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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글쓰기 - 우리 말로 끌어안는 영어
최종규 지음 / 호미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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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사름벼리와 산들보라 아버지 최종규가 글쓰기와 관련해 묶은 세번째 책이다. 그러나 나는 이전의 두 책은 보지 못했고, 몇년 전 <헌책방에서 보낸 1년>을 무척이나 소중히 읽었다. 왠만한 세권 분량 정도 되는 부피의 책이였는데, 책을 들고 불광동이며 신촌을 헤매다녔고, 그도 모자라 인천 배다리로, 부산 보수동으로 원정을 다녔다. 딱히 어떤 오래된 책을 구입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헌책방이 주는 감흥을 찾았던 것이다. 천장까지 쌓인 책더미에서 오래된 빵 같은 헌책 냄새를 맡았고, 갱지로 도배된 듯한 누추함 속에서 오히려 아늑함을 느꼈다. 그것은 오래전 돌아가신 할머니의 품과 비슷한 느낌이였다.

<헌책방에서 보낸 1년>을 읽을 무렵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은 지은이가 헌책방을 취미삼아 돌기에는 너무 젊었다는 것이였데, 그런 느낌은 <뿌리깊은 글쓰기>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몇년 새에 아이의 똥기저귀를 손수 빠는 아빠가 되어 있었다.

 

'저마다 제 삶을 올바르게 다스린다면, 알맞춤하게 꾸린다면, 제대로 북돋운다면 어찌 될까 생각해 봅니다. 아마, 삶터와 마을과 나라가 한껏 거듭날 테지요. 달라질 테지요. 온갖 검은 셈속이 사라지고 갖가지 더러운 짓이 쫓겨나며 돈벌레 짓거리는 자리잡을 수 없을 테고요. 거짓말 일삼는 정치꾼은 뿌리내릴 수 없고, 뒷돈 챙기는 쇠밥그릇 공무원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말다운 말을 쓰는 일은 생각다운 생각을 하며 삶다운 삶을 꾸리는 일하고 차근차근 이어지기에, 나라를 주무르는 이들로서는 여느 사람들이 말다운 말을 쓰기를 바라지 않을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제 얼과 넋을 내어주기를 바라고, 스스로 나라밖 물질문명에 넋이 나가기를 바라며, 스스로 제 삶터를 사랑하지 않고 돌아보지 못하기를 바랍니다.'(151쪽)

 

글쓴이 최종규가 <뿌리깊은 글쓰기>에서 하려는 말은 위의 글로 요약된다고 본다. 늘 사용하는 익숙한 용어라서 무엇이 문제인지도 깨닫지 못하는 우리말과 영어의 혼용사례는 일일이 다 꼽기에도 불가능할 정도이다. 말 한마디, 글 한줄에도 영어는 빠지지 않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정상적인 일로 여겨진다. 사용되는 영어에도 유행이 있어 나이브니, 리라이팅이니, 커밍아웃, 피드백 등은 요즘 특히 많이 사용되고 있다.

