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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봄 - 개정판 레이첼 카슨 전집 5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홍욱희 감수 / 에코리브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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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시작된지도 어느덧 한달하고 열흘이 지났고, 바야흐로 봄이 다가오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다. 그러나 도시속에서 느끼는 봄의 느낌이란 겨우 쇼윈도우의 마네킹에게서 시작되곤 한다. 실제 느끼는 기온은 아직도 코끝이 빨개지도록 찬데, 쇼윈도우의 그녀들은 하늘한 쉬폰스커트에 발란한 티셔츠를 받쳐입고 온갖 화학물질로 치장된 조화 속에 파묻혀 꽃보다 더 환한 얼굴로 웃고있다. 빨개진 코를 하고 쇼윈도우를 바라보는 나는 그 느낌이 너무도 생경해서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고, 꿈속처럼 아련하게 '벌써 봄이구나.'라고 습관처럼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맴도는 봄의 느낌이란, 살얼음 아래 졸졸 흐르는 시냇물과, 보드랍게 몽우리진 개나리와 목련 속에서 시작되곤 한다. 도시내기인 나는 전생애동안 단 한번도 그렇게 시작되는 봄을 본 일이 없지만, 상상속에서 봄은 항상 그렇게 시작되곤 한다.

인류에게 허락된 지구에서의 시간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 <녹색평론>의 발행인 김종철 선생님의 강연을 다녀온 이후, 지구멸망은 공상과학 영화 속에서만 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강렬해지는 요즘이다. 덜 입고, 덜 먹고, 덜 쓰는 삶을 강조하며 지구와 함께 인류의 생존을 염려하는 이들의 절규가 이어지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여전히 신의 영역을 넘보며 인간이 해낼 수 없는 일이 없다는 환상을 열심히 전도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에게는 지구의 미래가 밝고 희망차기만 한 것일까, 아니라면 은하계 넘어로 그들만의 다른 행성을 준비해놓기라도 한 것일까. 덜 쓰고 아끼는 삶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절규보다는 대량생산, 대량소비만이 삶의 기쁨이요, 행복이라는 전도가 내아이에게 까지도 먹혀들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이 더더욱 나를 절망스럽게 한다.

 

 

몇주 후로 이사를 앞두고 몇몇 이사업체로 부터 견적을 받았다. 이사업체들은 한결같이 마무리 서비스로 새집증후군을 없애준다는 피톤치드 소독을 제안했는데, 나는 바보스럽게도 피톤치드가 바퀴벌레를 없애주기도 하는지를 물었다. 나의 이런 바보스러운 물음에 대해 '새 아파트에는 바퀴벌레가 없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유인즉, 요즘 아파트는 화학성분을 많이 사용해 짓다보니 바퀴벌레인들 남아나질 못한다는 이야기였는데, 그러한 화학성분을 피톤치드가 없애준다는 설명이었다.

어의없는 내 질문과, 그에 따른 제법 근거있는 답에 순간 나는 얼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바퀴벌레조차 살 수 없는 공간에서 살겠다고 기어이 들어가려하고 있는 우리 식구가 너무도 황당했기 때문이었다.

바퀴벌레는 인류보다도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또 어디선가 화학성분을 이겨낼 수 있도록 자신들의 몸을 진화시키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강한 살충제를 사용할 수록 해충들이 더더욱 진화할 것이라는 생물학자 레이첼 카슨의 예언만 보아도 내 상상은 그다지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믿어의심치 않으며, 한낱 미물이라고 여기는 바퀴벌레와 해충들을 없애기 위해 더욱더 강력한 화학 살충제를 개발하고 있는 인간들도 점차로 화학성분에 맞춰 자신들의 몸을 진화시키게 되는걸까?

 

 

레이첼 카슨의 명저 <침묵의 봄>을 읽었다. 고백컨대, 이 책을 읽기전 레이첼 카슨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머릿이 살충제로 알려진 DDT의 유해성을 만천하에 알리고, DDT의 미국내 제조 금지와 환경보호를 위한 시민운동을 이끌어 낸 인물이다. 레이첼이 살충제의 유해성을 대중에게 알리기 이전의 DDT는 머릿이뿐만 아니라 각종 해충을 박멸해 대량농업을 가능하게 했고, 뿐만아니라 각종 전염병을 예방하는데도 유익한 살충제였다.

산업으로 인한 새로운 부가 등장하고, 과학기술이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줄 것이라는 사회적 순종이 강조되던 1950년대와 60년대에, 화학물질들이 지구 생태계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레이첼의 주장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레이첼이 당시 이러한 주장을 펼때, 과학자들과 권력자들 역시 그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들에게는 눈에보이는 현상이 더 소중했을 것이고, 실체적인 물질적 가치앞에 미래를 걱정하는 주장은 한낱 어린아이의 투정에 불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레이첼은 해충과 각종 병균과의 공존을 주장했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다만 레이첼은 살충제와 제초제 대신 천적을 이용할 것과 지식과 자원을 총 동원하여 살충제와 제초제의 성분인 독극물 대신 덜 위험한 농약과 화학약품의 개발 외에도 비화학적 방법을 개발할 것을 주장했다.

그후, 세상은 어떻게 변했는가. 레이첼의 시대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더 빠른 속도로 이루어 놓은 50년 후의 지금 세상은 더 많은 살충제와 더 많은 원자력과, 더 많은 화학성분을 사용하고, 실제로 인간에게 미치는 화학성분에 의한 각종 질병에의 피해 또한 심각해지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도, 인류는 여전히 더 많은 과학기술의 진보에 열광하고 있다. 인류가 원하는 것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과 필요치 않을 것을 구분해 내는 생태계에의 완벽한 통제, 완벽한 무균상태인 것일까. 내가 원하는 삶이 무균실에서의 삶이던가.

 

 

50년 전에 쓰인 레이첼의 이 책을 읽으며, 그녀가 밝혀낸 화학 성분이 오늘날에는 다방면에서 어느정도나 적용되고 있는지 궁금해지는 한편으로 나는 어떠한 과학적 증거도 대지 못하면서도 그다지 크게 개선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생활의 필수품이 되어버린 각종 화학물질들이 정부의 허가기준을 준수하고 있을지라도, 허가기준에 맞춘 미량의 화학물질들은 체내에 축적되고, 체내에 축적된 화학물질들이 서로 화합하여 내 인체에 어떠한 작용을 할 것인지 무척이나 공포스러워지는 경험을 했다.

50년이 지났어도, 우리는 여전히 화학성분에 둘러싸여 생활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소박한 삶보다는 소비하는 삶에의 추종은 더욱더 깊어가고 있으며,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는 존재라는 생각은 이제는 논란거리 조차도 되지않는 실정이다. 이러한 인간의 오만은 삶을 더더욱 각박하게 하고, 경쟁에서 도태되는 사람들은 낙오자로서 재생할 수 있는 기회조차 차단당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 뿐이라는 각성은 유해한 화학성분으로 부터의 자유뿐만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서 누려야 하는 마땅한 권리를 되찾는 일이기도 하다.

정말이지 레이첼 카슨의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그들이 자신의 삶과 주변을 되돌아보고, 인류의 공존이라는 공공의 선을 이루기 위해 각자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것인지, 우리를 대신해 권력을 휘두를 사람을 결정하는 일에 조금더 관심을 갖게 되길 바란다.

겸손하고 소박한 삶을 되찾을때 인류와 지구의 미래가 보장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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