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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 - 100세 철학자의 대표산문선
김형석 지음 / 김영사 / 2018년 2월
평점 :
'단군 이래로 출판 시장이 호황인 적 없다'라는 모 교수의 말처럼, 대한민국 연평균 독서량이 줄어드는 것은 이제 괴롭지도 않다. 글을 읽는다는 건 사실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보다는 고통에 가까운 일이다. 글을 읽으면서 즐거움을 얻는 이들이 많았다면 독서량은 줄지 않았을 것이다. 삶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고, 너무도 빠르게 흘러가는 하루하루는 책 읽을 시간을 할애할 만큼 녹록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때때로 글을 읽는다. 정보를 얻기 위함일 수도 있고, 이 글을 읽는 것처럼 타인의 생각이 궁금할 수도 있으며, 긴 글을 읽기만 하면―넉넉하게 세 문단만 넘어가도 긴 글이라고 하자―발작을 일으키는 병에서 벗어나고 싶을 수도 있다.
얼마 전까지, 나는 그중에서도 세 번째, 긴 글에 익숙해지고 독해력을 위한 독서가 가장 절실하며 실용적인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김형석의 『남아있는 시간을 위하여』를 읽고는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뭐, 어떻게 본다면 모든 이유를 종합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내가 생각하는 독서의 이유이자 필요성은 타인의 생각에서 자신의 생각을 유도함에 있다. 글자를 읽는 것에서 생각을 끌어내는 것으로, 그러는 것이다.
1920년 출생이시니 약 100세를 눈앞에 둔 저자의 이 책은 삶, 이별, 종교, 향수 등 추상적이고 무거운 것들에 대한 담백하고 가벼운 산문집이다. 철학과 교수였기에 자신의 인생관이 글 곳곳에 담겨 있는데, 그렇다고 이름만 들어봤을 여러 철학자들의 이론을 끌어온 글은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저 그의 생각을 찬찬히 읽어보고, 그다음에는 자신의 생각을 찬찬히 끌어내면 된다.
고독에 관하여
저자는 비교적 오랜 시간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인연을 떠나보냈다. 친구, 가족, 동반자 등, 여러 인연을 떠나보내고 홀로 남아 고독의 시간을 보내는 저자의 글은 덤덤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절절하다.
두 여인이 떠나 가정이 비었는데,
두 친구가 먼저 간 후에는 세상이 비어버린 것 같아졌다.
"이런 생각도 해보셨어요? 우리 셋이 이미 팔순을 넘겼는데 언제 어떻게 자연의 순리에 따라 누가 먼저 가게 될지 모르잖아요. 욕심을 낸다고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만일 누가 먼저 갔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때의 허전함과 외로움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겠어요? ... 이제 다시 깊은 정을 쌓았다가 다가오는 사태를 어떻게 견디려고 그러세요..."
그러나 물속에서 두 손으로 물을 밀어내면 밀려 나가는 물보다는 밀려들어오는 물이 더 많은 법이다. 외로움을 잊으려고 애쓰면 더 큰 외로움이 찾아들곤 한다.
고독이 마음의 상태라는 말 속에서 '마음'은 인간적인 내용의 표현이며,
따라서 모든 고독은 인간적인 것이다.
고독이라는 소재는 많은 문학작품에서 다뤄졌고, 그래서 흔하디흔한 소재가 되었다. 하지만 '상실'과 더불어 '고독'이라는 단어는 두 음절만 들어도 눈물샘이 자극될 정도로 언제나 애처로운 것이다. 이 상황이 제법 빈번하게 일어나는 데다가 상황에 마주했을 때 얼마나 괴로운지를 알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에서의 고독보다 수필에서 드러나는 고독은 더 마음이 아린다. 허구와 실제는 다르기 때문에. 그리고 타인의 고독에서 사람들은 위로를 얻기도 한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구나, 아니면 나보다 더 한 사람도 있구나, 하고. 그의 생각과 글에서 나는 나의 고독을 돌아보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체감한다. 이게 글이 주는 순기능 중 하나일까.
삶의 이유에 대하여
각자의 삶에 있어서, 가끔은 뒷전으로 밀릴 때도 있지만, 삶의 이유를 자문해보는 건 중요하다. 왜 사는가? 왜 사는가! 하루하루 이렇게 치열하든 치열하지 않든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제의식이 없는 사람은 죽은 물고기가 강물에 떠내려가는 것같이
생명력이 없는 인간에 그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완성을 육체적이거나 자연적인 욕망에서 얻으려 해서는 안된다.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은 인간의 운명적인 과정이다.
그것을 거부하거나 무로 돌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완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격의 충분한 성장과 우리의 삶의 의미를 역사와 사회 속에 남기는 일이다. 즉, 삶의 의미와 가치를 나에게 국한시키지 않고 사회와 역사 속에 남길 수 있을 때 참다운 완성이 가능해진다.
삶은 유한하지만 이름은 무한하다. 잊혔다고 해서 그것이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누군가의 손길이 다시 닿을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저자의 삶의 이유에 대한 생각이 나의 것과 다르지 않았지만, 누군가는 꼭 역사와 사회 속에 이름을 남겨야만 삶이 완성되는 것인가? 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당연한 생각이고 결코 틀린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타인의 생각을 읽어보고 자신 역시 생각을 해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매우 중요하지만 쉽게 잊고는 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자문하자.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답이 결코 나올 수 없는 질문에 각자의 대답에 근거를 들 수는 있어야 한다. 남아있는 각자의 시간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