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1) 다 이고 있을 순 없어서 책들을 처리할 때 내 첫 기준점은 저자 사인이나 준 사람이 적은 글이 있는가, 이다. ‘글방문고<님의 침묵>이라는 몇 사람 손을 탄, 중고서점에서 구입한 듯한 낡고 조그만 책을 버리려고 보니, 작게 영어로 적힌 친구 이름이 있었다. 필체도 내가 기억하는 필체여서 갖고 있기로 했다.

 

그 친구는, 자기 자신 외의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 없다더니 함께 로버트 레드포드가 나오는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저런 사람이면 늙어도 괜찮으니 결혼하고 싶다 했는데, 독신이다(라고 추정한다). 작년에 세상 꼴을 보고 자해의 욕구가 도져 머리를 (부분) 밀고, 병원에 가서 엄지발톱을 뽑았다. 그렇다고 해서 뭐 아직까지 귀를 자르고 싶은 적은 없다. 

며칠 뒤 버스를 타고 지나는데 그 친구(로 추정되는 이)가 길 건너 분식집으로 동행과 함께 들어가고 있었다. 내려서 바닥에라도 엎어지고 그 자리서 생을 마감하기라도 했어야 했으리라. 여행을 함께 다니고 책을 나눠 읽고, 나와 달리 일찍부터 도시에서 생활해서 어릴 땐 서로 전혀 만난 적도 없지만, 동향인이고 그리 친한 사이였으니.


어깨 부분에서 예전과 다르다는 게 느껴졌을 뿐 아직(?) 젊었다. 여전히 분식집 음식을 좋아하는 것도 미소를 띄게 한다. 너거 집에 가면 밥 주나, 라면서 내 자취방 깻잎 절임과 김치만으로도 최고라며 맛있게 먹고, 웬만한 식당 음식은 다 맛있제 맛있제, 라며 감탄하고, 주인집 할배는 친구가 왔으니 물 값 전기값 더 내라며 책정해서 내밀곤 했는데, 추억의 친구를 보고도 나는 내리지 않았다. 이유는 길어서 생략하고, 이 책 뒷부분 작품해설에서님만 님이 아니라 그리는 것은 다 님이다. 를 적겠다. 이것은 한용운이 그의 시집에서 쓴 해설 구절인데 <군말>에서 밝힌 것이라 한다

단지 옛날로 남아 있어야 그리는 것이다.

첫 모습이 갈래머리 였던 친구여, 친절하고도 순리적이며 냉혹하기까지 한 시간은 우리를 멀리 떨어뜨리고 자립까지 시킨 것이로구나.

 

인연2) 20129월 동네 작은 책방에서 도올 김용옥 책을 후루룩 넘겨보게 됐는데 넘겨서 딱 멈춘 페이지에, 죽을 땐 누구나 불행하게 죽는다는 취지의 문장이 있었다. 마음에 딱 꽂혀서 계속 그 문장을 정확히 기억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잊어버렸다. 도올 김용옥은 노인인가 젊은인가. 예전의 노인 같은 젊은이 느낌은 의복 때문인 것 같고, 요즘의 젊은이 같은 노인 느낌은, 아직도 내가 낸데하면서 전 지구적 탐구 정신을 놓지 않고 현역으로 소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우리의 마음에 따라

적으로도 되고 친구로도 됩니다.

언어와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는

한 민족을 어찌 일본이나 미국보다

더 대적시한단 말입니까?(김용옥,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문예출판사 1, 7)를 20249월에 쓰고, 그 다음 달인 10월에 책으로 냈다. 한용운에 대한 한용운을 기억하는 한용운을 부르는 이 책은 관련한 역사와 문학, 동서양인, 과거와 현재를 폭넓게 오간다. 도올 방식으로, 온갖 것을 방대하게 두루 섭렵한 사람이 쓸 수 있는 글, 뭐든지 그 의미와 내력을 알려주고자 하는 마음이 모인 책이다. 만해 한용운은 법명이 용운, 법호는 만해, 계명은 봉완, 속명은 유천이다

 

