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VS 옴진리교 - 일본 현대사의 전환점에 관한 기묘한 이야기
네티즌 나인 지음 / 박하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이비 종교는 TV 시사프로그램 속 단골 소재다.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약한 구석을 건드려 종교에 맹목적으로 빠져들게 하고, 구원이라는 명목으로 교묘하게 사람을 속여 전 재산을 바치게 만든다. 방해가 되는 사람을 때론 잔혹하게 살해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1990년대 일본 사회를 뒤흔든 옴진리교는 그런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인류최종전쟁을 주창하며 사린 가스, VX 등의 화학무기를 제조해 수차례나 테러를 벌이고, 끝내는 1995년 3월 20일 도쿄 지하철에 사린 가스를 살포해 13명을 살해하고, 약 6300명에게 상처를 입혔다.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자국 종교집단에 의해 평일 아침 출근 시간대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전쟁에서도 보기 힘든 대규모 독가스 공격이 자행된 것이다. - <일본 vs 옴진리교> 20쪽

<일본 vs 옴진리교>(네티즌 나인 지음, 박하 펴냄)는 일본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던진 옴진리교 사건을 다룬 책이다. <일본 vs 옴진리교>는 옴진리교 탄생부터 옴진리교가 저지른 수많은 범죄, 지하철 사린 가스 사건 이후 일본 정부가 어떻게 옴진리교에 맞서 싸웠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사린, VX, 탄저균 등 생화학 무기 테러 저질러

 <일본 vs 옴진리교> 겉표지.
▲  <일본 vs 옴진리교> 겉표지.
ⓒ 박하

관련사진보기


옴진리교 창시자이자 교주는 아사하라 쇼코라는 가명으로 더 유명한 마쓰모토 치즈오다. 침구사였던 마쓰모토 치즈오는 1984년 옴진리교의 전신인 '옴 신선회'를 설립했고, 1987년 '옴진리교'로 이름을 바꿨다.

옴진리교는 1990년대를 풍미한 종말론과 그로 인한 불안감 속에서 성장했다. 세기말 일본사회에서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토대로 한 1999년 7월 멸망설, 태양계 행성이 지구를 중심으로 거대한 십자가 형태로 정렬하면서 행성들의 중력이 지구에 영향을 줘서 지구가 멸망한다는 '그랜드 크로스' 설 등이 유행했다.

마쓰모토 치즈오는 인류 종말에 대한 공포심을 자극해 "핵전쟁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옴진리교의 가르침을 세계와 확산시켜야 한다"면서 포교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실제로 이후 범죄에 가담한 옴진리교 간부들은 범죄 행위를 저지르면서도 인류를 구제하기 위한 일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옴진리교는 1995년 도쿄 지하철 테러 이전에도 수많은 범죄를 저질렀다.
▲  옴진리교는 1995년 도쿄 지하철 테러 이전에도 수많은 범죄를 저질렀다.
ⓒ 박하

관련사진보기

또한 마쓰모토 치즈오는 옴진리교 설립 초기부터 교주의 지시에 따른 살인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티베트 불교 용어인 '포아'는 본디 현시점보다 높은 세계로 의식을 옮기는 것을 의미하는 말인데 마쓰모토 치즈오는 교주의 살인 교사는 이것을 따른 사람과 살해당한 상대방마저 구제하는 행위라는 의미에서 '포아'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옴진리교는 이런 교리를 바탕으로 1990년 중의원 총선거 이후 무장 테러 노선을 걷는다. 진리당이라는 이름으로 마쓰모토 치즈오를 비롯해 후보자 25명을 냈지만, 후보자 전원이 낙선한 데 분개한 옴진리교는 보툴리누스균, 탄저균, 사린, VX 등 다양한 생물, 화학 무기를 제조하고, 이를 이용한 테러를 시도한다.

그 정점이 바로 도쿄 지하철 테러다. 옴진리교는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들어오는 상황에서 엄청난 재난을 불러일으켜 수사 여력을 빼앗자는 잘못된 판단으로 도쿄 지하철 테러를 계획한다. 1995년 3월 20일, 옴진리교 간부들은 가스미가스키 역에서 경시청 쪽 출구 가까이에 정차하는 차량에서 사린가스를 유출해 사망자 13명, 부상자 6300여 명을 낳은 대참사를 일으킨다.

일본 정부의 반격

옴진리교의 도쿄 지하철 테러 이후 일본 정부가 대대적으로 반격을 개시하는 대목이 이 책의 핵심이다. 사실 옴진리교가 도쿄 지하철 테러 이전에 저질러왔던 무수한 범행에 대해 일본 정부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옴진리교가 도쿄 지하철 테러를 저지르는 순간에도 옴진리교는 일본 정부가 정식으로 승인한 종교법인이었고, 경찰은 옴진리교 내부 조직도마저 확보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옴진리교가 도쿄 지하철 테러를 저지른 이후 일본 정부는 종교법인법에 따른 해산명령, 옴진리교 파산 절차 돌입, 파괴활동방지법 적용 등 '세 자루 창'으로 옴진리교를 붕괴시키는 데 나선다.

특히 일본사회가 손해배상 청구를 통해 옴진리교를 파산시키려던 대목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피해자와 유가족이 직접 옴진리교 재단을 상대로 사건의 진상을 추궁하고 피해를 복구하는 과정이었다.

옴진리교 사건 피해자들은 옴진리교의 만행으로 인해 당연히 누려야 할 일상의 소중한 행복을 순식간에 빼앗긴 사람들이었다. 피해자답게 눈물을 흘리며 기자회견을 열거나 피해자답게 방 한구석에서 슬픔에 잠겨 있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답게' 당당하게 자신들의 권리를 회복하고 피해를 금전으로라도 복구해내라고 옴진리교 교단에 요구할 정당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 <일본 vs 옴진리교> 239쪽


옴진리교의 재산 중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책상 하나 연필 한 자루까지 모두 팔아서 단돈 1엔을 파산 절차에 참가한 피해자의 숫자인 1,201등분으로 나누는 한이 있더라도 피해자에게 모두 돌려주겠다는 일본 사회의 의지"(<일본 vs 옴진리교> 252쪽) 덕분에 옴진리교 사건 패자들은 2008년까지 40.39%의 채권을 회수했다.

일반적인 파산 절차의 경우 채권의 20%가량을 받으면 성공적인 사례로 본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40%의 회수율은 놀라운 성과였지만, 일본사회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도쿄 지하철 테러 이후 20년 이상 지난 지금도 '옴진리교 범죄 피해자 지원기구'가 옴진리교의 후계단체인 알레프와 빛의 고리로부터 매년 손해배상금을 회수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채권자가 내야 할 예납금을 대신 지급하고, 특별법을 제정해 국가 채권의 우선 배당권을 포기하는 등 통상적인 절차를 바꾸면서까지 옴진리교 피해자들이 1원이라도 더 많은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피해자가 손해배상을 받을 권리가 통상적인 매뉴얼보다 앞선다는 인식이 없었다면 아마 불가능했을 일이다.

유가족과 피해자, 피해보상 받을 권리 있다

여기서 옴진리교 이야기는 세월호 참사 이야기로 뻗어나간다. 저자는 옴진리교에 맞선 일본사회의 대응과 세월호 참사에 대한 한국사회의 대응을 대비시킨다.

일본사회는 사건 발생 20년 이상이 지난 현재까지도 옴진리교 후계단체가 매년 일정한 금액을 손해배상으로 갚아나가도록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옴진리교 사건의 사후 처리에 책임 있는 사람 중 누구도 "돈을 요구하다니 유가족과 피해자로서 진정성이 없다. 결국 돈이나 바라고 저러는 것이냐" 따위의 말을 하지 않았다.

