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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 류츠신, 단숨

 

이제 중국문학은 한국의 문화시장에서 일본문학에 버금가는 확고한 영토를 확보했다. 일본문학이 자아와 내면, 그리고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삶의 허무를 그린다면 중국문학은 사회와 현실, 그리고 존재의 참을 수 없는 무거움과 삶의 치열함을 그린다. 일본문학이 감각과 감성의 문학이라면 중국문학은 감정과 감동의 문학이다. 일본문학이 하오와 황혼의 문학이라면 중국문학은 정오와 한밤의 문학이다. 그 점에서 일본문학이 청년과 여성의 문학이고 중국문학은 중년과 남성의 문학이다. 비 오고 눈 오는 날에는 물론 일본문학을 읽어야 하지만 소나기가 오고 눈보라가 치는 날에는 중국문학을 읽어야 한다. 이토록 다르면서도 동시에 아름다운 두 영토가 있다는 것은 문화계의 탐사자에게는 참으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류츠신의 '삼체'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중국문학으로서는, 우리에게 최초로 소개되는 장르문학(SF문학)이기 때문이다. 물론 불안감도 있다. 어떤 나라의 장르문학이 높은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준을 지닌 장르적 현실과 일정한 연륜을 지닌 장르문학사가 있어야 한다. 중국은 과연 높은 수준의 SF문학을 잉태할 만한 과학적 현실과 SF문학사를 지녔는가. 금시초문이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중국은 과학기술의 강국이거나 아니라면 적어도 강국의 자질 정도는 충분히 지녔다. 이미 오래 전에 인공위성과 수소폭탄을 만든 나라인 것이다. 기술수준을 문제삼는다면 그것은 사실 자질의 문제라기보다는 전근대적인 사회현실의 문제일 것이다. 중국의 SF문학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이미 과학기술의 자질을 지닌 이상 SF문학사는 없어도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중국은 이미 무협이라는 가장 위대한 장르문학의 역사 하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세계에 버금가는 가상현실을 구축한 서구의 판타지 세계조차도 중국의 무협세계만큼 확고한 가상현실을 구축하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그 정도 수준의 과학기술적 자질과 장르적 상상력이 만나서 이루어낸 중국의 SF문학 역시, 그 가능성 정도는 믿어보아도 될 것이다. 거기다가 물리학은 물론 중국고금의 역사와 세계철학사까지 담겨있다니 그것만 건져도 본전은 뽑지 않겠는가.

 

아멜리아는 자살하지 않았다, 킴벌리 맥크레이트, 복폴리오


미국의 상류층, 하면 일단 화려한 귀족성과 천박한 속물성과 두 가지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것은 주로 영화가 만들어준 이미지이다. 아니라면 영화적 차원에 육박하는 상업적 성격을 지닌 대중문학일 것이다. 거기에 무슨 현실이 있고 영혼이 있겠는가, 만에 하나 그런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상품들이 어떻게 현실과 영혼을 그릴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이중의 의구심 때문에 제대로 된 독자가 미국의 상류층을 그린 문화상품을 구매하는 일을 흔치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나 '쇼퍼홀릭' 따위를 사놓기만 해놓고 읽지는 않은 정도일 것이다.
'아멜리아는 자살하지 않았다.'는 브루클린의 명문 사립학교에서 벌어지는 잔혹극을 그린 소설이다. 상류층, 학원, 틴에이저에다 미스터리까지, 자극적인 대중문학의 요소를 고루 갖춘 작품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혹은 더욱 깊어진다. 기껏해야, 그런 대로 흥미로웠지만 결국은 아깝게 느껴지는 세 시간 정도를 선사할 확률이 크다. 무심코 개그콘서트나 무한도전에 날려버린 세 시간처럼 말이다. 하지만 뉴욕타임스나 퍼블리셔스 위클리 같은 전문미디어의 주목을 받았다는 점에 잠깐 마음이 흔들린다. 물론 이러한 주목이란 대개, 매체에 실린 상업적 광고일 확률이 높지만. 하지만 뭐든 한 번은 경험해보는 것이 좋다. 그 결론이 예상처럼 허무로 끝난다 해도, 허무하다는 결론을 얻은 것 역시 하나의 성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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