혁명가 고 한유천, 용운 스님은 <최후의 5분간>이라는 수필과 <흑풍> 등등의 소설, <님의 침묵>시집을 낸 문인, 한문 불교 경전을 번역한 번역가, 불교 잡지 발행인이었다. 1937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김동삼이 경성감옥에서 사망했는데, 일제의 감시가 심해 아무도 나서지 않는데 심우장에 모셔와 대성통곡 하며 장례를 치러 주었다고 한다(시에 대해 논할 생각이었는데 또 죽음, 장례 이런 쪽으로 글이 빠지고 있구나)

1911년 만주에서 얼굴에 총알이 스쳐 후유증으로 체머리를 앓았으며 해방을 못 보고, 남북이 갈라지는 것도 안 보고, 중풍을 앓다가 1944629일 심우장에서 입적했다. 이 책에서 1945년에 대해 쓴 1216쪽에는 일제강점기 종료, 미 군정기 시작이 있는데 도올 김용옥의 문장이다.

 

천규석 선생이 떠나서 마음이 휑한데 여러 사건들이 터지고, 더구나 캄보디아 사태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지나는데, 주택형 돌봄시설에서 우렁차게 흘러나오는 노래 소리가 있었으니 닐리리 맘보였다. 이 노래는 흥겹게 방방 뛰는 노래지만 님 계신 곳을 알아야 고무신 우산 보내지하는 죽은 사람을 향해 부르는 실은 슬픈 노래다. 나는 계속 슬픔에 경도되어 대륙 간 탄도 미사일글자를 던지고, 그 점괘를 적는다.

 

1 더하기 11이고, ‘우리에서 우리는 한 명이다.

우리’ ‘’ ‘우리이며 나의 소원, 내 소원,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맞는다1 더하기 12이고, ‘우리에서 우리는 두 명이나 그 이상이니 두 국가론도 맞는다. 통일은 필요 없고 소원이 건물주라면 그 또한 자유이고,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쏘는 것도 자유이다.

-

- 셈부르크

- 자니아

- 미니카 공화국

-

- 우디 아라비아

-

 

에서 나라이름이 빈다. 다시 던지면

/- 칸보디아, 캄보디아

베트남 국경에서 죽은 채 발견된 젊은 여성의 명복을 빈다.

밝고 환하게 드러나는, 음습하지 않은 정겨운 통일운동을 지향하고, 생존을 위해서라도 통일을 원하든, 원치 아니하든 통일을 원하자.

 (feat.국악밴드 우리음_탑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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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첼란.

그는 결국 1970년 나이 50에 센 강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가 남긴 시는 전 세계로 번역되어 비껴간 인연의 모르는 사람들이 인연으로 읽고 방을 서성이며 그의 절규를 (기쁘게) 음미한다.

목 넘김이 거친 유골함에서 나온 모래섞인 맥주 같은 그대의 시여! 날은 어둡고 몸은 쇠한데 쉬이 넘어갈 날 언제려는가. 타는 몸, 날아오르는 연기, 사라진 고통 어둠 속 소멸된 몸, 생생하여 울부짖는 시인이여 망각하라, 타인에게 넘기라. 공중으로 흩어진 희뿌연 그대 부모 몸! 남지 않은 몸, 남은 넋이여, 안식 있으라.

 

1962년 전혜린은 파울 세엘란의 시 중 <죽음의 둔주곡>을 번역하여 국내에 최초로 소개했다. 파울 세엘란으로 시작한 그 이름은 파울 체란, 파울 첼란, 파울 셀란, P.첼란이다가 지금은 파울 첼란으로 굳혀졌다.

여러 출판사에서 여러 독문학자들에 의해 15회 이상 파울 첼란의 시는 번역되고 거의 절판되었으나(전영애와 허수경의 번역판은 판매 중_시인 같은 번역가, 번역가 시인), 제목은 모두 <죽음의 둔주곡>이거나 같은 뜻인 <죽음의 푸가>.

 

버릴 책이 없도록 심혈을 쏟는 전영애는 <죽음의 푸가-파울첼란 시선>2011년 민음사에서, 언젠가 들러봐야 할 먼 곳에 묻힌 시인 허수경은 <파울 첼란 전집> 5권을 2020년 문학동네에서 냈다

두 책 다 (내가 싫어하는)띠지가 있고, 민음사는 책갈피 줄이 없고 문학동네는 매달았다. 전영애는 직역, 허수경은 의역으로 번역했다.