저자는 '진정성' 운운하며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를 비난하는 이들을 향해 "피해자와 유가족은 돈을 받아야 한다"(305쪽)고 반박한다. 사람의 생명 값이 너무 싸서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스텔레 데이지 호 침몰 사고 같은 대형참사가 되풀이되는 사회에서는 "유가족과 피해자가 많은 돈을 받아내는 것이 결과적으로 돈보다 생명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드는 길인 것이다"(306쪽).

유가족과 피해자는 돈을 받아야 한다. 그것이 사후처리의 첫걸음이다. 일본 사회는 옴진리교 사건이 발생한 이후 수십 년의 시간을 투자해 겨우 이 첫걸음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제는 한국이 이 첫걸음을 당당하게 내디딜 차례다. - <일본 vs 옴진리교> 308쪽

유가족과 피해자는 돈을 받을 권리가 있고, 사건의 가해자가 그 돈을 낼 때 비로소 비슷한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는 더 안전한 사회가 될 수 있다. 일본의 한 종교단체가 저지른 테러, 이미 20년도 전에 벌어진 참사가 2018년 한국사회에 던지는 교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폭주하는 일본의 극우주의 - 재특회, 왜 재일 코리안을 배척하는가
히구치 나오토 지음, 김영숙 옮김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해 민주노총한국노총이 공동 주최하는 '일제강제징용 조선인 노동자 합동추모행사'에 참석해 일본을 방문한 일이 있다당시 갔던 곳 모두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였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들이 일했던 탄광을 개조해 만든 단바 망간 기념관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단바 망간 기념관은 2년 전 기념관 부지에 강제징용노동자상을 세운 이후 극우세력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극우세력이 한 달에 일백여 통씩 '일본은 강제동원을 한 적이 없다'는 항의 전화를 하고이메일을 보낸다는 것이다.


지난해 4월에는 넷우익(인터넷에서 주로 활동하는 일본 우익 단체를 일컫는 말-기자 주한 명이 입장료를 내지 않고 들어와 기념관에 들어와 노동자상 사진을 찍고 인터넷에 올렸다고 한다경찰도 오기 힘들 만큼 외진 곳이라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게 아닌지 나까지 불안할 정도였다.

 

일정 내내 우리를 안내했던 분은 '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 일명 재특회 이야기를 했다주로 재특회가 이야기하는 재일조선인의 특권이란 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2 3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꼭 재일조선인이 아니더라도 일본에 사는 한국인들이 재특회 등 일본 극우세력들의 활동에 얼마나 불안감을 느끼고 있을지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동시에 재특회는 대체 어떤 조직인지왜 있지도 않은 재일특권을 주장하는지 새삼스레 궁금해졌다.


'재특회왜 재일 코리안을 배척하는가'란 부제가 달린 <폭주하는 일본의 극우주의>(히구치 나오토 저미래를 소유한 사람들)은 다양한 이론과 실증조사를 활용해 재특회로 대표되는 '일본형 배외주의'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분석한다.


"재특회를 낳은 것은 장기불황이 아니다"


 <폭주하는 일본의 극우주의> 표지
  <폭주하는 일본의 극우주의> 표지
ⓒ 미래를 소유한 사람들

관련사진보기

재특회에 대한 기존 담론은 일본사회의 구조변동에 따른 불만과 불안이 재특회의 탄생 배경이라고 설명한다.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야스다 고이치가 쓴 <거리로 나온 넷우익>이 대표적인 사례다이 책은 일본에서 고단샤논픽션상과 일본저널리스트상을 수상했고한국에서도 일베를 재특회와 견주어 설명하는 맥락에서 주목받았다.


야스다 고이치는 <거리로 나온 넷우익>에서 "지금의 차별적배외적 운동은 현실의 온갖 불만과 불안을 끌어들이는 블랙홀로 기능하고 있다"(7)고 주장한다그는 재특회 회원들을 "다들 힘들어보이는 사람들"(367)로 표현하면서 1990년대 일본사회의 구조 변화 속에서 경제적 불안정에 시달리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고용 유연화 정책 탓에 기업이 정규직 사원을 큰 폭으로 줄이고비정규직 노동자가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는 가운데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사람들 중 일부가 '일본인'이라는 불변의 '소속감'을 찾아 나서면서 배외주의 운동이 성장했다는 주장이다.


야스다 고이치가 인터뷰한 프리랜서 작가 시부이 데쓰야도 비슷한 설명을 늘어놓는다.


"최근 들어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이 급증했습니다정규직 자리를 두고 가혹한 의자 놀이가 시작된 거죠의자가 남던 시대라면 외국인에게 신경 쓰지 않고 관용적일 수 있었어요그런데 의자가 부족해지면서 먼저 앉아야 되는 건 일본인이라는 이야기가 나온 거죠그것이 언제부터인가 외국인은 나가라는 욕설로 바뀌었고요."-<거리로 나온 넷우익> 350


이런 설명이 사실이라면 "우리(재특회)는 일종의 계급투쟁을 하고 있습니다우리의 주장은 특권에 대한 비판이고엘리트 비판입니다"(재특회 홍보국장 요네다 류지)라는 주장도 그저 터무니없는 말로 치부해버릴 수만은 없다물론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재일조선인은 특권계급이 아니기 때문에 재특회의 '계급투쟁'은 망상에 기반을 둔대단히 기괴하고 비틀린 '계급투쟁'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히구치 나오토 도쿠시마대학 교수는 "재특회를 낳은 것은 장기불황이나 사회 불안의 증대라는 지금 현재의 문제가 아니다"(<폭주하는 일본의 극우주의> 6)고 단언한다.

 

그는 <거리로 나온 넷우익>에 등장하는 인물 중 "힘들어보이는 사람들"이라고 인정해도 좋을 사람은 7명에 불과하며그 중 다수가 체포자가 속출한 '팀 간사이'(재특회를 중심으로 간사이 지역에 거주하는 우익 활동가들이 만든 모임교토 조선제1초급학교 앞에서 "조선학교를 부숴라"면서 집회를 하고도쿠시마 현 교직원 조합 사무실에 난입하는 등 과격한 행동을 벌여 다수의 체포자가 나왔다-기자 주관계자이며양키 문화를 농후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배외주의 운동에서도 특이한 존재라고 반박한다.

 

 히구치 나오토 도쿠시마대학 교수는 <거리로 나온 넷우익>에 등장하는 인물 38명 중 "힘들어보이는 사람들"이라고 인정해도 좋을 사람은 7명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파란색 표시가 "힘들어보이는 사람들"이다.
  히구치 나오토 도쿠시마대학 교수는 <거리로 나온 넷우익>에 등장하는 인물 38명 중 "힘들어보이는 사람들"이라고 인정해도 좋을 사람은 7명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파란색 표시가 "힘들어보이는 사람들"이다.
ⓒ 히구치 나오토

관련사진보기


히구치 나오토 교수가 재특회 25명을 비롯한 배외주의운동 활동가 34명을 조사한 결과를 봐도 정규직이 30명인 반면 비정규직은 2명에 불과하다. 학력과 직업 면에서도 대학(중퇴, 재학 포함) 24명, 화이트칼라 22명으로 고학력 화이트칼라가 많은 편이다. 통념과 달리 재특회의 주류는 하층계급이 아닌 것이다.

