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비키초의 복수
나가이 사야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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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그믐날의 눈 내리는 저녁, 에도의 변두리 마을, 고비키초의 극장 뒤편에서 부모님의 원수를 갚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뒤에, 한 남자가 사건의 진상을 알고 싶다며 고비키초의 극장을 찾으며 시작된다. 남자는 당시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을 만난다. 극장의 바람잡이인 문전 게이샤 잇팟치, 무술연기 담당인 요사부로, 의상준비와 수선을 담당하는 호타루, 소도구를 담당하는 규조와 그의 부인 오요네, 각본을 담당하는 노노야머 쇼지. 이렇게 차례대로 만나면서 그날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그들의 개인사들도 함께 듣는다.

책을 읽기 전에는 복수극의 목격담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서, 영화 <라쇼몽>이 생각났었다. 하지만 결이 완전 다르다. 책을 읽다보면, 이렇게 분명해 보이는 상황에서 미스터리가 존재할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잠시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아주 잠시 말이다. 미스터리라고 하기엔 너무나 따뜻함을 안고 있는 책이다.

✏️ 책제목에 갇혀서 책을 읽어나갔다. 복수라잖아. 복수.. 뭔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첫 목격자의 이야기가 끝날때만 해도 글에서 묻어나는 잔잔함이 단조로웠다. 시시했다.
그러나 다음 목격자들의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어느새 '복수'는 잊어버리고 그들 개인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렇게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서 '복수'라는 자체는 잊어버리고 있을 때 작가는 정말 '복수의 뒷이야기'를 보여준다. 

✏️ 글 사이사이에 '속박', '족쇄', '짐' 이라는 단어들이 여러번 나온다. 복수를 해야하는 입장에서 가지고 있는 것들, 그리고 목격자들이 가지고 있던 그들만의 것들.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채우는 족쇄로 인해, 인생 자체를 결정지어놓고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적으로 묶어놓은 틀이 있다면, 사실 그 자체는 너무나 허술한 테두리일수도 있을텐데, 그것을 자신에게 옭아매는 이는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인 것이다. 나 역시 살아오면서 그랬다. 이거는 벗어나면 안돼. 이런 건 하면 안돼. 늘 가이드라인의 감독자는 나였다. 나이가 들면서 정말 이런것들이 필요했나 하는 생각들이 든다. 작가의 글속에서도 이런걸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다른 길도 있어. 다른 생각도 해봐. 너를 옭아매고 있는 족쇄가 정말 의미가 있는거야. 이런  것들 말이다.         

 


p. 67
물러설 수 없는 사정이란, 그 누구보다도 스스로가 그렇게 정하는 것입니다. 길을 벗어나도 의외로 다부지게 살아갈 방법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습지요.


p. 96~97
"뜻만으로 무사가 될 수 있다는 것 또한 허황된 소리다."

"충의를 다하려 해도, 천하를 위해 일하려 해도, 신분이 없으면 너는 그 걸인과 다를 바 없다. 칼에 베여도 그저 버려질 뿐인 처지지. 억울하면 스승에게 머리를 조아려서라도 봉직할 곳을 얻어내라. 그제야 비로소 네 뜻을 내세울 수 있는 법이다. 지금 네 말은 결국 패배자의 개소리에 지나지 않아. 진정한 무사가 되고 싶다면 응석은 집어치우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두루 받아들일 각오를 다져야 해."


p. 116~117
고지로는 악행에 '눈을 감아라'라고 말씀하신 아버지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고 싶었소. 아버지를 존경하기에 할 말은 해야 했던 것이오. 그러지 않고 멋대로 아버지에게 실망했고, 실망했다는 사실에 괴로워했소. 그것은 일종의 응석 아니었을까.


p. 156
"남을 얕잡아 보는 자들도 결국은 뼈만 남는다."