일례로 <풍경>이라는 같은 제목으로 번역한 세 줄짜리 시를 보면,

너희 키 큰 포퓰러-이 땅의 사람들!(전영애)

그대 높은 포퓰러들이여-이 땅의 인류여!(허수경)

이 구절로 포퓰러 밑에 스러진 사람들이 느껴지고, 이들의 번역에서 동물의 생명권을 환기시키기 위해 마리대신 으로 부르거나 으로 세는 엠지세대 감각이 느껴지는데, 나무도 '그루' 대신 '명' '분'은 가능하다.


이들의 번역은 순혈 직역과 순혈 의역이라 칭할 수도 있는데, 나 같은 독자 입장으로선 이렇게 한 쪽으로 제대로 쏠린 방법론의 번역이 (두 권을 같이 보기만 한다면, 다 살 수만 있다면) 가장 좋다. 복수의 번역가들은 암묵적으로 짐을 나누고 이 점을 참고해주면 고맙겠다.

라떼야 아무리 조악한 번역이라도 감지덕지 읽었고, 심지어 두세 명의 노고가 느껴지는 번역판도 소중히 간직했다. 직역의역 논쟁이 있지만 직역보단 의역이 아무래도 읽기엔 편하다. 그러면서도, 멋모를 땐 그냥 읽었소만 임의로 갖다 붙인 번역자 당신의 문장 말고, 그래서 원저자는 정확히 뭐라고 썼습니까, 라며 따져들고 싶을 때도 있다골머리를 앓으며 한 단어 한 단어 선택을 위한 고심과 들인 시간과 노오력은 오간데 없어지는 것이다.


어차피 어쩔 수 없는 공통저자일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내 생각대로만 번역했다고 점점 대놓고 주장하는 경향이 요즘 늘고 있는데 그런 역자는 (나에게) 신뢰가 깎인다. 독자란 최대한 원문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문장이 매끄럽게 이어지도록 번역해주길 바라는 (불가능한) 주문을 하는 사람들이므로.

 

현 우크레인 영토인 루마니아 에서 태어나고, 가정 내부의 독일어 선택적 언어 상황과 2차대전이라는 복잡한 시대상황, 부모가 나치에 의해 유태인 집단 수용소에서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자신은 도망쳐, 최종 파리에 정착해 화가와 결혼하고 아들 낳고 살았으나, 이 나라 저 나라 욂겨 댕겼으니’ (게다가 육체노동 없는 정신노동으로만 전량 소진되었음이니) 어느 순간 정신 줄 놓고 쫒기는 망상에 시달린 게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본명인 안첼을 거꾸로 하여 첼란으로 시를 발표한 그는 시 제목은 참으로 명확하여 나의 심장으로 파고들어온다 마는 내용은 눈 감고 만져서 이름 맞추기 게임의 검은 통에 든, 아리송한 모르는 물체와도 같다. 생각 날 듯 날 듯 모르겠는 것.

 

그는 나무의 가지를 치고 열매를 솎고 도끼로 나무를 패고 풀을 뽑고 허수아비를 만들고 새참을 먹고 원두막에서 한숨 자고 하늘의 흘러가는 구름으로 날씨와 대기상태를 점치고 밤에 호박나이트에 잠시 들러 춤을 추고 집으로 와서 자녀에게 책을 읽어주고 교훈적 발언을 하고 다음날 먹을 야채를 다듬어놓고 속히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독자는 잔혹한 사람들. 저렇게 고통으로 점철된 이의 글이 읽고 싶어 대기하는 사람들. 죽은 뒤 전문가의 안내를 따라 독자 개별로 이루어지는 심리부검. 가련한 생이여, 푸성귀를 뜯으며 생명의 신비를 음미할 자신의 텃밭도 맘대로 들어가도 무방할 친한 남의 논도 없구나.


허수경은 독일에서 암으로 죽고 그곳에 묻혔지만 살 집이 없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다는 시를 남긴바 있다. 그게 가슴을 친다. 책값은 너무 싸고, 번역가의 수고비도 너무 낮다. 책값을 2.5배 올리고, 책을 더 소중히 간직하고 출판사도 사려 깊게 출판하고, 정부는 절판된 책들이 빛을 보도록 지원이 있길 바란다. 이 시집들 강추하는 이유는 읽을 수록 느낌 오므로.