 히구치 나오토 도쿠시마대학 교수가 배외주의운동 활동가 34명을 조사한 결과 대학(중퇴, 재학 포함) 24명, 화이트칼라 22명으로 고학력 화이트칼라가 많은 편으로 나타났다.
  히구치 나오토 도쿠시마대학 교수가 배외주의운동 활동가 34명을 조사한 결과 대학(중퇴, 재학 포함) 24명, 화이트칼라 22명으로 고학력 화이트칼라가 많은 편으로 나타났다.
ⓒ 히구치 나오토

관련사진보기


재특회에 참여한 비정규직 노동자도 사회경제적 지위 때문에 재특회에 뛰어들었는지 의심스러운 점이 많다저자는 "야스다의 저작에 등장하는 인물 중 '나무 심는 기술자'였던 다르비슈의 경우도 문제는 학력이나 직업이 아니라 어머니가 이란인이라는 사실이었다(중략)'생선가게 점원'인 게이지로도 팀 간사이 리더의 멋있는 모습에 매혹되어서이지 그것이 그의 직업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은 무리이다"(<폭주하는 일본의 극우주의> 116)라고 지적한다.


사실 서구의 극우 연구를 봐도 희소자원 획득을 둘러싼 집단 간의 경합이 민족적 분쟁의 배경에 있다는 '경합론'은 현실과 그다지 잘 들어맞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영국의 경우단순히 실업률이 높은 지역의 유권자는 오히려 극우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실업률이 높은 지역에서는 극우가 아니라 경제 정책을 기대할 수 있는 정당에 투표한다는 것이다.


"재일 특권은 신빙성 낮아... 진짜는 자학, 반일 프레임"

저자는 재특회를 보수주의 정치의 변용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일본 정부는 1980년대 이후 북한과의 관계를 이유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에 제재를 가하는 등 지속적으로 배외적인 정책을 취했고재특회의 주장과 행동도 일탈적인 스타일을 제외하면 대부분 이제까지 일본 정부나 매스컴이 해온 이야기의 반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보수세력이 이제껏 주장해온 근린제국 문제(한국북한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역사분쟁영토분쟁 등을 가리키는 말-기자 주)와 역사수정주의(이미 정설로 굳어진 역사적 사실에 이의를 제기해 그런 사실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부정하거나기존 통설에 수정을 가하려는 경향여기서는 일본이 침략전쟁이나 위안부 문제 등을 부인하는 경향을 의미한다-기자 주)가 배외주의로 들어가는 입구다.

 

앞서 언급한 배외주의운동 활동가에 대한 조사에서 배외주의운동에 관계하게 된 계기가 된 사건으로 한국북한중국에 관련된 사건을 꼽은 사람이 11이와 관계되는 역사수정주의까지 포함하면 동아시아 관련 사건을 든 사람이 19명에 달하는 반면 외국인문제를 든 사람은 6명에 불과했다.


 히구치 나오토 도쿠시마대학 교수가 재특회 25명을 비롯한 배외주의운동 활동가 34명을 조사한 결과 배외주의운동에 관계하게 된 계기가 된 사건으로 한국, 북한, 중국에 관련된 사건을 꼽은 사람이 11명, 이와 관계되는 역사수정주의까지 포함하면 동아시아 관련 사건을 든 사람이 19명에 달하는 반면 외국인문제를 든 사람은 6명에 불과했다.
  히구치 나오토 도쿠시마대학 교수가 재특회 25명을 비롯한 배외주의운동 활동가 34명을 조사한 결과 배외주의운동에 관계하게 된 계기가 된 사건으로 한국, 북한, 중국에 관련된 사건을 꼽은 사람이 11명, 이와 관계되는 역사수정주의까지 포함하면 동아시아 관련 사건을 든 사람이 19명에 달하는 반면 외국인문제를 든 사람은 6명에 불과했다.
ⓒ 히구치 나오토

관련사진보기


그래서 재일특권은 가짜 쟁점에 가깝다히구치 나오토 교수는 "재일 특권에 관하여 경험적 신빙성이 발생하는 사례는 현실에서는 소수였다"며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은 '자학', '반일'이라는 우파 사회운동 전체를 결속시키는 마스터 프레임의 존재였다재일 특권을 공언하는 정치가를 찾기는 어렵지만역사수정주의나 근린제국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는 정치가는 끊이지 않는다재일 특권 프레임은 그러한 자학반일의 하위 프레임의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재일 특권이라는 경험적 신빙성이 낮은 프레임은 자학반일이라는 근린제국재일 코리안일본의 좌파라는 적수를 하나로 취급하는 프레임에 의해 보강된다."-<폭주하는 일본의 극우주의> 215


실제로 히구치 나오토 교수가 조사한 재특회 회원 A씨는 "전후 문제는 재일 문제에 집약돼있다"고 말한다.


"(재일 특권에 매달리는 것은전후 문제는 재일 문제에 집약되기 때문입니다아사히신문의 니시모토 기자가 훌륭하게 고찰해주셨습니다만집회에 모이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전후문제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많지만 여기 모인 목적은 재일 특권 문제라고재일 특권 문제는 전후 문제의 상징이라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적어주셨어요...GHQ가 일본에 재일이라는 쐐기를 박고 사라졌다는 것이죠...결국은 재일이라는 존재를 남겨두면 일본에게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의도가 있었는지 여부는 모르겠지만사실 그렇게 되었지만."


말하자면 전승국들이 일본에 전후 체제를 강요한 것이 전후 문제이고재일조선인은 전승국이 박은 '쐐기'이기 때문에 재일조선인 문제에 집착하는 것이다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재일 특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해도 여전히 재일조선인을 공격할 가능성이 높다.


그들에게 재일특권 문제는 표면적인 쟁점일 뿐핵심은 일본의 식민통치 등 과거사 문제인 셈이다.


"역사문제 해결이 배외주의에 대한 근본대책"

현재 재특회는 과거 무섭게 성장하던 기세가 한풀 꺾인 상태다일본사회 안에서 재특회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지고재특회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재특회가 재일조선인들에게 '바퀴벌레한반도로 돌아가라등의 혐오발언을 하며 벌인 시위에 대해 일본 최고재판소가 1,200만 엔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고올해 4월에는 재특회 간부 니시무라 히토시가 명예훼손죄로 기소됐다.


하지만 히구치 나오토 교수는 재특회를 공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그의 표현을 빌리면 "배외주의운동은 단순히 민족차별주의로서의 재일 코리안 배척이 아니다. '주류의 역사에 대하여 불협화음을 내는존재인 재일 코리안을 오욕의 역사와 함께 말살하려는 욕망이 바탕에 있다."(372~373따라서 "역사 문제의 해결이야말로 배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된다"(6)

 

결국 1945년 종전 이후 70여 년 간 해결되지 못한 역사 문제가 일본의 침략전쟁위안부 문제 등을 부인하는 역사수정주의를 낳았고역사수정주의에 입각한 정보가 1990년대 이후 인터넷 등을 통해 대중화되면서 오늘날 재특회라는 혐오의 결정체를 탄생시킨 셈이다.

 

미국의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는 "과거는 죽지 않으며 심지어 지나가지도 않는다"고 말했다그의 말처럼 오래도록 해결하지 못하고어중간하게 방치해뒀던 일본의 과거사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완화되기는커녕 더 악화돼 최악의 형태로 나타났다이미 지나간 일이라고시간이 지나가면 해결될 거라고 핑계를 대며 회피하는 대신 "오욕의 역사를 말살하려는 욕망"에 맞서 싸워야 할 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본 신민족주의 전환기에 『국체의 본의』를 읽다 히토쓰바시대학 한국학연구센터 번역총서 1
히토쓰바시대학 한국학연구센터 기획, 형진의.임경화 엮음, 다카하시 데쓰야 해설 / 어문학사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것은 '국체(國體)'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일본이 태평양전쟁 패배를 인정하고, '일본 개벽 이래의 불명예인 문서'라는 항복문서에 서명했던 이유는 국체를 수호하기 위해서였다.

