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조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
-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의(그리고 인류 전체의) 불행과 비참함에 관해서라면 파울은 항상 그날 트라운 호숫가에서처럼 사태의 표면만을 볼 줄 알았지 단 한 번도 나처럼 전체를 조망하는 법이 없었다. 내 생각에 그는 아마도 전체적인 실상을 보기를 거부했고, 그런 거부의 태도를 일생 내내 유지해 온 듯하다. 그런 비참한 상황과 마주칠 때마다 피상적인 관찰로 만족해 버린 이유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으리라. -37쪽
몸이 아팠다. 그저 그냥 지나가는 감기나 몸살 정도가 아니라 난생 처음 수술이라는 것도 해 보았고, 얼마간의 병원생활도 했다. 그후로도 오랜 재활기간이 필요하다. 목숨이 왔다갔다 할 정도의 위중한 병은 아니지만, 지금껏의 내 생애를 통틀어 가장 큰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 나에게 일어난 것이다.
링거를 확인하거나 혈압을 재러 오는 간호사의 작은 움직임에 잠이 깨고, 입맛없는 입에 밥을 우겨넣는 시간을 제외하면 하루종일 멍하게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날들이 길어지자 문득 인생에 별로 중요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은 물론이고 평범한 내 일상을 조금은 색다르게 채워주던 책 읽기도, 나를 새록새록 발견하게 해주던 리뷰 쓰기도, 하다못해 얼굴에 로션 하나 바르는 것조차도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오면서 그간 소중히 여겼던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나는 파리 목숨만큼이나 가벼운 목숨을 지니고 있어서 언제 어느때고 한방에 훅 갈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을 그렇게 자각한 것이다.
그 자각이 얼마나 날카롭고도 매서웠는지 나는 몹시 놀라고 말았다. 그후로도 한 달 반의 시간을 여전히 멍한 머리로 헤매고 있다.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품에 안은채로.
일도, 책 읽기도 모두 다 하찮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시간이다. 그 한달 간 나만큼이나 목숨이 가볍던 많은 이들이 죽었다. 그걸 바라보는 것은 너무 힘들다. 어린 목숨들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삶이 얼마나 하잘것 없는 것이지에 대한 충격이 아직도 내 몸에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안하다. 아무런 희망을 발견하지 못할 만큼 무력한 내가 미안하다. 나에게, 그리고 그들에게...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에 특별한 관심도 없으면서 <비트겐슈타인의 조카>가 읽고 싶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자의 모드에서 정말 중요한 이야기에 목말랐기 때문이다. 다시금 내 안을 지펴줄 어떤 불쏘시개가 필요했던 것이라고 할까. 질병과 고립으로 자살 충동에 시달리던 베른하르트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인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만나게 되면서 삶을 지펴줄 불쏘시개를 발견하게 된 것처럼 나 역시도 파울을 통해 자꾸만 가라앉는 내 영혼에 불을 지피고 싶었다.
처음에는 네다섯 발자국을 걷는다. 그다음에는 열이나 열한 발자국, 그러고 나서 열세 발자국이나 열네 발자국을 떼어야 한다. 환자란 그렇게 움직여야 하지 몸을 일으킬 수 있다고 당장 일어나 밖으로 나가 막 걸어 버리면 대개는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오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몇 달 동안 병실에 갇혀지냈던 환자는 그동안 몹시도 바깥을 그리워했으므로, 마침내 병실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된 그 순간 도저히 더는 참기가 어렵다. - 16쪽
바로 나의 이야기였다. 몇달씩이나 병실에 갇혀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퇴원을 하고도 한참을 누워지냈던 나는 제법 걸을 수 있게되자 정해진 산책 시간을 무시하기 시작했고, 걸을 수 있다는 것에 신이 나서 평상시에는 차를 타고 가던 곳까지 멀리 나가곤 했다. 그것이 오히려 몸을 망치는 '독'인지도 모르고. 그렇더라도 삶에의 의지란 것은 다시 걸을 수 있게 되는 힘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리라.
이처럼 베른하르트와 파울의 병원 모습을 시작으로 계속되는 베른하르트의 독백은 나의 투병생활과 맞물려 몹시 흥미로웠다. 또한 베른하르트가 묘사한 정신병원에 수감된 파울의 모습에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맥머피를 떠올리기도 했다. 파울도 맥머피처럼 체제에 불응하거나 혹은 기준에 맞춰 행동하지 않은 대가로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전기치료를 받고 점점 더 정신이 피폐해졌다거나 하는 장면에서 였다. 물론 파울이 정신병동의 체제를 바꾸기 위해 맥머피와 같은 악동노릇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파울은 정신병동을 들락거리며 오히려 더 황폐해지고,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로 병원을 나올 수 있게되곤 하면서 점점 더 상태가 나빠진 것만은 분명하다. 베른하르트와는 반대로 파울은 정신병동에서 퇴원할 때마다 점점 더 피폐해졌다.