죽은 파울 첼란, 헤린, 수경. 이제 우리 마음 속 집에서 살길.

(feat.김창완_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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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소음이다. 그러나 그러한 소음보다도 더욱 무서운 것이 있다. 바로 정적이다.(릴케, 박환덕 옮김,말테의 수기문예출판사, 11)

 

누구한테 불평을 해요? 들어줄 사람도 없어요.”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나무를 깎아 알록달록 칠하고 덧대어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인 트럭들이 달린다. 그들 중 하나인 아나톨라도 아름답고 화려하게 치장한 자기 소유의 1966년산 트럭에 바나나를 실었다

주어진 지형에 따라 암석에 구멍을 파고 그 안에서 살거나, 자그마하게 예쁜 흙집을 지어 사는 이 나라는 무기 허용의 나라, 평화는 없다. 길에 강도들이 숨어 있다가 밤에 나타난다. 덕분에(?) 경비업체는 활황이다. 아나톨라가 국경에 다다르자 경비대는 벌금을 거둔다. 이유는 없다. “탈레반은 도둑이에요. 주머니 채울 생각만 하죠.”

 

트럭이 달려오면 비켜야 하지만, 아직 말과 나귀를 몰고 다니는 근본적이고 생태적이며 지속가능한 지혜로운 풍습이 잔존하는 나라(나는 북한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게 소로 쟁기 끌어 농사짓는 풍경인데, 이것은 낙후가 아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길이요, 생태복원의 시작점이다.

대한민국도 탱자탱자 놀고먹는 육우들의 코를 코뚜레로 꿰어 밭에 투입하고, 두 마리를 엮어 마차를 매달고 시속 20키로 이하로 경부고속도로를 달리게 하라. 도로 곳곳에 싸는 똥을 모아 퇴비로 쓰고, 말려서 땔감으로 활용하거나 물에 풀어서 종이로 만들도록 정책하라. 북한이 트렉터로 교체만 않는다면 생태 관광만으로도 충분히 잘 살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도로로 나온 트렉터를 보는 것은 때때로 얼마나 끔찍한가. 계엄 시 몰고나온 탱크 대용 트렉터. 마달이 잘게다가 건초를 넣어 에깨 울러미고 산타처럼 나타나라! 제 작년 내가 기후변화 관련한 집회에 가보니, 뜻은 있고 방법은 없단 걸 느꼈다. 반고흐 그림에 본드로 손을 붙여봤자 액자 갈면 그만이다. 정부관청 벽에 온갖 것을 갖다 붙이고 칠 한다고 그 안에 든 () 사람들과 기업들이 눈이나 깜짝 하겠는가.

외주 업체 인부들이 그 벽을 어떻게 지울지 생각해보라. 팔이 빠지지 않겠나? 이후 나는 안방연구소 설립을 절감했다. 오늘은 월차를 내고 하루 쉬는데, 눈 뜨자마자 천장을 보며 도는지 안 도는지 이석증 체크를 하고 컴을 켰다. 밖에 게 아무도 없느냐. 말을 준비하라. 내 오늘은 잠옷 바람으로 자판만 뚜들기고 있을 게 아이고 아이고! 곡하고 있을 때가 아이고 궁궐에 들어가 왕을 알현하고 돈키호테 후예로서의 책무를 다하려 한다. 이럴 때일수록 서로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하자는 승부수를 던지고 오겠다.

공주님을 포기할 터이니 AI육성할 자금으로 관련 기업 주식을 산 젊은이들에게 보전해주고, 나머지는 몽땅 아프가니스탄 산악지대 헐벗은 사람들에게 주라고 하겠다. 교육부에도 들러 서울대 10개 만들기로는 왠지 부족한 게 아니냐, ‘전 대학명칭의 서울대화를 명하겠노라.

초등학교는 각 학생당 한 명의 교사가 옆에 앉아 학업을 돕도록 하는는는는는는 시스템을 만들고고고고고, 말을 더듬게 되는구나, 분하고 흥분하면 꼭 이러는 구나전국의 학원과 무직자로 인원을 충당하고, 평등하게 학생도 교사도 수업이 끝나기 전까지는 휴대전화를 끄고 바람직한 전자기기 사용법과 에티켓을 가르치고, 그렇게 11로 기초교육을 똑소리 나게 시키면 고등학교는 폐지해도 무방하다.