히로히토 천황은 1945년 8월 15일 '종전 조서'를 낭독하면서 "이로써 짐은 국체를 수호할 수 있을 것이며, 너희 신민의 적성을 믿고 의지하며 항상 너희 신민과 함께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종전 조서'뿐만 아니다. 메이지 천황이 반포한 교육칙어, 군인칙유 등 각종 교서에도 국체란 단어는 빠지지 않는다. 사실 메이지 천황이 1899년 반포한 대일본제국헌법 자체가 국체란 말만 사용하지 않았을 뿐 국체의 핵심 내용을 담고 있다. 

그만큼 국체는 근대 일본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다. 그래서 근대 일본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일본 신민족주의 전환기에 『국체의 본의』를 읽다>(히토쓰바시대학 한국학연구센터 기획, 형진의‧임경화 편역)는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책이다.
  
"만세일계의 천황이 황조의 신칙 받들어 통치" 

<일본 신민족주의 전환기에 『국체의 본의』를 읽다> 표지.ⓒ 어문학사



사실 국체를 한 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한 일본학자는 "국체라는 단어와 개념만큼, 일본의 근대를 어둡게 옥죄었던 개념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국체 개념만큼, 또한 애매모호한 개념은 아마 역사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게다가 국체라는 개념 자체가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변해왔다. 일본연구자 강상규는 "'국체'란 한번 정해지면 자신의 모습을 고정시켜놓고 변하지 않는 그런 성격의 존재태라기보다는 이데올로그들의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생성태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까닭에, 정의될 수 있는 하나의 개념이라기보다는 포괄적인 담론체계에 보다 가까운 것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국체의 본의』는 이처럼 불확실한 국체의 개념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자 일본 문부성이 1937년 국체에 대한 해석서로 간행한 책이다. <일본 신민족주의 전환기에 『국체의 본의』를 읽다>는 『국체의 본의』 를 80년 만에 한국어로 번역하여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학 교수의 해설, 번역자인 임경화 연세대학교 교수, 형진의 한남대학교 교수의 해설과 후기 등을 추가한 책이다.

『국체의 본의』는 국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황조의 신칙을 받들어 영원히 통치하신다. 이것이 우리 만고불역의 국체이다. 그리고 이 대의를 기반으로 일대 가족국가로서 억조가 일심으로 성지를 받들고 명심하여, 능히 충효의 미덕을 발휘한다. 이것이 우리 국체가 정화로 삼는 바이다. 이 국체는 우리나라의 영원불변한 근본으로, 역사를 관통하여 일관되게 빛나고 있다.-<일본 신민족주의 전환기에 『국체의 본의』를 읽다> 31쪽
  
여기서 만세일계는 천황의 황통이 영원히 한 계통으로 이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황조의 신칙은 무엇인가. 『국체의 본의』에 따르면 황조, 즉 일본황실의 조상인 태양신 아마테라스는 황손인 니니기에게 다음과 같은 신칙을 내렸다.
  
도요아시하라노치이호아키노미즈호국[풍요롭게 갈대가 우거지고 영원무궁히 벼이삭이 영그는 일본의 국토라는 뜻으로 일본을 아름답게 부르는 이름-기자 주]은 내 자손이 왕이어야 하는 땅이다. 내 황손들이여, 가서 통치하라, 자 가라, 황위의 번영은 천양과 함께 더욱더 무궁하리라.-<일본 신민족주의 전환기에 『국체의 본의』를 읽다> 36~37쪽
  
한마디로 천황은 곧 위대한 태양신 아마테라스의 후손으로 "황조황종과 일체가 되시어 영구히 신민과 국토의 생성 발전의 근원이 되시고 한없이 존귀하고 황송한 분"(45쪽)이라는 내용이 국체의 핵심이다.

이는 곧 "신민의 길은 (중략) 억조창생이 마음을 하나로 하여 천황을 받드는 것에 있다"(53쪽),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이른바 자기희생이 아니고, 소아를 버리고 크신 능위에 살면서 국민으로서의 참 생명을 떨쳐 일으키는 것"(55쪽)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민주주의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실제로 『국체의 본의』는 민주주의, 자유주의 등 근대 서양사상의 근저에는 개인주의적 인생관이 깔려 있고, 그 결과 "자의적인 자유해방만을 추구하여 봉사라는 도덕적 자유를 망각한 잘못된 자유주의나 민주주의가 발생했다"(159쪽)고 비판하고 있다.

이는 『국체의 본의』의 탄생 배경인 국체를 둘러싼 논란과도 연관돼 있다. 미노베 다쓰키치 도쿄제국대학 교수는 법인인 국가가 통치권의 주체가 되고, 천황은 국가의 최고기관으로 주권을 행사한다는 '천황기관설'을 주장했고, 당시 오카다 수상이나 천황도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익 세력들이 1935년 천황기관설을 "서양의 민주사상으로써 우리 신성한 흠정헌법(군주가 제정한 헌법으로 군주국가에서 전제군주가 군주의 권력을 유보하고 국민에게 어느 정도의 권리나 자유를 은혜적으로 인정하면서 제정한 헌법-기자 주)을 곡해하며 국체의 본래 의미를 교란하는 것으로 불순하여 절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규탄하는 '국체명징운동'을 일으키면서 천황기관설은 부정당했다.

번역자인 임경화 교수의 해설을 빌리면 헌법을 입헌주의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국가권력의 한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천황제의 근대화를 꾀했던 천황기관설이 패퇴하고, 국가 주권의 절대무제한성과 신민의 절대복종을 강요한 우익 세력들이 승리한 것이다. 일본 정부가 우익 세력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국체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밝히려 쓴 『국체의 본의』는 탄생 과정부터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내용을 담을 수밖에 없던 셈이다.

국체 이데올로기는 식민지배를 낳았던 팽창주의와도 연결된다. 『국체의 본의』는 일본이 수행한 침략전쟁이 '역대 천황의 국토 경영의 정신'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주장한다.
  
(전략) 최근에는 일청‧일러 전쟁도 한국병합도, 만주국 건국에 진력하신 것도, 모두 위로는 아마테라스 대신이 이 나라를 하사하신 덕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국토의 안녕과 애민의 대업을 이루어 온 천하에 위광을 빛내고자 하시는 크신 마음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일본 신민족주의 전환기에 『국체의 본의』를 읽다> 49쪽
  
이 같은 국체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도 국체를 위협하는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조선 독립의 기도'는 '제국 영토의 일부를 참절하여 그 통치권의 내용을 실질적으로 축소하고 이것을 침해하려는 것'으로 치안유지법상 '국체의 변혁'을 기도하는 행위로 규정돼 처벌받았다.
  
황국신민교육, 사상 검증 텍스트로 활용돼
  
사실 『국체의 본의』에서 깊이나 통찰, 심오함은 찾아볼 수 없다. 애초에 증명이 불가능한 신화에 기대어 천황의 위대함과 권위를 찬양하는 내용을 거듭 되풀이하는 내용뿐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국체의 본의』, 국체라는 관념이 끼친 영향력이다. 『국체의 본의』는 1943년 11월 말까지 약 173만부가 발행됐고, 패전 당시까지 300만 부 가까이 나왔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로 많은 부수가 간행됐다. 

