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열에 관한 검은 책]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
-
검열에 관한 검은책
에마뉘엘 피에라 외 지음, 권지현 옮김, 김기태 감수 / 알마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오는 4월 27일 예정된 레이디가가의 내한 공연이 영상물등급위원회로 부터 청소년 관람 금지 판정을 받았다. 선정적인 노래가사, 파격적인 의상과 퍼포먼스로 사탄숭배자라 불리기도 하는 슈퍼스타 레이디가가의 공연이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19금이라는것에 청소년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표현의 자유를 말하며, 그 부당성을 이야기 하곤 한다. 또한, 어제 치뤄진 총선을 앞두고는 인터넷과 트위터 등 각종 미디어에 관한 검열이 더욱더 심해질 것이라는 보도로 트위터리안과 블로거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뿐만아니라 2008년에는 국방부에서 지정한 금서 목록이 알려지면서, 해당 출판인들과 저자들이 헌법상 보장된 '언론 출판의 자유 등 기본권을 침해했다'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검열이란 이렇게 공권력이나 거대권력이 행하는 강제력이라고만 생각했던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미처 생각지 못한 '검열'의 폭에 무척이나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모든 조치는 권력을 통해서만 행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 권력 혹은 거대한 힘에 의해 강제되었던 검열은 차츰 사회문화 속에 스며들어 각 개인에게 내면화되면서 자동으로 자기 자신을 검열하는 '자기 검열'로 이어진다. 자기검열은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상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가능성부터 제거하기 때문에 더 나쁘다. 완벽한 자유가 보장된 것처럼 보이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자기검열은 더 농밀하다. 책에서는 자기검열을 검열의 최고봉이라고 표현했다.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국가권력이 국민을 옭아매는 한 방법으로 검열을 행하고 있으며, 국민의 세계관과 인식의 질서를 국가의 이익이란 명목으로 조절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라면 완벽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인데, 그런 생각이 오히려 이책을 읽으며 모호해지고 말았다.
폭력적이고, 음란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하는 메시지가 무분별하게 판치게 될 때, 사회의 도덕성과 안녕을 보장할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게 된 것인데, 이 책은 메시지의 유통에 대한 정부의 통제는 매우 비효율적이라고 주장한다. 뿐만아니라 정부가 검열을 통해 대외적으로 공표하는 목적이 아닌 은밀한 다른 목적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바로 이 책을 읽기 전까지의 내 생각이 었지만, 6장 '청소년 보호의 구실 아래'를 읽으면서 오히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자신이 없어졌다. 폭력적이고 음란한 메시지들을 본 청소년들이 그렇지않은 청소년들에 비해 더 폭력적이거나, 더 자주 혹은 더 많이 탈선할 것이라는 상상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않다면, 내 아이가 교육적이지 못한 메시지를 접하길 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근대 사회학의 기초를 설립한 뒤르켐은 일탈 현상을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주장에 대해 반대했는데, 그는 범죄나 자살의 책임이 '모방'에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일탈의 원인을 개인에게 돌리는 것은 국가권력의 강화와, 그에따른 강제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범죄와 자살은 '모방'에서 비롯된다고 알려져 있다. 뒤르켐과 이 책의 저자들에 의하면, 국가의 논리에 이미 세뇌되어 있는 나는, 인간의 고유한 심성이라는 것 자체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통제될 때에라야 비로서 '인간적'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자기검열'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검열을 통해 무시되고, 뿌리 뽑혀지는 것은 한낱 표현이나 창조의 자유가 아니라 표현되거나 창조되는 것의 의미, 즉 생각의 다양성이 무시되는 것이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과 관련된 자유가 무시되는 것이기 때문에 검열을 거부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물론 나는 이에 동조하고, 또 권력에 의한 검열을 거부하는 것이 맞다라고 생각하는 한편으로는 여전히 표현의 완벽한 자유가 두렵기도 하다. 메시지를 수신하는 각 개인의 인간성을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여전히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위해하다라고 판단되는 이미지나 메시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범법행위를 저지르는 자들에게 정말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았다고 믿어도 좋은 것일까. 유해한 메시지가 범법자 주변의 사회적 변수와 더불어 상승효과를 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떨쳐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나는 내 아이가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기를 원하는 욕심을 버릴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