장관 앞에서 이렇게 설파하면 나에게 티슈를 뽑아주면서 게라웃 어브 히어 나가라고 하면, 나는 세계 각국에서 익힌 글로벌 비즈니스 매너를 발휘하여 스미마생 노 쌩큐, 이래면서 눈물을 잠옷 소매에 닦고 다시 보송해지를 기다리며 물을 한 잔 청하여 마시고, 걷어 올린 잠옷 바지를 내리고 품위 있게 그 방을 나와, 스콧 니어링처럼 주머니에서 사과를 꺼내 한 입 먹고 양심껏 나머지를 말에게 건네겠다).

 

토요일 같은 일요일. 오늘은 밥상 차림 대신 정신 차림으로 허기를 달랜다.

묵시. 묵시록은 종교적 중립을 표방하려 요한계시록을 비껴간 낱말. 묵시론적 종말론은 필히 기독교적 시각이며 지구상에서 지금현재도 시차를 두고 진행되는 걸 <세계의 극한직업>을 통해 목격한다. 신이 빚은 아름다운 흙을 몸서리 내며, 사람들은 그 위를 아스팔트로 덮어주길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특히 주님 믿는 기독교도와 그리운 사람의 환생임을 못 알아보고 한 달 살기도 모지래게월급 주는 해장님들아, 친환경으로 나아가라!

 

돌아가신 김종철 선생은 언젠가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가?”라는 글을 썼는데, 맥락에 겨운 내 입술로 모든 얘기 할 수는 없지만 나는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하도 어이가 없어 불철주야 '뒤로 뒤로 더 뒤로'를 지향하며 한마디 아니 보탤 수 없는 까닭이다. 흉포하고 어지러운 바람을 몰고 오는 것들아! 순결한 내 몸을 거적 대기로 두르고, 이 나간 장검을 높이 치켜들며 너희들을 치러 오늘 나는 단지 말 달리노라.(feat.크라잉넛_말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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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진의 <자전거 도둑>이 다음 차례인데 쓸 수 없었다. 안중근 책도 쓰려고 했으나 빌렘 신부와의 면회 광경만 떠오르면 감정이 북받쳤다. 어제 늦은 밤에 인터넷에서 우연히 글을 하나 읽었는데 재밌어서 웃게 되고 드디어 물꼬가 트이는 기분이 들면서 고비를 넘게 됐다. 내용이 이렇다.


어느 문학동호회에서 전혜린 무덤에 갔는데, 일단 좀 헤매다가 도착을 했다(검색이라도 했으면 방문 실수요자를 위해 복잡하게 써 둔 내 글이 툭 뜨거나, 묘지 길안내 사진이 있는 다른 사람 글이라도 떴을 텐데).

글쓴이는 간판이 슈바빙이라는 이유 하나로 전혜린을 떠올리곤 그 레스토랑을 자주 찾아가 앉아 있곤 했고, 절판 전까지 지인들에게 전혜린의 수필집을 선물했을 정도로 찐팬인데, 세월이 흘러 처음 마주한 묘비에서 놀라운 것을 발견한다. 그리곤 많은 사람들이 방문했을 터인데 왜 고쳐지지 않았는지 안타까워한다. 묘비 앞면 뒷면 모두다 로 잘못 표기되어 있는데 어찌 이럴 수가 있냐고(성새임! 항시 건강하세이. 덕분에 흐린 마음이 밝게 다림질 되었습니이다. 살았으면 구십이 넘었을, 언제나 젊은 청년 우리의 헤린은 자신의 이름을 원래 그렇게 쓰곤 했답니이다).

 

즐겁게 놀랐다.” 

1959년 새해 아침 뮌헨의 전혜린은 스위스에서 온 헤르만헤세의 편지를 받고 이렇게 썼다. 이것에 맞설 표현은 맛있게 맵죠?” 밖에 없다. 세살 때 천자문을 어예 띠겠노마는 그것을 해냈고(비룡소 마법천자문 카드로 6세에는 가능하다), 오로지 자신만이 쓸 수 있는 문장력도 겸비했다. 너무 쓸 게 많으면 아무것도 쓰지 못한다. 게다가 삶의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면 게임오버다. 직접 쓴 문학작품이 없음에도 있는 듯 착각에 빠트리는 독특한 이 번역가는 수필가로도 불리는데 일기가로도 불릴 수 있으려나.