배포 범위 또한 일본 국내는 물론이고 식민지였던 조선과 타이완, 심지어는 브라질 등 일본인 이민자사회 학교에까지 미쳤기 때문에 『국체의 본의』는 전시 황국신민 교육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학생들의 필독서로 공무원 시험을 비롯한 모든 시험에서 사상을 검증하는 수단으로도 사용됐다.

『국체의 본의』는 식민지 조선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국체의 본의』 발행 다음해인 1938년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은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3대 교육강령으로 '국체명징', '내선일체', '인고단련'을 내걸었다.

후임 조선총독인 고이소 구니아키는 징병제 실시를 준비하면서 황국신민화를 위한 교본으로 『국체의 본의』를 활용했다. 일례로 당시 평양사범학교 부속 국민학교에서는 3대 교육강령을 교훈으로 하고 직원조례에서는 신전 예배와 함께 『국체의 본의』를 윤독했으며, 매월 1회 실시하는 강당 수신에서는 주사가 『국체의 본의』를 중심으로 훈화했다.

이 같은 국체 이데올로기는 식민지 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인에게도 큰 비극을 불러왔다. 문학평론가 고모리 요이치는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즉시 수락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쇼와 천황 히로히토와 그 측근들의 관심이 어떻게 하면 '국체를 수호하고 황국을 보위'할까 하는 것에만 있었고, 거듭되는 공습에 의한 국민의 희생 따위는 둘째, 셋째 문제로 봤기 때문"(<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33~34쪽)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히로히토 천황이 포츠담 선언 발포 전날인 7월 25일 측근인 기도 고이치에게 물었던 것은 '황위의 표식'으로 역대 천황이 황위와 함께 물려받는 3종의 신기(태양신 아마테라스가 황손인 니니기에게 하사한 야사카니 곡옥, 야타 거울, 구사나기 검-기자 주) 수호에 관한 내용뿐이었다. 기도 고이치는 <기도 고이치 일기>에서 천황과의 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군은 본토 결전이라 칭하며 일대 결전에 의해 전기 전환을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종래의 능력이나 경험에서 볼 때 쉽게 믿을 수는 없는 일이다. 만일 이에 실패하면 적은 아마 낙하산 부대를 국내 각처에 내려보내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경우에 따라서는 대본영이 포로가 되는 일 같은 것도 꼭 가공의 이야기라고만은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3종의 신기를 수호하는 일이다. 이를 완수하지 못한다면 황통 2천 6백여 년의 상징을 잃게 되며, 결국 황실도 국체도 수호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이를 생각하고 '3종의 신기'의 수호가 극히 곤란해지는 일이 닥칠 때, 어려움을 견디고 강화하는 것이 극히 긴급한 임무라고 믿는다.
  
히로히토 천황과 그 측근들이 '3종의 신기'를 어떻게 수호할지 고민하면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지 않는 동안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해 33여만 명이 사망했다.

고모리 요이치는 이에 대해 "요컨대 히로히토는 자신의 선조라고 하는 자가 남긴 거울과 칼, 구옥이라는 골동품(혹은 그 복제품)을 지키기 위해 33만 명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이다"(<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40쪽)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처럼 큰 비극을 낳았던 국체 이데올로기가 오늘날 일본사회에서 여전히 살아 남아있다. 해설을 쓴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의 말이다.
  
자유민주당의 「일본국헌법 개정 초안」(2012년 발표)은 국민주권이나 기본적 인권의 존중이라는 현행 헌법의 원칙을 형식상 유지하지만, 전문의 첫머리에서 "일본국은 오랜 역사와 고유의 문화를 가지고, 국민통합의 상징인 천황을 받드는 국가"라고 선언하고, 개인주의를 적대시하고 가족이나 국가를 우위에 두려는 경향이 현저하다. 전후 일본의 지배적 정당이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국체론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짙게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일본 최대의 우파단체인 '일본회의' 같은 복고적 국가주의를 주장하는 세력이 존재하고, 정계만이 아니라 관계, 재계, 학계 등에도 지지자가 확산되고 있다.-<일본 신민족주의 전환기에 『국체의 본의』를 읽다>172쪽
  
뒤늦은 간행, 언론의 무관심
  
다만, 1945년 패전 이후 국체 관념이 변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는 있다. 1946년 신헌법 제정과 함께 국체 관념이 유효성을 상실하고, 천황제란 용어가 주로 쓰였는데 천황제는 천황의 '인간선언', 미시마 유키오가 제시한 '문화 개념으로서의 천황' 개념, 아키히토 천황의 '헌법준수발언' 등 을 거치며 변화를 겪었다.

특히 히로히토 천황은 1946년 '인간선언'에서 "짐과 너희 국민 사이의 유대는 시종 상호 신뢰와 경애로 묶여지는 것이지 단순히 신화와 전설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천황을 현인신으로 하고, 또 일본 국민을 다른 민족보다 우월한 민족이라 하며, 나아가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가진다는 가공의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1990년대 이후 우익들 사이에서 노골적으로 황실을 비판하는 사람이 출현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이와 관련해서 "이미 천황제는 일본 내셔널리즘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거나 '천황제 없는 내셔널리즘'이라는 말까지 통용되고 있다. 

물론 이런 비판 자체가 대부분 전통적인 천황제를 기대하는 우익세력이 황태자와 황태자비의 전통 파괴적인 행위를 비판하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지만, 『국체의 본의』가 그리는 절대적인 천황제와는 분명 거리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익세력이 이런 변화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태평양전쟁 이전의 국체 개념, 『국체의 본의』로 회귀하고 있다고도 해석할 수 있겠지만, 어찌됐든 해설과 역자 후기 등에서 천황제의 변화를 다루지 않고, 『국체의 본의』가 오늘날 일본사회에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 대목은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다 해도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의 지적처럼 국체 이데올로기는 아직 살아있고, 오늘날에도 <일본 신민족주의 전환기에 『국체의 본의』를 읽다>를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오히려 놀라운 점은 『국체의 본의』가 간행된 지 80년 만인 2017년에야 처음 한국어판이 나왔다는 사실이다.

추천사를 쓴 서경식 교수는 "『국체의 본의』 전문이 이번에 처음으로 한국에서 번역 간행된다는 것을 알고 나는 어쩐지 허를 찔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우리 조선민족 전원이 알아야 하는 문헌이므로, 당연히 이미 번역서가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일본 신민족주의 전환기에 『국체의 본의』를 읽다>이 이토록 소리 없이 나오고, <한겨레신문>에만 관련 보도가 나왔다는 사실도 놀랍다. 아베 신조 정권 하에서 진행되는 일본의 우경화에 대한 정치기사는 그토록 쏟아지는데, 정작 그 뿌리인 국체 관념에 대한 관심은 이토록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봐야 좋을까.

일본의 식민지배에 분노하면서도 정작 식민지배를 가능하게 했던 국체 이데올로기는 잘 모르는 그 얄팍함이 오늘날 한국사회가 일본을 인식하는 수준인 것 같아 씁쓸하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일본 우익의 어제와 오늘>, 「일본의 자기정체성에 관한 연구시론-근대일본의 에피스테메로서의 국체」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광검 2018-05-26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줄이기 전 원본.
 
유대 국가 - 유대인 문제의 현대적 해결 시도 b판고전 4
테오도르 헤르츨 지음, 이신철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주도 어김없이 팔레스타인에서 3명이 사망했다. 이스라엘이 나크바(아랍어로 '대재앙'이라는 뜻으로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팔레스타인 70여만 명이 추방된 사건, 혹은 그 사건이 발생한 5월 15일을 가리킨다 -기자 주) 70주년을 맞아 가자지구 국경 인근으로 행진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총격을 가했다는 뉴스다. 