p. 171
"난 너보다 심성이 좋지 못해. 세상은 계단처럼 되어 있어서 위에 선 사람은 아래에 선 사람을 내려다보지. 그러니 기어올라야 한다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몰아붙여서 여기까지 왔단다. 하지만 네 말처럼 기어오르든 미끄러져 떨어지든, 불타면 뼈만 남아.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한층 편해졌어."


p. 183
무가의 자제인 기쿠노스케 씨는 호타루 씨가 말했던 계단의 꼭대기에 있는 사람이에요. 우리같이 미천한 자와는 격이 다르지요. 하지만 그 높은 곳에서 하사받은 칼이라는 강력한 힘이, 도리어 족쇄가 되기도 한답니다. 복수를 맹세하고 고향을 떠난 것도 무가의 사내이기에 짊어져야 했던 무거운 짐이에요.
난 지금까지 살명서 남을 부러워하거나 애처로워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애초에 가진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겠지요. 탐내봤자 허무할 뿐이고, 배신당하면 괴롭기만 하잖아요. 하지만 만약 유복한 집에 태어났다면, 하고 생각해본 적이 없지는 않답니다. 그래서 나와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무사나 귀인의 따님이 나오는 연극을 재미있어하는 것이고요. 그러나 어여쁘게 생긴 기쿠노스케 씨와 함께 지내는 동안, 어디에 태어나는 괴로운 일은 있는 법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런 의미애서 사람은 다들 동등한 법이지요."


p.  185
"겉가죽도, 지위도, 태생도 불타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 사로잡히면 사로잡힐수록 고통스럽게 조여드는 족쇄일뿐이지. 하지만 뼈만 남아도 후회 없는 삶이 있는지도 몰라. 나 같은 사람이야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뼛속까지 소신을 세워서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굴러들 곳이 있다는 사실이 조금쯤은 버팀목이 되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이렇게 보잘것 없는 나 같은 자도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마음을 위로해주지 않을까......


p. 257
세상에 밝고 즐겁기만 한 사람은 없어. 그 누구든 마음속의 짙은 어둠이며 수렁과 타협해가며 지내고 있을 뿐이야. 그런 속내를 드러낼 상대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도 정이고 말이야.



p. 266~267
"사람은 누구나 텅 비어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내일 먹을 밥이며 오늘 누울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죽을 둥 살둥 애쓰느라 알아차리지 못하지요.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것은 그만큼 도련님이 복 받았다는 뜻입니다."

"복 받았다는 것은 나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일세. 하지만 그래서는 살아 있는 기분이 들지 않아. 하릴없이 공허해지지. 복에 겨운 소리라는 것은 알지만, 더는 못 견딜 것 같은 때가 있어. 그리고 그런 식으로 느끼는 나 자신이 누구보다도 싫어. 대체 어찌하면 좋을지 늘 생각한다네."


p. 269
"재미있어하는 것에는 각오가 필요한 법입니다."


p. 284
"뭘 쓰든 상관없어. 재미는 사람의 수만큼 있으니까. 남을 위해서 써도 되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써도 돼. 그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바를 늘어놓아도 괜찮아. 그것이 누군가의 마음에 탁 전해지면 만만세야. 재미있으면 그만이라고."


p. 332
홀로 에도에 가서 깨달은 점 중 하나는, 때때로 남을 믿고 의지할 용기도 필요하다는 것이야. 뭐든지 혼자 짊어지겠다는 마음가짐은 대견하지만, 그래서는 무엇 하나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


p. 338
제자리를 맴도는 기분이었지. 스스로에게 똑같은 물음을 던졌지만, 매번 다른 답이 나왔다네.


p. 350
애당초 '신분'이란 무엇인지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어. 내가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세상의 얼개는 비뚤어지고 기묘한 것이 아닐까 싶더군.
그래도 그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어찌하고 싶은가.
그래도 무사로 살기를 바라는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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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의 비극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문승준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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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동안 아무도 살지 않게 된 유령 마을 ‘미노이시'. 새롭게 취임한 시장은 타 지역에서 이사 오는 주민을 지원하자는 취지의 ‘I턴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소생과’라는 부서를 신설하여 업무를 전담시킨다. 그리고 이주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마을에 오기 시작하고 그들에게는 무슨 일인가 생기기 시작하는데...