지금현재 죽은 헤세에게 석장의 그림엽서와 축하인사를 받을 사람이 누가 있는가. 지금현재 크리스마스 답장으로 직접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 우편으로 보낼 문인이 전 세계 어디에 있는지 그 미담을 나는 알지 못한다.

 

<늙은 말을 모는 늙은 마부와 늙은 마부를 둔 젊은 딸> <젊었을 적과는 다른 말과 마부의 상태> <살 돈이 없음을 하라> <말하지 못하는 말> <한 방살이의 고뇌> <감자먹는 부녀> <뜨거운 감자와 생감자 사이> <족쇄의 가족> <소멸된 명랑함> <자동차 탄생의 계기> <아비는 거머리놈이었다> <돌아온 집> <5촉 등을 켜다오> 라고 제목을 해도 어울릴 <토리노의 말>에서, 아침에 깬 딸은 왜 아버지 침상 밑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겉옷을 집어 올리는가.

딸은 왜 자립을 꿈꾸지 않는가, 딸과 할바시는 왜 함께 종말을 맞아야 하는가. 생각의 폭을 넓힐 것을 주문한 혜린이 이것에 대해 쓴다면 일기장에 어떻게 남겼을까. 우리는 어느 대목에서 매혹될까.

 

알리고 싶은 것을 부드럽게 소개하되 마음이 여려 성찰적이 되고 마는 고종석은 <문학이라는 놀이>를 통해 전혜린 사후 발표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비판 한다. 1996년 발행된 김화영의 <바람을 담는 집>을 재인용하여, 그가 고백했듯 상당부분 글을 김화영이 아예 뜯어고쳤음을 상기시키고, 그러고도 그 책은 악문의 전시장이라고 한다. 정신들 차리라는 충고처럼 들리는데 맞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가 다음 사람을 찾기 전까지.

 

따사로워서 마음을 온순해지게 만드는 문장가 정찬은 언젠가 한겨레 칼럼에서 이덕희가 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살았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 자기 고유의 죽음을 가져야 한다. 죽음에 있어 모방은 하수다(내가 존경하는 스콧니어링 모방은 제외되어야 하나 그것도 알 수 없다. 백세는 이제 별 나이 아니므로). 죽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그럼에도 계속 산 것은, 아마도 자신의 죽음이 세간에 떠들썩하게 주목받는 것을 원치 않아 숱한 인내심으로 고유의 죽음이 올 때까지 끝까지 기다렸으리라.

 

혜가 헤라서 걱정인 문학동호회 성새임들은 전혜린 책들을 놓고 현수막을 펼쳐 사진을 찍고 막걸리를 바치고 풀이 자라있다고 걱정했다. 나는 이제 그곳이 조금 빠삭하여 어떤 동물들이 있는지를 알고 어느 계절이 방문하기 좋은지도 알고 풀은 장마가 와도 흙을 잡아주므로 오히려 걱정할 일이 아니고 막걸리는 동물을 부르니 맹물이 좋고 사진에 찍힌 무덤 옆 언덕의 꽃은 내가 심었는데 흙이 퍽 건조하여 며칠간 꼬박 물 주러 다녔고 그 물이 어디서 났냐면 그 밑의 도랑물을 떠다 날랐는데 여름엔 양이 많고 맑아 나도 많이 마시고 다음날 개운하게 일어났고 성새임들이 올라간 그 길은 풀이 극심히 무성하여 내가 낫으로 베었는데 여름풀은 금세 또 자라니 별 표가 안 났을 수 있는데 그 무덤과 그 비석으로 인해 이토록 반갑습니다.

(feat.홍민_잃어버린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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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에서 당하고 죽고 부검되고 불에 타고 가루로 갈아져 돌아온 22살 청년의 삶이 애통해 이 글을 쓴다. (feat.김정호_작은새)


“세상에는 어려운 일들이 참으로 많지만, 굳이 그중 하나를 꼽아보자면 외국 여행 다녀온 사람 입 막기도 빠질 수 없다.” 사회학자이자 독립서점을 운영하는 노명우는 <세상물정의 사회학> 53쪽 “선진국이라는 유령” 챕터에서 이렇게 통찰했다. 

