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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을 위한 철학 - 세상에 단 하나뿐인
브랑코 미트로비치 지음, 이충호 옮김 / 컬처그라퍼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현전의 형이상학을 부정하는 것에는 인간의 행동과 관련지어 건축과 건축가의 작품을 해석하는 것을 거부하는 태도가 포함된다. 이것은 건축의 기능적 고려는 거부하는 것과 이어진다. 이러한 해체주의적 건축은 익숙하지 않은 것을 추구하면서 맥락에 순응하기 보다 맥락을 추방해 버린다(215p

 

서양사의 개관을, 처음 접했을 때 가장 감명깊었던 부분은 신고전주의에서 바로크 양식으로 미술사의 세계꽌이 이동하는 과정이었다. 비례미와 형식미를 중시하고, 그것의 정적인 묘사에 주안점을 주었던 고전주의의 부활은 아름다움과 옳은 것은 본디 정해져있어, 그것은 마치 신이 쥐고 있는 진리와도 같은 척도를 생에서 추구해야하는 미적, 윤리적, 철학적 가치로 여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바로크가 태동하기 시작한다. 철저한 비례미와 대칭의 묘사를 거부한채 색채와 표현을 중시하기로 한 것이다. 겉 보기에 바로크 양식은 르네상스보다는 조금 덜 웅장하였으나 자유로웠으며, 아름답다고 말하기는 어려웠으나 멋스러움이 풍겨지는 것이었다.

 

왜 건축관련 책을 얘기하는데 서양사 얘끼를 뜬금없이 하느냐면, 이 바로크 양식의 태동기에대한 감상이 해체주의 건축물과 모더니즘의 무질서의 미학을 감상하며 얻는 감탄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얼마나 자유로워지고 싶은가? 신 아래에서 얼마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가?

무질서와, 자기 표현와, 자유에의 갈망은, 불변하는 진리에 대한 갈망보다 훨씬 달콤한 현재진행형인 것인가?

 

이러한 물음은 인류의 발전과 그 궤를 같이 해온 철학사의 변화 양상을 고려해보았을 때 던져지는 물음이다. 초월적인 존재의 힘을 믿었을 떄, 인간은 대부분 신의 부름 혹은 영적인 힘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탈피하려 하지 않았다. 북유럽에서는 가파른 협곡과 피요르드를 보며 거인이 잠든 형상이라고 상사할 줄 알았으며, 이집트에서는 신에게 훌륭한 경배의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 완벽한 비례미를 자랑하는 미술 양식을 곳곳에 남겼다. 대표적인 것이 피라미드와, 동일한 비례미로 반복 작화된 벽화들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듯이, 인간은 중세시대를 탈피하여 신과의 분리를 시작하기 시작한다. 진리를 직접 찾아나갈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 내가 서양 미술사를 읽으며, 그리고 건축사를 탐독하며 바로크 양식과 해체주의에 감탄을 했떤 것도 바로 그 철학사와 인류사를 떠올렸기 떄문이다. 어쩌면 인류의 각종 문명과 문화는 이토록 긴밀하게 연결되어있어 당대의 욕구와 갈망을 참 잘도 반영하는 것일까. 즉, 인간이 신과의 분리를 선언하고 진리를 직접 찾아난 순간에 그들은 이집트와 그리스의 고전주의 미술과,기독교 윤리에서 다소 자유로울 수 있었을 테고, 그것은 미술이든 건축이든 무용이든 다양한 분야에서 자유로운 표현으로 적극적으로 표추뢴 것이다.

 

 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제 건축은 건축가와 시공 전문가의 손길에 의해 분열, 왜곡, 중첩, 단편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게 예삿일이다.오히려 미술보다, 건축은 정적인 양식의 규칙을 갖기 마련이다. 인간이 거주해야 하는 건물과 공간의 양식은 보통 그것이 생활의 규칙성과 편리성을 지지해야 함으로 반듯하고 견고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이 주는 놀라움은, 우리가 생활 가까이 혹은 도시 가까이 속에서 인류의 문명의 변화와 고민의 발전인 철학사를 깊이 체감하게끔 도와주는 안내서라는 데 있을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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