은 재투성이 시골농가로 변해있었고, 설상가상으로 그곳에는 낯선 부부가 둥지를 틀고 그곳은 자기들이 사들인 자신들의 집이라는 주장을 펴기에 이른다.

한때는 이웃이었던 관리인으로부터 사기를 당한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  Y가 보인 신중함은 가히 혀를 내두를 만한 것이었는데,  그는 자신이 선택한 일에 대한 결과로 더해질 낯선 사람과의 불편함을 미리 예견하고, 그를 피하기 위한 신중함을 여기서도 다시한번 펼치게 되는 것이다.
 
 
그는 늘 억지와 불합리와 막무가내를 거북해했다. 억지와 불합리와 막무가내를 겪지 않고 산 것은 아니지만, 겪을 때만다 거북하고 못 견뎌 했다. 못 견뎌 하면서도 견뎌낸 것은 견뎌내지 않을 때 닥쳐올 또 다른, 어쩌면 더 클 수도 있는 억지와 불합리와 막무가내에 대한 예감 때문이었다. 부자연스러운 것을 꺼리는 사람이, 꺼리면서도 부자연스러운 것을 내치지 못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공식이 이래서 성립한다. 부자연스러운 것을 꺼리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더 잘 받아들이는데, 그것은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거부하는 자신의 태도가 혹시 만들어낼지도 모르는 더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끔찍해하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부자연스러움보다 자기가 만들지도 모르는 부자연스러움을 한층 더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57쪽
신중한 Y는 자신의 삶을 점령한 먼지투성이고, 안하문인이며, 철면피한 타액과도 같은 타인을 견뎌내는 것으로 갈피를 정하고, 그대신 자신의 몸을 괴롭히기로 작정한 것이다.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적어도 다른 사람과의 불편한 관계를 야기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Y가 택한 신중한 결정은 바로 '적응'이었는데,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한 투쟁이나 싸움보다는 그 자신을 상황에 적응시키는 것으로 문제를 덮어두고자 한 것이다.
의사소통의 실패로 인한 주변과의 걸끄러운 상황을 못견디는 나 역시 신중한 사람이라고 판단되지만, 그러나 Y의 행동은 황당하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Y의 소심증은 이미 신중함을 넘어선 '병적인 나약함' 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승우 소설집 <신중한 사람>에는 여덟편의 이야기가 실려있고, 두번째 이야기인 '신중한 사람'과 같은 신중한 이들이 각각의 단편의 주인공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신중함을 펼치며 인생을 재지만, 그들이 펼친 신중함은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찌르는 비수가 된다. 
외향적인 사람이 이러저러한 불만을 밖으로만 혹은 타인의 탓으로만 표출하는 것처럼, 내향적인 신중한 이들은 자기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야기되는 타인과의 불편한 관계를 참아내는 대신, 자신과는 결코 화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참아내는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못마땅해 한다.
 
신중한 것과 치밀한 것은 다르고, 대부분의 신중함은 다가올 미래에 자신이 선택한 것의 결과로 야기될 불편함을 예견하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것이며, 만일 미처 예기치 못한 불편함이 야기되었을 경우라도 신중한 사람은 그것에 그만 적응해 버린다는 것이 소설집 <신중한 사람>의 결론이다. 그러므로 신중한 사람은 어찌보면 낙관주의자 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신중한 사람들의 강령은 이런 것이다. 되도록 주변과의 말썽을 피할 것! 나를 주장하는 대신 주변에 적응해 버릴 것!
하, 이보다 더 낙관적인 사람이 또 있을까.
 
그러나 작가가 사용한 '신중함'은 낙관과는 거리가 먼 다소 부정적인 의미의 신중함이 되겠는데, 사실 일상 속에서 예견되는 불편함을 덮어두기 위해 부당함을 견뎌내고, 적응해버리는 신중한 사람들은 우리 대다수의 소시민을 가르키는 것일 수 있겠다. 그러나 부정적이고 어쩌면 다소 병적으로까지 여겨지는 것이  '신중하다'는 것 일지라도 인류는 대부분 신중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보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신중한 사람들만 있었다면 인류는 진보하지 못한채로 유인원과 같은 존재로 남았을 수도 있겠다는 상상도 하게된다. 그러니, 자신의 행동으로 예견될 온갖 불편함을 감수하고, 부당한 현실에 용감하게 맞선 것으로 보이는 배우 김부선에게 '나대지말라'는 말 따위는 함부로 날리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다. 아니, '나대지말라'는 말 따위를 함부로 날릴 수 있는 것도 '신중함'과는 거리가 멀기는 하다. 그로인해 야기될 비아냥이나 비난들을 예견하지 못했다면, 그는 그저 멍청한 것일뿐 아니겠는가.
따라서 신중한 사람은 멍청한 것과도 거리가 멀다. 어쩌면 결과를 예측하는 영특함과, 어차피 인간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듣고싶은대로만 듣는 존재라는 것을 파악한 명민함을 갖춘 존재가 바로 신중한 사람 아니겠는가. 그러니 신중한 사람들이여 위축되지 말지어다. 그대들의 신중함은 때로 민망하고 한심스럽지만, 제 한 몸 보신하는데 이보다 더 쉬운 방법은 없을터이니.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