단편의 시리즈물이 이어지는 것처럼 이야기는 짜여 있다. 미노이시에 이주를 해서 들어온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들은 주어지는 상황들이 미스터리하다는 생각이 들다가 마지막에 이르면 뭔가 시시하다는 생각이 드는 정도의 마무리로 매듭지어진다. 그리고 결론에 가서 한방 맞는듯한 느낌과 함께 '이게 뭐야'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책을 덮은 뒤에, 이 소설의 잔존감이 드러난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글은 이런 점이 매력이다. 그냥 시간때우기 소설을 읽고 있는 느낌을 받게 했다가 마지막에 징 한번 쳐주기. 그리고 그 징소리의 여운속에 가두기.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대로 행동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행동의 시발점 자체가 우리가 아니라는 것,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 물론 소설속의 상황처럼 일종의 극본과 의도가 있지 않더라도 말이다. 누군가의 말에, 누군가의 글에 휘둘리지는 않았는지. 그게 바로 내가 믿고 싶었던, 듣고 싶었던 소리라서 그냥 내 뜻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그 결과가 나에게만 오롯이 남는다는 것.

한편으로 나의 많은 언행들도 뒤돌아보게 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의도된 씨앗들을 던져놓지 않았는지. 그래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누군가를 되돌려 세워놓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영화 <설계자>에서 강동원이 말하는, 그게 정말 사고였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이 계속 맴돌게 하는 소설이다.


📒 p. 186
이 세상, 어떤 것이 재앙을 불러올지 모르듯이 어떤 것이 행운을 불러오는지도 모르는 법이다.

📒 p. 387
믿는다는 것은 대개의 경우 책임도 전가한다는 뜻이다.

📒 p. 399
아니, 그것도 믿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이제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 p. 407
무엇을 우선시한다는 건 무엇을 뒤로 미루는 것이고, 무엇을 뒤로 미루는 건 이 일에 관해 말하자면 누군가 죽을 수도 있는 일을 허용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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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의 세계 - 6가지 물질이 그려내는 인류 문명의 대서사시
에드 콘웨이 지음, 이종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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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 콘웨이 《물질의 세계》

프롤로그에서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설명해달라는 기자들의 요청에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모두가 우주에서 물질이 사라지면 오로지 시간과 공간만 남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도 물질과 함께 사라져버립니다." 물질 세계에 대해서도 같음 말을 할 수 있다. 물질은 문명의 뼈대이다. 그러므로 물질이 사라진다면 우리의 정상적 생활은 붕괴된다.(p.33)

물질 세계를 다루는 이 책은 모래, 소금, 철, 구리, 석유,리튬 이렇게 여섯 가지 물질에 관해 이야기한다.
인간 중심의 역사에서 대부분 우리가 궁금해하는 것들에 대한 대답은 늘 인간 자체와 관련지어 설명되어졌다. 조금 양보한 것이 그나마 '우연'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 대답의 핵심에 물질을 두고 있다. 우리가 이루어낸 대부분의 것들은 사실 이러한 물질의 바탕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여기서 다루는 여섯 가지 물질에 대한 추구가 지정학적 역사를 어떻게 형성했는지, 또 미래를 어떻게 형성할지도 살펴본다. 탈물질화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하여 역설적으로 지금보다 더 많은 화석연료에 기대어야 한다는 사실도 언급한다.