베른하르트는 자신이 앓고있던 폐병이나 파울의 정신병은 매 한가지로 모두 자제력을 잃었기 때문에 발병하게 된 것이고, 자신이 수십 년 동안 폐병 환자로 살았듯이 파울 역시 수십 년 동안 정신병자로 살아왔으며, 그것은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기 위한 것으로 자신은 폐병환자의 역할을, 파울은 정신병자의 역할을 수행해 온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나는 친구와 함께 나탈의 뜰 담장에 기대앉아, 칠십 년 이상 살아 온 그의 인생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생의 초반에는 소위 영화가 끝이 없다고 하던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부유함을 향유하며 훌륭한 보호 아래서 자랐고, 당연히 유명한 테레지아눔 고등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자의식이 이끄는 대로 가족들의 의사와 어긋나는 길을 스스로 닦아 나갔고, 비트겐슈타인 집안의 표면적 가치였던 것들, 즉 부유함과 풍족함, 그리고 안락한 삶을 버렸다. 정신적인 삶을 영위함으로써 자기구원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89쪽
파울과 베른하르트의 병원생활 다음으로 가장 주의깊게 읽었던 것은 파울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 동안의 고독이었다. 파울이 죽어가는 12년의 과정을 적은 책이니만큼 어쩌면 내가 집중했던 것이 파울의 죽음이였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임에도, 한때 뛰어난 요트선수였고, 자동차경주에 나가기도 했으며, 유럽 최고의 바에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기도 했고, 전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쌓은 해박한 지식을 자랑한 오스트리아 빈 의 최고 신사 중 하나였던 파울의 최후 몇년간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꽃 중에 목련이 있다. 목련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꽃이기도 한데, 싸늘한 공기를 뚫고 나와 봄을 알리는 진주빛이 도는 매혹적인 자태는 몹시 아름답지만, 그 마지막은 비참하다 못해 추하기까지 하다. 깨끗이 떨어져 버리면 좋을 것을 목련은 백옥처럼 고았던 꽃잎을 지저분하게 태우며 사그라든다. 나는 그게 못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파울의 마지막 몇년간이 꼭 목련의 최후처럼 생각되었다. 그렇지만 누구인들 생의 마지막을 목련의 최후처럼 보내지 않을 수 있을까. 어느날 느닺없이 닥친 급작스러운 죽음이 아니고서야 말이다.
부유한 가문에 태어나 인생의 절정기를 황홀하게 보냈던 파울의 전성기에는 그토록 다정했던 친구들은 죽음을 앞둔 파울을 피한다. 파울에게 기대할 것은 죽음 뿐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증오한다.
죽음을 앞둔 파울은 모두로 부터 외면당했다. 그의 친구 베른하르트에게 조차도 그러했는데, 글을 쓰기 위해 떠나있었다고는 하나 베른하르트는 파울의 장례식에 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파울 생전에 베른하르트는 그의 장례식에서 연설하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카뮈는 말했다. 죽음만이 감정을 일깨운다고, 막 사별한 친구들을 우리가 얼마나 애달파하느냐고, 입에 흙이 가득차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는 그들을 우리는 존경하기까지 하지 않느냐고. 비트겐슈타인의 친구를 위한 이 한편의 장송곡이 죽음이 일깨운 감상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니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내 친구의 몸에서 나오는 음산하고 소름 끼치는 기운을 나 혼자서 고스란히 받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도저히 오래 견딜 수가 없었다. 상태가 피폐해져 갈수록, 그는 더더욱 우아하게 옷을 차려 입었다 -129쪽
파울은 베른하르트가 알지 못하는 세계를 알려준 사람이며, 베른하르트가 좌절과 절망 속에서 자살을 꿈꿀 때, 베른하르트 자신을 되찾도록 도운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베른하르트는 '내인생의 사람'외에 소중했던 친구가 파울이라고 밝히고 있음에도 죽음에 임박한 파울을 마주 보려하지 않는다. 그는 죽음을 앞둔 파울과의 마지막 온정의 시간을 거부한다. 단지 죽음이 두려워서라기보다는 눈 앞에 닥친 친구와의 이별이 두려웠던 것이라고 믿고싶다.
베른하르트는 조국 오스트리아를 몹시 증오해 자신의 작품이 오스트리아에서 출판되는 것을 금지하는 유언을 남겼다는데, 조국에 대한 그의 증오 역시 조국으로부터 거부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였나 나는 생각한다.그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거부당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역시 파울은 베른하르트가 알지 못하는 세계를 알려준 사람이 맞다. 파울로 인해 생을 다시 살 힘을 얻었던 베른하르트는 파울을 통해 어떻게 죽어야 할 지, 혹은 어떻게 죽지말아야 할지 또한 배웠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를 읽고 뭔가 희망적인 메세지를 발견하길 바랬는데, 내 심리상태가 그렇질 못해서인지 외려 죽음에 한 발 더 다가선 기분이 든다.
베른하르트가 생의 마지막 시기를 어떻게 보냈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내 생의 마지막 시기를 어떻게 보내야 할 지는 알 것 같다. 잘 죽기 위해 잘 살아야 겠다. 하루하루를 허비하지 않고... 이만하면 희망적인 메세지를 본 듯도 하고.
누군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가 아닌가 생각한다. 다만 그날이 오늘일지, 내일일지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오늘도 무사히..'라는 기도를 되뇔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죽음이 그렇듯 코 앞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라면 외려 죽음을 두려워해서도 증오해서도 안되는 것이 아닐까.
제목에서 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들먹였는지는 모르겠다. 파울이 루트비히의 조카였다는 것은 전혀 중요한 사실이 아닌데 말이다. 루트비히로 인해 파울이 어떤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개별적 인간 파울에 관해서인데 말이다. 역시 판매량을 위해서였을까? 죽음을 앞둔 파울에게 보여준 베른하르트의 냉담함이 내 마음도 얼어붙게 만드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