기사에 따르면 일명 '위대한 귀환' 행진이라 불리는 이 시위가 시작된 3월 30일부터 지금까지 44명이 사망하고, 50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자이드 라드 알 후세인 유엔인권최고대표는 "한번, 두 번도 아니고 계속해서 이스라엘군이 시위 진압에 실탄을 사용하는 것은 물리력 남용"이라고 비판했지만, 이스라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실탄과 최루탄을 사용했다(4월 28일 <연합뉴스>, 가자지구 유혈 확산...이스라엘, 팔 시위대에 또 총격 3명 사망).

이런 뉴스를 볼 때면 '과연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우려고 했던 국가가 이런 모습이었을까?' 하는 회한 섞인 의문이 든다. 유대인을 위한 국가를 건설한다는 명목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땅을 뺏고, 분리장벽을 세워 가두고, 저항하는 이들은 총으로 쏴서 죽이는 나라가 정말 그들이 그토록 염원했던 국가의 모습이었을까.

그런 의문의 답을 찾기 위해 '정치적 시오니즘(고대 유대인들이 고국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 유대민족주의 운동 - 기자 주)의 창시자'라 불리는 테오도르 헤르츨의 <유대 국가>를 읽었다.

7시간 노동, 모든 인간의 복지 증진... 유토피아로서의 유대 국가

 <유대 국가> 표지.
  <유대 국가> 표지.
ⓒ 도서출판b

관련사진보기


테오도르 헤르츨은 1897년 1차 시온주의자 회의를 조직하고, 시온주의자 세계기구 의장으로 팔레스타인에 땅을 구입하기 위한 유대인 은행과 기금을 설립하는 등 시온주의 운동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이스라엘 초대 수상인 다비드 벤구리온 등은 이스라엘 독립선언서에서 테오도르 헤르츨을 "유대 국가의 영적인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테오도르 헤르츨이 처음 '유대국가'를 세워야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드레퓌스 사건이었다. 유대인 포병대위 드레퓌스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증거도 없이 프랑스군 정보를 독일에 누출한 스파이로 몰리고, 프랑스사회가 반유대주의 광풍에 휩싸인 모습을 본 그는 유대인이 유럽사회에 동화해서 살아가는 일은 불가능하고, 유대인만의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었다. 

<유대 국가>는 테오도르 헤르츨이 이런 자신의 구상을 구체화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유대인의 고난과 유대인 문제의 단적인 현실, 유대인 해방의 사회적·정치적 기만성, 영토와 주권을 지닌 독립적인 유대 국가 창설의 당위성과 현실성, 유대 국가 창설을 위한 대내외적인 과제들과 그 기관으로서의 유대인 협회와 유대인 회사 및 지역 집단들의 역할과 기능, 나아가 일이 진행되어 나가야 할 순서와 절차 등등"(146쪽)을 다루고 있다.

그는 <유대 국가>에서 유대 국가를 세워야 할 필요성보다도 실제 유대 국가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기구와 그들의 역할, 자신이 그리는 유대 국가의 모습 등을 설명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유대 국가>에서 오늘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저지르는 참상을 읽기는 어렵다. 김항 연세대학교 교수는 "실제로 <유대국가>를 읽어보면 애초에 정치적 시오니즘의 구상은 '사회민주주의'와 '국제주의'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그 어떤 반유럽, 반아랍의 주장은 찾아볼 수 없고, 새로이 건설된 이스라엘 국가가 1일 7시간 노동을 보장하는 급진적 사민주의를 국시로 삼음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라며 오늘날의 '막가파 시오니즘'과 구분한다. (2013년 2월 1일 <경향신문>, [명저 새로 읽기]테오도르 헤르츨 <유대국가>

사실 테오도르 헤르츨이 그리는 '유대 국가'는 유토피아의 느낌마저 풍긴다. 테오도르 헤르츨은 "나는 무엇보다도 우선 내 구상을 유토피아로서 취급하는 것에 반대하여 그것을 변호해야만 한다"(10쪽)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유대 국가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또한 현대적인 모든 교육수단들을 갖춘 아이들을 위한 쾌적하고 밝으며 건강한 학교들이 존재할 것이다. 나아가 좀 더 고차원적인 목적들을 향해 상승하는 방식으로 단순한 직인들로 하여금 기술적인 지식들을 획득하고 기계류에 친숙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직인 재교육 학교들이 거기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민중의 오락을 위한 건물들을 세워질 것인데, 그곳에서의 윤리적 행동에 대해서는 유대인 협회가 위로부터 지도할 것이다."-<유대국가> 59쪽



그가 강조하는 7시간 노동에서도 유토피아의 느낌이 풍긴다. 테오도르 헤르츨은 "우리는 하루 7시간 노동을 바로 자유롭게 몰려들어야 할 세계 모든 지역의 우리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필요로 한다"며 "우리나라는 실제로 약속의 땅이 되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62쪽). 그에게 7시간 노동은 곧 '약속의 땅'의 징표인 셈이다. 테오도르 헤르츨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국기에 "우리의 황금빛처럼 뛰어난 7시간 노동일"(123쪽)을 상징하는 일곱 개의 황금빛 별들을 넣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유대인 외의 다른 민족을 차별하자는 이야기도 찾기 힘들다. 오히려 테오도르 헤르츨은 공존을 이야기한다. 

"모든 사람은 그들의 국적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신앙고백이나 그들의 불신앙에서 자유로울 것이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다른 신앙과 다른 국적을 지닌 사람들도 우리들 사이에 함께 거주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명예로운 보호와 법적인 평등을 보장하게 될 것이다." - <유대 국가> 121쪽

  
테오도르 헤르츨은 그리하여 '유대 국가' 건설이 단지 유대인들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세계는 우리의 자유를 통해 자유롭게 되고, 우리의 부를 통해 부유해지며, 우리의 위대함을 통해 위대해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거기서 오직 우리 자신의 번영을 위해 시도하는 모든 것은 강력하고도 행복하게 하는 방식으로 모든 인간의 복지를 위해 작용할 것이다." - <유대국가> 135쪽


아시아=야만... '국제주의'가 아닌 '제국주의'

테오도르 헤르츨의 <유대 국가>에서 반아랍의 혐의를 찾기 힘들다. 그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모조리 쫓아내거나, 학살하거나, '유대 국가' 안에 남은 그들을 차별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말 그것으로 충분한가? 그는 김항 교수의 평가처럼 '국제주의'를 말하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테오도르 헤르츨은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을 지배하던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이 팔레스타인을 유대인에게 제공할 경우 "우리는 거기서 아시아에 대항한 장벽의 한 부분을 형성할 것이며, 야만에 대항한 문화의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할 것"(49쪽)이라고 말한다. 제국주의자들이 할 법한 아시아=야만, 유럽(테오도르 헤르츨의 경우에는 유럽+유대인)=문화라는 도식을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국제주의'보다는 '제국주의'에 가까운 언사지만, 그래도 아랍인을 몰아내자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일단 넘어간다고 치자. 그래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테오도르 헤르츨은 '유대 국가'를 세울 땅의 주민들과 어떻게 공존할지에 대해 거의 아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단편적인 서술에 근거해 추측하건대 테오도르 헤르츨은 기본적으로 원주민을 설득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팔레스타인 외에 후보로 거론된 아르헨티나에 대해 "아르헨티나 공화국은 우리에게 영토의 한 부분을 양도하는 데서 아주 큰 이익을 얻게 될 것"(48쪽)이라고 말하거나 팔레스타인에 대해 "터키의 재정을 자청해서 완전히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다"(49쪽)라고 말하는 대목을 보면 그런 추측이 가능하다.