에드 콘웨이는 이 책을 쓰는 과정에서, 즉 생활의 근원적 요소들을 더 깊이 탐구하고 조사하면서 주변의 세계와 좀 더 연결된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고 쓰고 있다. 이건 단지 저자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감사하게도 독자 또한 그런 과정을 밟을 수 밖에 없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쓰던 물건 하나하나에 얽힌 사연들이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존에 알고 있던 상식이라 생각했던 것들의 틀을 깨는 것도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생각의 전환, 다른 시각의 관점 말이다. 모래에 대한 챕터에서 나오는 유리의 산업혁명과 관련된 관점, 소금이 일으킨 혁명과 관련된 또 다른 지배물질에 대한 영역확장, 강철에서 이어지는 물리학과의 관계, 심해채굴에 대한 것, 우연히 발견된 플라스틱의 세상, 소금사막과 관련된 리튬산업 등 각 물질에 관련된 다방면의 이야기들을 보여준다. 조금은 똑똑해지는 기분이 드는 책이라고나 할까? 내용이 방대한듯해서 언뜻 손이 안갈지는 모르나 막상 읽기 시작하면 너무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p. 158
이 물질을 무시하면 안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자본주의와 권력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소금은 인간의 생존에 필수 품목이었고 이름 모를 다양한 소금이 우리 삶을 지탱해왔기 때문에 인류의 초창기부터 권력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p. 381
석탄의 시대에 뒤이어 등장한 석유의 시대는 인류를 힘들고 단조로운 육체노동에서 해방시켰고, 전 세계의 소득을 높이고 우리가 더 오래 살 수 있게 해주었다. 석유 제품과 석유에너지는 영아 사망률을 낮추었고 영양실조와의 싸움에 힘을 보탰다. 다시 말해서, 연료와 화학물질의 원천인 석유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석유덕분에 우리 삶이 나아지는 동안 한편으로는 온실가스 배출로 기후변화가 가속화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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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만든 세계 - 세계사적 텍스트들의 위대한 이야기
마틴 푸크너 지음, 최파일 옮김 / 까치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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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틴 푸크너 《글이 만든 세계》

최근《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로 나름 핫했던 하버드의 마틴 푸크너의 또 다른 책이다. 이 책은 일리아스, 길가메시 서사시부터 현대의 해리포터 시리즈까지 우리가 만들어낸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으며, 그것들이 인류역사에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를 보여준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던 민족들이 공통의 언어를 만들어내면서 세계화를 이루게 되고, 그들이 쓰던 언어를 통해서 그들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세계 또한 다음 세대로 이어놓는다.

《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에서 "문화는 다양한 표현 형식과 의미 생산에 쉽게 접근할 수 있을 때 가능성과 실험을 통해서 번영한다(p.424)"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여기서 글이 가지는 역할과 서로 연결된다. 글이 이러한 문화의 접근가능성을 생각지도 못한 영역들까지 넓혀놨기 때문이다.

'많은 작품들과 그들의 얽힌 시대문화사를 통해 글은 이런 세계를 만들어왔어'라고 말하고 있는듯 하지만, 실제로 마틴 푸크너가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래의 문장이 아닐까싶다. (잘 봤지? 그러니까 잘 사용해보자고.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이것들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술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교육이라고!!!)

p. 416~417
문학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발화를 시공간으로 깊숙이 투사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인터넷은 몇 초만에 지구상 어디로든 글을 보낼 수 있게 하면서 공간을 확대했다. 그렇다면 시간은 어떨까? 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들에 대한 안내자로서 지난 4,000년간의 문학을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미래의 문학고고학자들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길가메시 서사시』 같은 망각된 걸작들을 발굴해낼 수 있을까?

