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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 읽기 - 전체주의의 탐험가, 삶의 정치학을 말하다 ㅣ 산책자 에쎄 시리즈 8
엘리자베스 영-브루엘 지음, 서유경 옮김 / 산책자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이미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아렌트는 1961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전범 재판에서, 나치 시대의 관료였던 아이히만이 유대인 학살에 대해 아무런 책임의식 없이 재판에 임해, 자신은 정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아이히만의 진술을 본 후, '아이히만은 계급 구조 내에서 진급만을 꿈꾸었던 평범한, 아무 생각이 없는 자'라고 결론한다. 따라서 아무 생각없이, 아무런 고통도 아무런 고민도 없이 체제 내에 순응하며, 일신의 안위만을 위해 행동하는 자라면 아히히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주장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이전의 두 작품, <전체주의의 기원>,<인간의 조건>과 아렌트의 말년까지 계속된 <정신의 삶>을 해체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엘리자베스 영 브루엘은 한나 아렌트의 수제자 중 한 사람으로 그녀는 이미 아렌트 평전을 기술한 바 있다. 따라서 영 브루엘이 쓴 아렌트에 관한 두번째 책인 이 책은 아렌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출판되었는데, 아렌트의 개인사나 그녀의 사상, 사유를 전체적으로 조망해 보는 평전은 아니지만 아렌트의 대표적 세 작품을 따라가는 아렌트 되짚기, 혹은 되살리기로 볼 수 있겠다.
무명이었던 유대계 망명 지식인 아렌트가 미국 학계에서 처음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전체주의의 기원>을 쓴 직후였는데, 아렌트는 이 책에서 전체주의 아래 시민 개개인은 무시되고,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로 뭉뚱그려져 집체적 정체성을 이룬다고 했다. 결국 이러한 체제 아래 시민들은 원자화되고 정치적으로 무기력한, 체제 순응적인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상징된다. 나는 이 장면에서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는데, 다른 주장 다른 의견은 몽땅 빨갱이로 치부되는 지금의 우리 사회 역시 전체주의 사회일 수 밖에 없다라고 생각한다. 다원화의 거부, 정치로부터 소외된 대다수의 대중인 개인은 소비와 향락을 통해서만 삶의 의미를 찾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 사회는 다소의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내포하고 있다.
영 브루엘은 <전체주의의 기원>을 해설하면서 현대의 미국 상황을 오버랩하고 있는데, 9.11사태 이후 미국은 안보를 위한다는 명분아래 개인의 자유를 과도하게 관리하며 황폐화 시키고 있고 이는 '대량 살상 무기'라는 이미지 조작을 통해 가능했다. '보다 안전한 삶'이라는 목적은 이라크 침략과 민간인 사망이라는 수단을 '부수적 피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시킨다. 아렌트의 눈으로 되짚어 볼 때 오늘날의 미국은 다분히 전체주의적 이다.
영 브루엘에 의해 '공적인 것들에 대해 사유하고 평가하는 방법에 관한 입문서'로 정의되는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인간은 정치 행위를 통해서만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또 아렌트는 '정치 행위는 유일하게 사물 또는 물질의 직접적인 개입없이, 언어를 매개로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자유로운 인간의 활동'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나는 이 주장을 이해하기가 버겁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우리 정치계를 볼 때 정치는 몹시 사사롭고, 몹시 물질적인 산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인간의 조건>은 아렌트를 알기 이전에 그 제목에 매료되어 구입했지만 벌써 몇년째 책장을 장식하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영 브루엘의 '아렌트 해체'는 내게 무척이나 반갑다.
다음으로 살펴볼 책은 아렌트의 말년까지 계속된 작품인 <정신의 삶>인데, 이 책은 위의 두 책에 비해 더더욱 난해한 책이다(내생각에). 아렌트는 이 책을 통해 철학과 정치의 결합을 위한 비전을 제시했다고 브루엘은 정리하고 있는데, 제목 조차도 처음 본 <정신의 삶>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브루엘의 설명으로 더더욱 생소했다. 다만 한가지 인간의 사유와 행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고, 사유를 철학으로, 행위를 정치로 규정할 때 철학과 정치 또한 불가분의 관계이다. 따라서 이는 생각없는 행위는 악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아렌트의 사유인 '악의 평범성'으로 대변될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브루엘은 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무엇인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가도 함께 이해해야만 한다.(59쪽)라고 했는데, 아렌트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아렌트의 정신의 삶을 이해해야만 한다. 나는 대체로 아렌트의 사유를 '악의 평범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데, 결국 사유의 결과물인 저작은 어떤 큰 획기적인 변화를 겪지 않은 다음에야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주장한 이래로 '유대민족에 대한 애정을 결핍한 자'로 규정되어 파문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아렌트의 주장에 동의한다. 생각없이 행한 어떤 행위는 행위의 주체가 누가 되었던지, 언제든지 '악'의 모습으로 남겨질 수 있다. 그런 이미에서 아렌트는 우리에게 유효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