그런데 원주민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다른 신앙과 다른 국적을 지닌 사람들도 우리들 사이에 함께 거주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명예로운 보호와 법적인 평등을 보장하게 될 것이다"라는 문장 외에 다른 내용이 없다. 

어쩌면 그 이유는 애초에 공존에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앞서 말한 문장을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자. 굳이 "거주하게 된다면"이란 가정법을 사용한 이유는 뭐였을까. 테오도르 헤르츨은 본디 "다른 신앙과 다른 국적을 지닌 사람들"이 없거나 설령 있다 해도 예외적인 존재, 소수자로서만 존재하는 유대 국가를 구상했던 게 아닐까? 앞의 "어쩔 수 없이"라는 표현을 보면 그런 의심이 더욱 커진다.

그렇다면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영토를 유대인에게 제공하고, 자신들은 다른 지역에서 사는 방식을 고려했다는 이야기일 텐데 재정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한들 과연 원주민들이 그런 방식에 쉽게 찬성할 수 있을까? 자연스레 이런 의문이 떠오르지만, 테오도르 헤르츨은 원주민들을 설득하지 못할 경우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유대인협회, 유대인회사, 지역집단 등의 유대 국가 건국에 필요한 기구와 이주 후 어떤 사회를 건설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총 6장 중 3장을 할애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데 비하면 내용이 빈약하다는 평가를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테오도르 헤르츨이 이야기한 공존은 공허하게 들린다. 테오도르 헤르츨이 이상으로 그리는 '유대 국가'가 성공할수록 세계 각지에서 더 많은 유대인이 '유대 국가'로 이주해오고, 그에 따라 원주민과 여러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점, 이스라엘 건국 이전 소수의 유대인만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 때도 이미 분쟁이 있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테오도르 헤르츨은 '유대 국가'가 세워질 땅에 살던 원주민과의 공존을 별로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사유의 빈틈에서 자라난 '막가파 시오니즘'

사실 드레퓌스 사건 당시 프랑스 사회를 뒤덮고 있던 반유대주의 광풍을 떠올리면 테오도르 헤르츨을 이해할 만한 여지는 있다. 당시 일부 언론의 반유대주의 선동은 실로 맹목적이었다. "기독교인이든 유대인이든 둘 중 하나가 프랑스를 떠나야 한다"는 기사가 빈번하게 실렸고, "본지는 반유대 신문입니다"란 구호가 매일 실리는가 하면 심지어는 제목을 <반유대>로 지은 신문까지 있었다. 

이런 광경을 목격한 테오도르 헤르츨이 유대 국가 건설을 대단히 절박하고 시급한 과제로 실감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그 시급한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유대 국가'가 세워질 땅에 살던 원주민과의 공존을 별로 깊게 고민하지 못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테오도르 헤르츨에게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그의 '유대 국가' 구상에는 애초에 빈 틈, 즉 팔레스타인 사람들과의 공존에 대한 사유 부족이 있었고, '막가파' 시오니즘이 끝내 그 빈 틈을 채우고 말았다는 점에서 그도 오늘날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참상에 분명 책임이 있다. 테오도르 헤르츨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막가파 시오니즘'과 나크바(대재앙)의 싹은 이미 <유대 국가>에서부터 자라고 있던 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본회의의 정체 - 아베 신조의 군국주의의 꿈, 그 중심에 일본회의가 있다!
아오키 오사무 지음, 이민연 옮김 / 율리시즈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회의'는 오늘날 일본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이름 중 하나다. 아베 내각 각료 19명 중 아베 총리를 비롯해 무려 15명이 속한 단체(2014년 내각 기준)이자 "일본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여겨지는 정치조직"(오스트레일리아 ABC TV), "아베 내각을 좌지우지하면서 역사관을 공유한다"(미국 CNN TV)는 평가를 받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사회의 가장 큰 이슈인 모리토모 학원 스캔들(아베 내각이 모리토모 학원에 국유지를 원 감정가의 15% 수준에 매각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공문서를 조작한 사건-기자 주)에서도 일본회의가 등장한다. 

스캔들 당사자인 아베 총리, 모리토모 학원 전 이사장이자 가고이케 야스노리, 아소 다로 재무장관이 모두 일본회의 소속인 데다가 재무부가 국회에 결재문서를 제출하면서 내부문서에 있던 "모리토모 학원 이사장은 일본회의 회원"란 내용을 삭제한 사실까지 드러났다.

이렇듯 일본사회에 큰 파문을 던지고 있는 일본회의는 어떤 조직일까. 누가 만들었고, 무엇을 지향할까. <일본회의의 정체>(아오키 오사무 지음)과 <일본 우익 설계자들>(스가노 다모쓰 지음)는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일본회의의 실체를 파헤친 책이다.

일본회의의 뿌리는 '생장의 집'

일본회의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종교다. <일본 우익 설계자들>은 "일본회의의 활동과 동원을 지적할 때,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언급되는 것이 종교단체와의 관계"(31쪽)라며 일본회의에 대해 '종교 우익'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일본회의의 정체>도 "일본회의는 '종교 우파단체'에 가까운 정치집단"(149쪽)이라고 지적한다.


일본회의에는 신도계, 불교계, 기독교계 등 다양한 종파에 걸친 여러 종교단체가 참여하고 있는 데다가 임원 62명 중 24명이 종교관계자로 채워져 있을 만큼 종교색이 강하다.

특히 신흥종교단체 '생장의 집'은 일본회의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들의 관계는 196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른바 전공투(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 1960년대 후반 일본 각 대학의 학생자치회연합조직이나 학생이 공동투쟁한 조직-기자 주)의 기초가 정비되고, 좌익 학생들이 캠퍼스를 뒤덮고 있던 1966년, 나가사키 대학에서 우파학생 모임인 유지회가 자치회 선거에서 승리하는 이변을 일으켰다.

유지회는 이후 나가사키 대학 학생협의회를 거쳐 우파학생의 전국조직인 전국학협(전국학생자치체연락협의회), 전국학협의 OB 조직인 일본청년협의회로 이어지는데 일본청년협의회가 실질적인 일본회의 사무국 역할을 하고 있다. 유지회-전국학협-일본청년협의회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을 중심에서 이끈 사람들이 바로 일본청년협의회 회장이자 일본회의 사무총장인 가바시마 유조를 위시한 생장의 집 계열 인물이다.

스즈키 구니오, 이토 구니노리 등 우익활동가들도 일본회의와 생장의 집에 대해 각각 "일본회의의 큰 뿌리는 생장의 집"(<일본회의의 정체> 77쪽), "뿌리랄까, 근원은 분명 같다고 생각한다"(<일본회의의 정체> 114쪽)고 증언하고 있다.

생장의 집은 1983년 정치와의 단절을 선언해 현재는 일본회의 활동과 무관하고, 2016년 아베 내각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정한 적도 있지만, 생장의 집 출신인 가바시마 유조 등은 오랫동안 일본회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이들은 생장의 집 창시자인 다니구치 마사하루를 추종하고 있는데 다니구치 마사하루는 1930년 생장의 집을 만들고, 2차 세계 대전 당시 전투기와 본부 도장을 군에 헌납하는 등 전쟁 수행을 찬양하면서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종교학자 데라다 요시로는 그에 대해 "철저한 반공 애국주의자로서, 천황으로 집약되는 일본문화의 우위성, 그리고 대동아전쟁의 의의를 찬양하는 발언을 반복해왔다. 또한 가정의 가치관을 비롯해 일본의 전통질서, 야마토 정신으로 정형화한 일본적인 것을 찬양하며, 일본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고무하는 주장을 해왔다"고 평가하고 있다.