문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은, 생존을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은 지속적인 사용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텍스트는 번역되고, 전사되고, 코드 변환될 만큼 계속해서 우리에게 유의미해야하고 세월에 걸쳐 지속되도록 세대마다 읽혀야 한다. 기술이 아니라 교육이 문학의 미래를 보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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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 - 양장본
이브 엔슬러 지음, 김은지 옮김 / 푸른숲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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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브 엔슬러 《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

이 책은 소수의 사람들을 보호하자고 하는 것도, 대변하고자 하는 것도,  페미니즘을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인권에 관한,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이 책의 원제는 "Reckoning"이다. 굳이 해석을 하자면 '심판'일수도 '사유'일수도 있다.
이브 앤슬러는 사유의 부재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자신과 타인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이들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데에는 너무나 큰 용기가 필요하고, 타인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데에는 관심과 사랑이 그리고 거기에 무언가가 더 필요하다. 이브 앤슬러가 자신과 타인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것을 왜 강조했는지 책을 읽다보면 저절로 공감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제일 당황스러웠던 점들은 이게 지금 이 시대에 일어나는 일들이 맞나, 하는 것이었다. 팬데믹의 단어가 보이고, 그 상황에서 벌어지는 경제적 여건이 여성들에게 쏟아놓는 것들은 일일이 설명하기에도 마음이 아프다.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아니라고 침묵하고 방관하기에는 너무나 참혹하다. 글을 보고 있는 동안에도 이 현실을 부정하고 싶을 정도로 암담하다. 당사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마음 한켠을 끌어안는 문장들이 너무 많아, 책장넘기는 시간이 오래걸린 책이다. 최근에 읽었던 타라나 버크의 《해방》과는 또 다른 느낌.


📒 p. 13
이 책은 속도를 줄이는 것과 되돌아보고, 보고, 진정으로 다시 보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책임과 불편함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의 가장 연약한 부분과 순간을 기억하고 기리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지독히도 외로운 우리가 갈구하는 손길, 잃어버린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벽을 허무는 이야기, 벽을 세운 우리에게 왜 그랬느냐고 자문하는 이야기다. 에이즈의 시대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페미사이드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다. 이것은 슬픔, 트라우마, 지곧한 바이러스, 그리고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다. 이것은 사유에 관한 이야기다.

📒 p. 14
나는 단 한 번도 개인을 정치에서 제대로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다. 위대한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가 말했다. "감정이 육체로 들어오는 순간/그것은 정치적인 일이다. 이 접촉은 정치적이다." 나 또한 이를 믿는다.


📒 p. 20
사유는 대체 무엇이며 지금 우리에게 왜 그토록 중요할까? 사유의 과정은 기억하기, 인식하기, 책임지기의 행위를 수반한다. 눈앞에 있으나 우리가 바라보기를 거부하는 바로 그것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들여다보고 살펴보고 수치심을 기꺼이 끌어안으라고 요구한다. 사유는 개인과 집단의 책임과 그 둘이 언제, 어떻게 교차하는 지를 결정한다. 진정한 사유에는 실수와 잘못, 악행을 인정하고 사과하며 필요하다면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는 일까지도 뒤따른다.

📒 p. 21~22
여러 측면에서 이 책은 어떤 슬픔의 형상이다. 집합적이고 파편적이며 너무 늦어버린 슬픔. 그런 것들이 흘러 모였다. 그것들은 머리보다는 마음을 따른다. 그것들만의 궤적을 갖는다.
그리하여 이것은 글쓰기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 p. 22
나의 글쓰기는 증인이었다. 고발이며 고백, 발굴, 구원이었다. 단어를 나열하는 일은 일종의 벽돌쌓기였다. 그마저도 아주 잠시만 지탱되는. 그렇게 나는 혼돈과 폭력 속에서 의미를 건져 올렸다. 글 속에서 나는 아름다움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가족을 찾을 수도 있었다. 우리 존재를 비추는 거울이 없다면 무슨 수로, 우리가 실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 p. 23
나는 단어를 하나씩 하나씩 쌓아 올려 겨우 존재할 수 있었다. 내가 쓴 시구 한 절, 에세이 한 편, 연극 한 편, 기사 한 줄, 책 한 권은 전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내 존재가 증발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보호벽이었다. 당신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음절과 명사, 동사로 쌓아 올린 존재는 대단히 위태로운 명제와 같다. 읽는 이가 글쓴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가치를 모르거나 존중하지 않아, 글쓴이를 거절과 외로움이라는 남루하고 불타는 구덩이로 던져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 p. 25
글쓰기는 하나의 생존 방식일 수도 있다. 혼란을 염려하는 방식, 타인의 횡포에 휩쓸리기를 거부하는 방식, 어둠 속에서 조용히 눈물 흘리는 방식.