<세계의 극한직업>은 주로 제대로 된 도로가 없는 지역의 ‘트럭 기사’의 여정을 따라가며 그 나라의 정책, 기후, 종교, 민간신앙, 의식 수준, 풍습, 토속적 삶이 어떻게 파괴되어 가고 있는지 풍상을 겪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들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자각 못 하는 연예인과 여행 유튜버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던 중, 영화채널의 이 프로그램을 발견하고 유심히 보게 됐다.  


태국의 카렌족은 호랑이 공격에서 목을 보호하기 위해 황동 나선 목걸이를 한다고 추정된다. 관광수입으로 살고 수공예품도 파는데 그들 중 일부는 폭력을 피해 미얀마를 탈출한 미얀마 피난민이다. 이 피난민 여성들은 먹고 살기 위해 다리 팔 목에 고리를 걸고 관광객을 상대하는데, 고리는 고정형이 아니고 요즘은 탈부착이 가능하다. 금속 알러지가 있으면 여름엔 몹시 가렵고, 쌀1포대와 급여 13만원, 나머지는 팁으로 살림을 꾸려간다. 국경에는 군인이 지키지만 틈을 타서 불법으로 강을 건넌 다른 피난민은, 어리거나 상관없이 밭에서 비닐을 깔고 농사일을 해 돈을 번다. 비가 내리면 비닐을 목이나 허리에 두른다. 


라오스의 정부가 양귀비 재배를 불법화하고 금지하자 ‘그녀’는 옥수수로 품목을 바꿨다. 돈벌이가 별로 되지도 않지만 때가 되어 수확을 하고, 싣고 갈 트럭을 부르니 운송비를 6만원이나 달라고 해 난감하다. 일단 트럭에 옥수수 자루를 최대한 높이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사람들이 올라가 함께 이동하기로 한다. 가파른 절벽 길 이동이라, 무슨 일이 생기면 빨리 알 수 있고 뛰어내리려고 촬영감독 프레드는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옥수수 자루 꼭대기에 앉았다. 트럭운전사는 바깥문 손잡이에 나무 가지를 걸더니 그것을 차 안쪽으로도 걸쳐 문이 열리지 않게 고정하고 차 시동을 건다.


‘그녀’는 심장질환이 있는데 병원 갈 돈이 없어서 아프면 민간요법을 쓴다. 트럭이 달리는 중에 아들이 건넨 주전자에 든 양귀비 씨와 나무껍질 달인 물을 마신다. 병이 낫지는 않겠지만 통증은 덜한지 훨씬 편안한 표정이 된다.
(세계의 극한 직업을 보다 보면, 동남아나 중남미 사람들은 아직까지 전통적 약제(?)를 애용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처럼 양귀비에다 다른 약제를 섞어 끓여 마시거나 코카나무 잎을 오래도록
씹는다. 이는 전통적으로 해오던 토착민들의 자가치료법이고, 다국적 제약회사에 금전적 이익을 안기지 않는, 자율과 자치의 관점에서는 바람직하고 당연한 것이리라.)

명색이 ‘청정국’ 대한민국에 바다에서 어디에서 인공적으로 정제된 어떤 자루들이 왜 발견되는가. 자연스런 민간요법이던 것이 변질되어, 배금주의의 끝판 직업인 밀매상이 유통하고 중독시켜 피싱 범죄에 가담케하고, 그들 손아귀에서 노예로 쥐락펴락 한 것이 이번 캄보디아 사태 아닌가. 
34세 해양경찰(그 시각 전파방해가 있었는지도 조사 발표돼야 할 것이다)의 애도도 아직 안 끝났건만 캄보디아 사태다. 왠지 곧 모방범죄가 전 세계적으로 들끓을 것만 같다. 온라인 세상을 연 것이 “함부로 쏜 화살”이었음을, 하물며 AI는 말해 뭣하랴.
(feat. 하남석_바람에 실려) (feat.루 크리스티_Saddle the w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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