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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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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과 원 / 김기택
 

옆집에 개가 생김.
말뚝에 매여 있음.
개와 말뚝 사이 언제나 팽팽함.
한껏 당겨진 활처럼 휘어진 등뼈와
굵고 뭉툭한 뿌리 하나로만 버티는 말뚝.
그 사이의 거리 완강하고 고요함.
개 울음에 등뼈와 말뚝이 밤새도록 울림.
밤마다 그 울움에 내 잠과 악몽이 관통당함.
날이 밝아도 개와 말뚝 사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음.

직선:
등뼈와 말뚝 사이를 잇는 최단거리.
온몸으로 말뚝을 잡아당기는 발버둥과
대지처럼 미동도 않는 말뚝 사이에서
조금도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 고요한 거리.
원 :
말뚝과 등거리에 있는 무수한 등뼈들의 궤적.
말뚝을 정점으로 좌우 위아래로 요동치는 등뼈.
아무리 격렬하게 흔들려도 오차없는 등거리.
격렬할수록 완벽한 원주의 곡선.
 

개와 말뚝 사이의 거리와 시간이
이제는 철사처럼 굳어져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음.
오늘 주인이 처음 개와 말뚝사이를 끊어놓음.
말뚝 없는 등뼈 어쩔 줄 모름.
제자리에서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달리기도 함.
굽어진 등뼈 펴지지 않음.
개와 말뚝 사이 아무것도 없는데
등뼈, 굽어진 채 뛰고 꺾인채 달림
말뚝에서 제법 먼 곳까지 뛰쳐나갔으나 곧 되돌아옴.
말뚝 주위를 맴돌기만 함.
개와 말뚝 사이 여전히 팽팽함.
 

내가 가장 최근에 읽은 김기택 시인의 '직선과 원'이라는 시다. 이 시를 읽으며 등골이 쭈뼛쭈뼛 했드랬다. 궤도를 이탈할 줄 모르는, 지금껏 달려 온 길과 달려가야 할 길을 벗어나본적도, 벗어날 줄도 모르는 등뼈가 휘어버린 개가 꼭 내 모습 같았기 때문이다. 시인은 몇날 몇일을 꼼짝도 않고 개와 말뚝을 관찰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삶의 무게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고달픈 인간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시인의 시에서 내 모습을 본다. 시인은 오랜 응시와 집중을 통해 자기만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했지만, 나는 응시와 집중을 통해 시인과 공감한다. 시인은 거시적인 안목으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안목으로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 그리고 나는 구체적이고 생생한 시인의 표현을 통해 다름아닌 '나'를 본다.
시인이나 철학자들은 자기 몸에 맞는 자기만의 옷을 만들어 입는 데 성공한 사람들입니다.(16쪽)
비밀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시라는 것은 시인이 자신만의 느낌을 구체적이고 개성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읽는 나로서는 공감하지 못할 수도, 어렵게 느낄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 어느순간 어렴풋하게나마 나를 볼 수 있는 시를 만나면,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이 책을 친절한 철학박사 강신주의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의 후속편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시를 한편 읊어주고, 시와 철학의 조우를 통해 해석하는 작업의 책인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을 워낙 즐기며 읽었던 나는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또한 무척 기쁜 마음으로 읽어나갈 수 있었다. 나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어려운 시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주니, 거저 시 한편을 이해하는 것처럼 즐거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 편의 시를 작가가 자신 만의 시선과 느낌으로 적어내려간 것처럼, 읽는 이 또한 자기만의 느낌으로 느끼고 즐길 수 있어야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석을 통한 시의 느낌이라는 것은 모두가 공통되게 느껴야 하는 통조림과 같은 느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시나 시인에 대해서 무슨 대단히 심오하게 알고 있는 것이 없는 나로서는 예를들면 백석의 '통영'의 뒷 이야기 같은 것은 전혀 알 수 없겠지만, 알 수 없기에 그 느낌 또한 매우 협소하겠지만 말이다.
또, 시인이 일일히 어떤 철학적 해석을 상상하면서 시를 쓰지도 않았을 것이란 생각도 한다. 어쨌든 해석이란 것은 시를 쓰던 당시의 작가의 심중과는 관계없이 해석하는 이의 주관이 섞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한다. 이 책을 통해 새로운 시들을 만난 것도, 어려운 시들을 더 쉽게 이해한 것도 사실이지만, 결국 시라는 것도 내가 경험한 만큼만 이해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확실히 철학자 강신주는 친절하다. 어렵고 난해한 시도, 철학도 이토록 쉽게 해석해 주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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