✏️ 이 부분을 읽는데, 정희진《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의 일부분이 생각났다. "장애인이나 여성이 자기 언어를 지니는 것은 지식의 개념을 재정의하는 전복적인 행위다......언어는 그들의/우리의 유일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살아가기 위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방법, 그리고 생존하기 위한 유일한 자원. 불행인건지 그래도 숨통이 있어서 다행인건지. 이겨내고 살아낸 자만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p. 28
나는 폭력이라는 실체가 처음으로 내 몸에 깊이 각인된 이 순간을 생생히 기억한다. 세상ㅇㄹ 향한 내 신뢰가 처음으로 흠들리기 시작한 순간, 두려움의 본질을 처음으로 알게 된 순간,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인 척해야 챘던 순간이었다. 내가 나의 ㅈ거이 된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아버지의 집에서 나는 죄수처럼 살았다. 집, 하면 떠오느는 신뢰, 안전, 평안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나는 피난민처럼 살았다.


📒 p. 176~177
일찍이 나오미 클라인은 '재난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널리 알린 바 있다. 자본주의가 더 큰 이윤을 위해 재난을 빌미로 삼아 평소라면 불가능했을 조치들을 시행하는 것을 일컫는다. 재난 가부장제는 이와 아주 유사하고 상호 보완적인 개념이다. 이 개념에 따르면 남자들은 위기를 이용해 통제권과 우위를 재천명하고 여성들이 힘들게 얻어낸 권리를 빠르게 삭제한다. 전 세계에서 가부장제는 바이러스 확산을 최대한 활용해 그 세력을 확대하고 있다.  그러는 한편 여성을 향한 폭력과 위협은 계속해서 기승을 부리고 남자들은 통제자이자 보호자를 자처하며 이에 개입한다.


📒 p. 178~179
이 파괴적 감염병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여성을 향한 폭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광경을 보고 있다.

감금, 경제적 불안, 질병의 공포, 알코올 남용이라는 록다운의 조건은 학대가 발생하기에 완벽했다. 2021년에 자신의 부인, 여자친구, 아이들을 통제하고 괴롭히고 때리는 일에 열성이며 그럴 권리를 가졌다고 느끼는 남자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과 그 어떤 정부도 록다운을 계획하며 이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사실, 이 둘 중 어느 것이 더 신경을 거스르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 코로나 시대와 연관되어 나는 내 주위의 사람들의 건강에 대한 문제만 신경썼지, 세상의 어느 부분에서 이런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했다. 이게 지금 이 시대의 일들이 맞나 싶을 정도의 이야기들이 즐비하다.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라고 나는 눈과 귀를 막고 사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팬데믹 이후에 상상할수도 없는 숫자의 여성들이 직업을 잃었다고 한다. 그것은 단지 경제적인 문제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은 정말 아주 조금이나마, 조금이라도 나아졌을까.

📒 p. 227
나의 사랑하는 친구이자 유명 액션 댄서인 엘리자베스 스트랩은 말한다. "추락? 그보다 흥미로운 것은 없다. 다른 어떤 점보다 추락에 대해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완전히. 추락은 당신이 무언가를 해 보기도 전에 눈 깜짝할 사이 일어난다. 미래는 마침내 '지금'이 순간이 된다. 추락할 때 할 수 있는 것은 추락뿐. 계회그 아이디어, 숙련된 기술 따위는 아무 소용없다.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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