우리 나라는 0세부터 아니, 태교부터 영어로 시작하는 광적으로 영어를 사랑하는 나라이다. 늘 보고 익숙해져서 영어가 저절로 튀어나올 지경이 되라고 꿈조차도 영어로 권하는 나라이고 보니, 영어의 혼용 사용은 무척이나 지당하다. 지난 주말 대중목욕탕에서 본 텔레비전에서는 네살된 '영어 영재'가 출연해 외국인과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 장면을 본 많은 엄마들은 자신의 아이가 그렇지 못한 것을 마치 자신이 못나서라는 양 좌절했고, 아이의 영어교육에 더욱더 매진할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인 아이에게 영어교육을 시키고 있지 못하다. 특별히 우리말 사랑이 애틋하거나, 나만의 교육관이 투철해서라기 보다는 영어교육은 학교에서 받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과 함께, 영어를 학원까지 보내면서 가르치려면 특별한 목적이 있어야 할텐데 그 목적을 나는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말마다 아이의 친구들은 어딘가로 영어시험을 치르러 간다고 하는데, 나는 그 시험 속에서 아이가 좌절하는 것도, 혹은 자만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영어교육이 필요없다는 주의도 아니다. 영어를 한다면 다만 원서를 스스로 읽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지만, 그조차도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면 어쩔수 없는 일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생각은 시도때도 없이 불쑥불쑥 불안으로 바뀌곤 한다. 무엇보다 아이또래의 자녀를 둔 엄마들에게 듣게되는, 중학생이 되고나면 영어학원을 보내지 않은걸 후회하게 될꺼라는 충고에선 특히나 그렇다. 나의 잘못된 판단으로 아이가 심하게 뒤쳐지지나 않을까하는 불안 때문에 영어교육을 시키지 않는 것이 자랑이 아니며, 자신있게 안시키는 것이 아닌 망설이며 못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텔레비전에서 본 영어영재가 전혀, 조금도, 손톱만큼도 부럽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이런 나도 사실, 영어와 혼용해서 쓴 일기를 자랑하는 아이의 궁둥이를 칭찬삼아 두들겨 주곤 한다. 역시 나는 어떤 확고한 철학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시류를 쫓는 의미없는 일에서 제외되고 싶은 삐딱이 이상은 아닌 것이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 이야기하자면, 글쓴이가 반드시 우리말만을 써야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쓸 말은 쓰고, 거를 말은 거르며 최소한 우리의 정체성은 잊지말자는 이야기인데, 때문에 글쓴이는 영어 사용뿐만 아니라, 한자사용에도 예민하다. 결국 우리는 삼중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꼴이고, 말이고 겉이고 꾸미느라 내실을 잃고 있다는 이야기다.

골목길을 걷다 보니 간판이 모두 영어 아니면 한자어라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된다. 흔히 보는 '두피 클리닉'을 생각해 보면 頭皮 clinic으로 여기에는 한자와 영어뿐, 우리말은 사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말로 두피클리닉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국어사전에 설명된 것처럼 '두피'를 '머리덮개'로 클리닉을 '시술','치료'로 옮겨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시술이나 치료 역시 한자어가 아닌가. 최종규는 책에서 몇번이나 한자어 가족家族이 아닌 식구로 손질하는 것이 좋다했는데, 식구食口 역시 한자어임에는 다르지 않다.

좋은 의도가 반복으로 인해 책을 읽을수록 조금씩 식상해졌으며, 그럼 어쩌라고 하는 불편한 심기가 들기도 했다. 글투 또한 편하지 않았다.(내 머릿속의 최종규는 젊기 때문에 글투가 계속 어색했다) 글쓴이가 사용하고 있는 이러한 글투는 동화작가이면서, 우리말바로쓰기를 강조하신 이오덕 선생님을 떠오르게 한다. <헌책방에서 보낸 1년>에서도 느꼈지만, 최종규는 이오덕 선생님께 인상깊은 가르침을 받은것이 분명하다고 여겨진다. (그나저나 나도 이오덕 선생님의 '글은 읽기 쉽게 써야 하는 것'이란 말씀은 무척이나 좋아한다)

또 하나 거슬렸던 것은 글쓴이가 겨레, 얼, 넋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자칫  인종근본주의, 민족근본주의로 흐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학교다닐때만 해도 우리민족은 단일민족이며, 백의민족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우리민족은 절대 단일민족이 아니며, 다른민족에 비해 특별히 별난 것도 없다라고 생각한다. 겨레와 넋, 얼, 민족의 지나친 강조가 다문화시대인 오늘날 외국인 노동자들을 경시하는 밑바탕이 되고, 우리들의 자녀이기도 한 그들의 자녀들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편치 않았다.

 

살아가는 모양새 그대로 말이 되고 글이된다는 최종규의 주장은 겉치레에 치중하느라 헛돈들이며 내 삶을 남의 손에 맡길것이 아니라,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쫓든 우리의 정신과 사상은 그 중심을 잃지말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의 기본인 글쓰기, 말쓰기부터 세세하게 챙기자는 의미로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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