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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출근길, 두발을 편히 딛기도 비좁은 공간. 앞에 서있는 여자가 넘기는 머리칼도, 옆에 선 남자의 팔꿈치도, 뒤꼭지를 자꾸만 밀어대는 뒷사람의 가방도 불편을 넘어 불쾌로 이어질 정도이다. 그처럼 비좁은 틈을 비집고 선 그들은 모두 손바닥만한 스마트폰이나 노트만한 패드를 꺼내들고 제마다 밀린 tv를 보거나, 영화를 보거나, 그도 아니라면 외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 개중에는 열심히 '팡'을 터트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하나같이 화난 표정으로 화면을 노려보는 그들의 얼굴에선 혹여 누가 자신의 발을 밟기라도 하면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비장함이 엿보이기도 한다. 한 여자가 웃고 있다. 입꼬리를 격하게 올려가며 가끔은 '풋'하는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기도 하는데, 그녀가 팔아프게 들고있는 패드에서는 노홍철의 노란머리와 커다란 입이 보인다. 나는 그녀가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히죽일때마다 힐끗거리며 그녀를 본다. 그때마다 내속에서는 어떤 경멸의 감정이 울컥 솟곤 한다.
화면에 머리를 박은채로 두팔과 두다리에 불끈 힘을 주고 선 그들은 어쩐지 모두 고독해 보인다.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흘겨보고 경멸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 나조차도 숨쉬기 힘들만큼 빼곡히 들어선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고독을 느낀다. 그러나 바우만은 현대의 우리들은 고독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유동하는 세계에서 고독할 자유를 잃었다고.
만원전철의 사람들 속에서 내가 느끼는 외로움은 장그르니에가 말한 '우리는 혼자 살다 혼자 죽을 수 밖에 없는 섬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느끼는 고독감과는 다른 종류의 고통이다. 바우만의 표현으로 하자면 '유동하는 근대'를 사는 우리는 언제 어디서건 접속할 수 있는 많은 네트워크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전혀 혼자라고 느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고독하다. 개인의 사적인 비밀들이 트위터나 페이스북, 블로그 같은 채널에 의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음에도 우리는 고독하다. 채널을 닫고나면, 접속을 끊고나면 우리는 여전히 혼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네트워크가 다양하지 않았던 그 시절보다 우리는 몇배는 더 외롭게 된다. 가상의 대중들에 둘러쌓였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페이스북, 트위터, 블로그 등의 가상세계는 실제 개인이 접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만나는 관계망에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많은 주변인들을 확장시키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그들과의 관계는 지속적이지 못하다. 그러한 피상적인 관계속에서 각 개인은 외롭다고 느끼지 않지만, 실제의 자신은 외로움으로 몹시 고통스럽다. 그건 삶의 감미로운 기쁨과 이유모를 슬픔을 이해하기 위한 장 그르니에가 말하는 '절대고독'의 시간과는 다른 종류의 고독으로, 관계를 거듭할 수록 실제의 나는 더 외룁게 된다. 관계를 통한 만족감이 물건을 사들이는 순간의 기쁨처럼 반복되면서 온라인 속의 관계들은 손쉽게 무한 확장되지만 그 속에서 정작 나를 채워주는 친구를 만나기란 불가능하다. 재빨리 얻고 재빨리 버려지는 소비사회는 인간관계에서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때문에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에는 인터넷, 휴대전화, 아이팟, 게임기기라는 스피드와 편리함을 얻었지만, 대신 '절대고독'의 권리를 잃었으며, 기기들을 통한 다량의 다양한 즐거움을 얻었지만, 즐거움의 질을 놓치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또한 평범한 우리들은 대때로 반사회적 인격 장애자와 같은 괴물이 될 가능성이 깊어지게 되었다고 이야기 한다.
여기 실린 44통의 바우만의 편지는 2008년 부터 2009년까지 2년에 걸쳐 씌여진 것으로 세대차이, 신용카드, 신종 플루, 교육, 종교, 성격 등의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것이지만 결국 주제는 '사적인 자유'를 암시하는 '고독'으로 귀속된다.
사적인 영역을 공적장소로 끌어냄으로서 고독의 시간을 거부하는데 익숙해진 우리는 이제와서 어떻게해야 하는 것일까. 결국에는 본질적인 것을 되찾자는 것일텐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자본을 좇아 돌기 시작한지 이미 오래인 수레바퀴를 멈출수 없다면, 수레바퀴의 원심력에 휩쓸리지 않도록 각자가 강해지는 방법말고는 달리 해법이 없을 듯하다. 문명을 되돌릴 순 없지만 문화를 되돌리기는 의외로 쉬운 일이 아닐까, 바우만을 통해 생각해 보는 것이 이 책을 읽는 의의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