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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이즈 컬처 - 인문학과 과학의 새로운 르네상스
노엄 촘스키 & 에드워드 윌슨 & 스티븐 핑커 외 지음, 이창희 옮김 / 동아시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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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이즈 컬쳐, 혹은 컬쳐 이즈 사이언스 *

 

 

과학과 예술의 융합은 다양한 분야에서 중시되던 것이었다. 조금 가깝게 보자면, 다양한 기술의 탄생에서 인문학을 결합시키자는 슬로건도 한 예다. 하지만 우리는 '인문학을 해야 합니다. 인문학을 알아야 합니다.' 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지식의 유희 이상의 실질적인 가르침이나 생산성을 가져다 주는 지는 모른다. 우리가 보는 즐거움을 위해서 누리는 춤은 어떤 심리 치유적 의미가 있는가? 듣는 즐거움을 위해서 향유하는 음악은 인간의 어떤 물리적 진보를 야기하고 반영하는가? 영 상관없어 보이는 일련의 활동들이 유기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는 넓어진다.

 

그래서 이 책의 발간은 반갑다. 이 책은, 서로 다른 각자의 전문 분야를 뚜렷하게 갖고 있으면서도 같은 현상에 대해 공통 분모의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공통된 사회의 관심사에 대해 논의하는 융합의 장이다. 서로 다른 분야 출신의 학자들의 대화록은 형이상학적인 모습을 취하면서도 우리에게 사회와 현상을 이해하는 현실적인 사고력을 제공한다.

 

 

무슨 이유로 인간 정신에 내재하는 공감 능력이 밖으로 확장되었을까요?

여기에 대한 한 가지 답은 다른 사람의 입장으로 우리를 끌어다놓는 매체입니다.

이를테면 언론, 역사, 리얼리즘 픽션 등이죠. (p.51)

 

 

특히 두번째 챕터인 <의식의 문제>는 가장 흥미로운 챕터다. 일단 가장 쉬운 분야를 다룬다. 드라마, 영화, 설화, 만화 처럼 이야기 즉 스토리텔링이 인간에게 왜 필요한가를 논의한다. 각각 소설가이자 심리학자인 서로 다른 분야의 석학은 스토리텔링에서 두 분야가 함께 바라보는 세계의 접점을 찾는다. 내용은 이렇다. <의식의 문제>에 관한 대화에 참여한 심리학자 핑커는 스토리텔링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일을 통해 도덕성을 발달시켜왔다는 의의를 가졌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쉽게 말하면, 우리가 드라마를 왜 많이 보는가? 왜 좋아하는가? 이것은 유용한 일인가? 에 대한 추적이다. 문학 독자나 텔레비전 시청자들인 우리들이 주인공의 삶을 이야기를 통해 대리체험하기 때문에 타인을 더욱 이해하고 존중해줄 수 있는 도덕심을 획득한다는 이야기는 '이야기 콘텐트'를 즐기는 내게도 공감이 가는 대목이었다.

 

해당 챕터를 벗어나서도 책은 여전히 흥미롭다. 책의 가장 큰 의의는 전방위적인 주제를 다루면서 수십명의 석학을 한 권에 모아놓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단 한권을 손에 쥐고도 다양한 분야를 한번에 훑어볼 수 있다. 그런 이유로 한가지 현상을 한가지 관점으로만 보지 않아도 된다. 예컨대 하나의 챕터에 등장한 석학들은 다른 주제를 논의하는 다른 학자에 의해 거론되기도 한다.<의식의 문제>에 대해서 설득력있는 픽션의 '도덕성 기여도' 에 대해 논의했던 핑커의 이름이 어느 챕터의 학자에게서는 반대하는 학자로 거론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다양한 분야에서 관점에 따라 현상을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사이언스 이즈 컬쳐>는 단지 예술이나 인문학과 과학을 만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학과 현실 정치학, 혹은 경영학의 만남도 주선한다. 예를 들면 기후의 정치학 같은 챕터에서는, 환경 보호를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 현대 사회의 효율성을 빌려올 것을 제안하였다. 휘발유 값을 올리는 것은 환경 보호를 위한 일이 될 수는 있지만 연비가 나쁠 수 밖에 없는 구식 차를 모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경제적 부담이 된다. 이 둘을 해결하는 것은 바우처 제도다. 바우처라는 사회 서비스 이용 권 제공을 통해 소비자에게는 구매력을, 휘발유 값 인상 정책에는 실효성을 제공하는 일석 이조의 영리한 제도다. 유명 석학들의 대화는 대부분 어렵고 형이상학적인 담론에서 그치는 것으로 보이지만 때로는 이렇게 현실적이고 적용 가능한 대안을 발굴하게 만들어 유용하다.

 

물론 다양한 현상에 대한 우리의 고민은 항상 완전하게 마무리되지는 못한다. 책도 마찬가지다. 어느 챕터에서도 '시간' 이나 '음악'이라는 대화의 주제에 관해 결론을 맺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세상의 이치란 그렇다. 아무리 세계 석학들이 모인다 하더라도, 과학이 새로운 것을 증명해 준다고 하더라도, 무엇이 정확한 것이라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리라.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은 모두가 다르기 마련이고 과거의 증명은 수차례 전복될 수 있다. 그러니 이 책이 어떤 앎의 완결, 융합의 완성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적어도 <사이언스 이즈 컬처>가 독자와 대중에게 제시한 키워드는 분명해 보인다. 일상의 아주 먼 자리에 있는 여러 이야기와 고민들이(예술) 당장의 흰 밥과 좋은 집을 구하는 일과는(과학) 거리가 멀어보이지만, 이 둘이 교류하는 것이야 말로, '흰 밥과 빵에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해 할 수 있는 지'와 같은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래서 이 책은 과학과 문화와 예술의 끝없이 막연한 고민들은 여전히 굉장히 어렵지만 우리에게 더 나아질 수 있는 여지를 준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쨌거나 모든 분야는 인간이 얼마나 더 잘 행복하게 살 수 있겠느냐를 고민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 권의 잘 편집되고 기획된 단행본을 통해 다양한 분야의 석학이 의견을 교류하는 것을 지켜보는 기쁨이다. 그래서 또 다른 종류의 희망이다. 더 잘 살고, 잘 알기 위한 모든 일들을 다양한 분야 곳곳에서 지속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하고 안심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언제나 난관과 몰이해와 실수 속에서도 훌륭한 가능성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 우리는 이 과정을 바라보는 일이 즐겁다. 이런 주제의식을 책의 한 구절에서 찾아보며 리뷰를 마무리 하도록 한다.

 

 

어떤 젊은 시인이 "저에게 시인의 소질이 있습니까?" 라고 묻자

라이너 마리아 릴케 (Rainer Maria Rilke)가 했다는 유명한 대답이 있죠.

"문제 자체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문이 잠긴 방, 전혀 모르는 외국어로 쓰인 책 같은 문제를 말이죠."

예술이란 대부분 이처럼 문제 자체에 관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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