다니구치 마사하루가 1940년 기관지 <생장의 집> 9월호에서 펼친 천황찬양론은 그의 사상을 보여준다.

"천황으로 향하는 길이야말로 충이라. 충은 천황에게서 흘러나와 천황으로 돌아간다. 천황을 우러르고, 천황에게 귀일하여 나를 버리는 것이 '충'이라. 모든 종교는 천황에게서 시작된다. 대일여래도, 예수 그리스도도 천황에게서 시작되었다. 이는 하나의 태양에게서 일곱 색 무지개가 생기는 것과 같다. 각 종교의 본존만을 예배하고, 천황을 예배하지 않는 것은 무지개만을 예배하고, 태양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모든 종교의 시조는 나팔에 불과하니, 우주의 대교조는 천황뿐이라."

몇 문장만으로도 다니구치 마사하루, 그리고 다니구치 마사하루를 추종하는 '생장의 집 원리주의자들'이 상당히 반동적이고, 위험한 사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도', 동원력과 자금력으로 국회의원 당선 좌지우지

일본회의를 이론적, 실무적으로 이끌어온 종교집단이 생장의 집이라면 일본의 고유종교인 신도는 동원력과 자금력을 맡고 있다.

신사본청은 일본 전국에 있는 신사 8만여 개를 대부분 총괄하고 있고, 신관의 15~20% 정도가 일본회의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모로오카쿠마노 신사의 신관인 이시카와 마사토는 "신사본청이 마음먹으면 1만이나 2만 명 정도는 쉽게 동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진술한다.

신사는 엄청난 자금도 보유하고 있다. 신사마다 저마다 사정이 다르지만, '일본 최고의 종교법인' 메이지 신궁의 경우 경내만 해도 수조 엔 단위로 추정되고, 메이지 신궁의 자회사가 프로야구 야쿠르트 스왈로스 본거지, 신궁 구장, 메이지 기념관을 소유, 운영하고 있다. 

경제지 <주간 다이아몬드> 보도에 따르면 메이지 기념관 그룹 자회사의 연간매출액만 약 110억 엔에 달한다. 메이신신궁은 이 밖에도 테니스클럽, 아이스 스케이트장, 골프 연습장 등을 보유하고 있다. 메이지 신궁 정도는 아니라도 도심에 대규모 경내를 보유한 유명신사는 상당한 자금력을 가지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신사본청이 결성한 신도정치연맹(신정련)에 가입한 국회의원 수를 보면 신도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짐작할 수 있다. 신정련 국회의원간담회 회원 총수가 304명(중의원 223명, 참의원 81명)으로 일본회의 국회의원간담회 회원총수 281여 명(2015년 9월 기준)보다 많다. <일본회의의 정체>는 "(아베) 정권 자체가 신정련과 일체화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125쪽)이라고까지 지적하고 있다.

신도는 그 막강한 영향력을 선거에서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이시카와 마사토 신관은 "이번(2016년) 참의원 선거와 지난 참의원 선거에서 신정련이 정한 후보가 모두 장관이 되는 등 큰 성과가 있었다. 대부분은 역시 일본회의와 신사계 힘이었다고 생각한다"며 "이번 선거에서도 신정련이 정한 후보가 상당한 득표수로 당선될 것이 틀림없다"고 말한다.

신도는 그 외에도 여러모로 일본회의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개헌 운동이다. 여러 신사가 2016년 1월 일본회의가 주도하는 '아름다운 일본이 헌법을 만드는 국민 모임' 포스터를 붙이고, 신사 경내에서 헌법개정 찬성 서명 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신사본청의 기관지 역할을 하는 <신사신보>는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신사계 중에는 왜 신관이 헌법개정을 위한 서명 활동까지 해야 하는지 아직도 의문시하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 만약 신관이 신사를 지키는 데에만 힘쓰고 나라의 근본을 바로잡는 활동에 종사하지 않는다면 이 나라는 대체 어떻게 되겠는가?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우리 자신의 열의와 활동 노력으로 헌법개정을 반드시 실현해야 한다."

국민주권, 제정분리 부정..."일본회의는 악성 바이러스"

<일본회의의 정체>와 <일본 우익 설계자들>은 바라본 일본회의는 조금 다르다. <일본회의의 정체>는 일본회의가 아베 내각과 공명하고 있긴 해도 아베 내각을 좌지우지하지는 않고, 일본회의의 문제가 단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일본사회 전체의 문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일본 극우 설계자들>은 일본회의가 일본정책연구센터, '다니구치 마사하루 선생을 배우는 모임'과 함께 아베 내각을 좌지우지하고 있고, 이는 일본사회 전체의 우경화가 아니라 '한 무리의 사람들'의 문제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둘 다 일본회의라는 집단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위험한 조직이라는 점에는 동의하고 있다.

<일본회의의 정체>는 종교에 기반을 둔 일본회의의 활동에 대해 '컬트성'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일반인의 감각으로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종교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믿는 바를 향해 직진해왔고, 덕분에 끈기 있는 활동으로 일본회의라는 조직을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운동의 저변에는 뿌리 뽑기 힘든 컬트성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일본 우익 설계자들>에서도 '컬트'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한때 일본청년협의회 산하 학생조직 '전일본학생문화회의'에 가담했던 하야세 요시히코는 "나는 지금도 보수고, 좌익이 정말 싫지만, 그 이상으로 일본회의 무리가 싫다"고 비판한다.

그는 합숙에서 참가했더니 '항상 천황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생각하면서 생활하라'라는 이야기만 들은 기억, 그곳 사람들에게 뭔가를 물을 때마다 '비밀이지만', '이것은 안으로 들어온 사람에게만 가르쳐주는 건데' 같은 이야기를 들어왔던 경험을 털어놓으며 그들을 '컬트'로 규정한다.

"정말 컬트다, 그자들은. 다니구치 마사하루의 이름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등장한다. 그러나 '비밀이야'라든지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 돼'라고 입막음한다. 숨기고 있는 것이다."-<일본 우익 설계자들> 141쪽

행태뿐만 아니라 그들이 표방하는 이념도 위험하기 짝이 없다. 앞서 언급한 일본청년협의회 회장이자 일본회의 사무총장인 가바시마 유조는 일본청년협의회 기관지 <조국과 청년>에서 정교분리, 국민주권 등 근대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원칙을 부정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다.

"오늘날의 일본은 제정일치라는 국가철학을 정교분리 사상에 따라 부정하는 풍조가 있다. 유럽의 권력정치와 종교전쟁에서 비롯된 타협의 산물인 정교분리 사상을 토대로, 제정일치 국가철학을 부정하는 것은 (중략) 실로 역사를 모독하는 어리석은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천황이 국민에게 정치를 위임하는 시스템에서 주권은 어느 쪽에 있는가, 이에 관해 서양적인 양자택일론을 그대로 도입하면 일본의 정치 시스템은 해체된다. 현행 헌법의 국민주권 사상은 이 점에서 부정되어야 한다."

그래서 일본회의는 단순한 보수 세력이 아니라 "전후 일본 민주주의 체제를 사멸의 길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악성 바이러스"(<일본회의의 정체> 235쪽)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회의에 맞선 싸움은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 나아가 근대 민주주의 체제 자체를 지키기 위한 피할 수 없는 투쟁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