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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평전 - 실존과 구원의 글쓰기 ㅣ 서강인문정신 16
이주동 지음 / 소나무 / 2012년 2월
평점 :
공교롭게도 <카프카 평전>과 이사야 벌린의 <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를 동시에 읽게 되었다. 오랜시간 지하철을 이용하는 나는, <카프카 평전>이 휴대가 불가할 정도로 양이 많아 집에서만 읽을 수 있었는데, 때문에 휴대용 책을 따로 준비해야 했다. 카프카와 마르크스는 모두 디아스포라적 유대인이었고(정확히 카프카와 마르크스는 디아스포라는 아니다. 두사람 다 유대인관습에 대해 무심했고, 시온주의를 표방하지 않았으며, 마르크스의 경우 자신이 유대인 것에 어떤 모멸감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디아스포라적의 의미는 팔레스타인 땅을 떠난, 이주한 유대인으로서 의미이다), 공교롭게도 마르크스가 사망하던 해에 카프카가 태어났다. 저돌적인 마르크스의 계급에 대한 세기말적 투쟁은 예민한 카프카에 의해 권력과 욕망의 제도화된 메커니즘 속에서 물화되고 소외된 존재에 대한 고뇌, 즉 20세기 실존문학으로 이어졌다. 해서 전혀 관계 없을 듯한 두 사람의 시대가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독특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마르크스가 어린시절 좌절이나 억압을 경험하지 않고 성장했다면, 카프카는 아버지의 가부장적인 권위와 폭력 속에서 성장했으며 확대사회에서는 프라하의 독일계 유대인으로 사회적 경멸과 억압 속에서 성장하고 생활했다. 카프카의 실존에 대한 고민은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그는 항상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자신의 능력에 관대한 직장 '노동자재해보험공사'로 부터 독립함과 동시에 독일계유대인을 경멸하는 자신의 고향 프라하를 떠나, 글만 쓰는 자유로운 작가로서의 삶을 꿈꿨다. 그러나 그러한 카프카의 소망은 폐결핵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하기 1년 전 도라 디아만트를 만남으로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자유도 잠시, 병이 깊어짐에 따라 카프카의 독립은 6개월만에 막을 내리고, 부모가 있는 프라하로 되돌아가야 했으며, 결국 카프카는 '죽음'으로 권위와 억압으로부터 영원한 해방을 이루게 된 것이다.
카프카는 평생 자신의 존재를 믿지 못했으며 자신을 무능력하고 나약한 존재라고 확대 해석했다. 결혼을 인간의 가장 행복한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한 카프카는 자신은 병약하고 비사회적이며 우울하고 희망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결혼에 적합하지 않다라고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혔다. 때문에 카프카는 세번의 약혼과 세번의 파혼을 경험했으며, 네번째에는 같은 유대문인이었던 에른스트 폴락의 아내를 사랑한다. 이 사랑 또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카프카의 무의식은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작된 사랑이었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여인을 사랑함으로써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지만, 그 도전을 늘 스스로 철회함으로써 자신의 무력함을 자기 자신에게 증명해 보이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결혼함으로 아버지와 동등해지길 원하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결혼을 거부하고, 이루어지지 않은 결혼으로 그토록 좌절했던 것은 아니였을까.
마르크스와 카프카 두사람의 어린 시절을 한꺼번에 봄으로써, 역시 한 개인을 이루는 것은 타고난 성정이기도 하겠으나, 그가 나고 자란 환경과 부모의 태도를 비롯한 사회적 환경이라는 것을 두 사람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카프카는 자신의 전생애를 관통하는 불안과 심약함, 한정된 사회적 관계에서 오는 소외를 아버지의 자기 본위적인 교육 외에도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 아닌 유모의 손에 자라야 했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깊이 생각해 볼 때 나에 대한 교육이 많은 방향에서 나에게 해를 끼쳤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37쪽) 이 말을 바꾸면, 부모의 세심한 보살핌 속에서 자신의 본성을 잊지 않는 교육을 받았더라면 오늘날까지 실존문학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카프카는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다.
마르크스에게 엥겔스가 있었다면, 카프카에게는 막스 브로트가 있었다. 일생동안 뿐만 아니라 카프카 사후까지도 우정을 포기하지 않은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가 대학시절 독서 모임에서 만난 둘도 없는 친구이자 문학의 대변자이며 후원자였고, 카프카 평전을 기술하기도 했다. 지은이 이주동은 막스 브로트가 마지막까지 신의를 포기하지 않았다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카프카는 막스 브로트에게 보낸 두번에 걸친 유서에서 몇몇 작품을 제외한 자신의 글을 모두 불태워 줄 것을 강조했다.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와의 신의를 저버리지 않은것이 맞다면, 카프카의 유언은 지켜져야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에게 충실했기 때문에 그 유언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이주동은 보고 있지만, 나는 살짝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혹여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를 들어 어떤 실익을 본 것은 아닐까 하는. 이는 나의 몹시 개인적인 생각으로, 실존적 고민이라 해두자.
이 책의 지은이는 반갑게도 우리나라 사람으로, 번역에 대한 무리없이 쉽게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매력이었다. 또한 이사야 벌린의 마르크스와는 달리 카프카 개인사에 촛점이 맞춰진 것도 내가 바라는 평전의 모양이여서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아버지와 사회의 가부장적 권위와 억압에 억눌림으로 평생을 질식할 지경으로 살아온 카프카의 인간적 비애를 피부로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내 무의식 속에도 권위에 대한 부당함이 공기처럼 녹아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은이 이주동은 이 책을 자유롭고 주체적이며 창조적인 작가로서 살아가려고 했던 카프카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그의 일상적인 삶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때문에 카프카 문학 속의 장면과, 편지와 일기가 세세하게 관찰되었고, 그에 대한 기록으로 책이 무척이나 방대했다. 그러나 읽기에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카프카가 느끼는 억압과 권위에 대한 반발심에 깊이 공감할 수 있어 무척 재미있었다. 또한 카프카에게 글쓰기의 의미가 자유와 해방이며,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찾기 위한 실존이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덕분에 혼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소송>과 <성>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는 불현듯 카프카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가 느낀 불안, 고독, 소외, 외에도 그가 꿈꾼 행복, 작지만 따뜻한 인간적인 것에 대해 한없이 가슴이 저려오는 경험을 하였다. 이어서 읽고 싶은 책은, 인간의 폭력 앞에서 자신의 본성을 버리고 어쩔 수 없이 인간의 관습을 받아들이는 한 불행한 원숭이의 인간화를 그린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와, 아버지의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교육이 낳은 자신의 불안과 심약함에 대해 토로한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와, 추운 겨울에 한 톨의 석탄도 얻지 못하는 상황에 쓴 고통 체감기 <양동이를 탄 사나이> 이다.
그가 원하는 가장 좋은 삶의 방식은 문방구와 램프를 갖고 밀폐된 지하실의 가장 깊숙한 곳에 앉아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에게 창작은 깊은 잠, 곧 죽음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