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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발론 연대기 - 전8권 세트
장 마르칼 지음, 김정란 옮김 / 북스피어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1. 끝없는 상상력의 원천, 아더왕과 그의 기사들
과거의 왕이었고 미래에도 왕인 자 - 글래스턴배리 수도원 아더왕의 묘비에서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 어린 시절 우리의 상상력과 꿈을 그 얼마나 자극하던 단어였던가. 우리는 막대기 엑스칼리버를 들고 상상의 백마를 타고 골목 골목을 브리튼의 어느 숲속이라고 여기며 달렸다. 이순신도 멋졌고 김유신도 멋졌지만 아더왕와 원탁의 기사는 무언가 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단어였다.
우리에게만 그러했을까? 아더왕과 그의 멋진 기사들에 대한 이야기는 천년이 넘는 시간을 넘어 수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중세 유럽의 시인들은 각 민족과 지방의 전설에 아더왕의 이야기를 결합했고 끝없이 순환시켜가며 마침내 죽지 않는 왕, 과거에도 왕이었고 미래에도 왕인 한 인물과 그를 둘러싼 ‘불멸의 상징’에 대한 이야기를 완성했다.
종교와 신화, 신화와 비의, 그리고 주술과 상징이 버무려진 이야기들을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로 여긴다. 하지만 재미있는 이야기 중 천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뛰어넘어 현대인의 가슴에 아로새겨지는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다. 왜 아더왕은 그토록 오래 우리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을까?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라서?
<아발론 연대기>를 읽으면서 나는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아더왕이 살았던 브리튼의 숲속에 숨겨진 수많은 비밀과 상징들이 고스란히 아발론에 잠들어 있었고 인류는 그 비밀과 상징을 통해 시간을 넘어서 한 때 인류가 가졌던 지혜를 후손에게 전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비의와 상징들은 기독교가 고대의 신비를 억압하기 전, 태고의 인류의 원형적인 사고와 신앙이었다.
2. 여신들의 이야기
성모여, 당신은 살아있는 희망의 원천입니다. - 단테
<아발론 연대기>를 흔히 기사들의 편력, 모험 이야기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아발론 연대기는 <여신들의 이야기>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기사들은 여신들의 계획, 양육, 음모에 따라 끊임없는 모험을 겪는다. 최고의 기사인 란슬롯은 여신에게 키워졌고 귀네비아로 상징되는 여신의 힘으로 모험을 떠나고 왕국을 분열시키고 다시 평화를 찾는다. 란슬롯은 귀네비아를 볼 때마다 황홀경에 빠진다. 마치 이시스를 본 ‘입문자(initiator)'들이 이시스의 현현을 보며 황홀경에 빠져들 때처럼. 그리고 귀네비아의 사랑을 얻은 후 무한의 힘을 발휘한다. 이시스가 사랑의 힘으로 자신의 베일을 걷고 입문자에게 진실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해주면 입문자는 세상의 모든 미혹을 물리칠 지혜와 힘을 가지게 되는 것처럼.
<다빈치 코드>가 그리 좋은 책은 아니지만 적어도 몇 가지 진실은 담고 있다. 기독교는 인유의 의식에서 여신을 도려내고 그 자리에 신을 앉혔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기독교로 인해 여신은 중세의 무의식으로 가라앉아 신화와 전설에서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아발론 연대기>는 기독교가 절대권력으로 유럽을 지배할 때 여신이 어떤 모습으로 자신을 숨겼고 어떻게 자신을 원형으로 만들어 보존하였는지를 보여준다. 여신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 그리고 자신을 볼 수 있는 자 에게만 기꺼이 자신의 베일을 걷는다.
3. 비밀과 상징의 숲
상징은 다른 표현양식을 통해서는 도저히 드러낼 수 없는 인간존재의 가장 깊은 측면을 드러낸다 - 진 쿠퍼
유럽의 성당을 가면 우리는 가끔 놀라게 된다. 도대체 중세에 건설된 성당에 왜 이렇게 기독교와 관계없는 조각과 그림이 많은 것일까? 물론 전면을 장식한 화려한 모자이크와 벽화, 조각은 틀림없는 기독교의 그것이다. 그러나 기둥아래, 벽면 아래를 살펴보면 기기묘묘한 조각과 그림들이 곧잘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성당의 위용과 성스러움에 압도당한 우리는 그런 하찮은 조각에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고 지나간다. 아미앵성당에 조각되어 있는 연금술의 상징도, 옥스퍼드와 킬펙의 성당에 조각되어 있는 셰엘라-나-기그의 이교도적인 상징도 관광객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니까.
성당을 지은 메이슨은 기독교에 많은 상징과 기호를 심어서 그 기호를 아는 사람에게만 자신들의 신비를 전한다. 마찬가지로 중세에 널리 퍼진 신화와 전설에는 고대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이 읽을 수 있는 비밀이 숨어 있다. 란슬롯은 왜 세 가지 색깔의 갑옷과 무기를 들고 모험을 완수한 것일까? 왜 멀린은 악마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것일까? 왜 란슬롯은 수레에 탄 순간 수치스러운 기사로 취급받았을까?
저승과 이승, 그리고 그 경계에 선 사람들이 있다. 그 경계의 비밀을 알고 전하려는 사람들을 우리는 마법사, 혹은 샤먼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한번은 누구나 샤먼이 되어 경계를 넘어 여행을 떠나야 한다. 살아 있으면서 그 여행을 완수할 수 있는 사람을 고대인들은 ‘영웅’이라고 불렀다. 란슬롯과 가웨인은 그런 의미에서 영웅이다. 칼 차고 전쟁을 하는 영웅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의 영혼을 지닌 채 완전함을 찾아 또 다른 차원의 부름에 응할 줄 아는 순례자로서의 영웅.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가 한번은 겪어야할 삶의 여행에 자신의 존재 전체를 걸 줄 줄 아는 용기를 가졌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영웅이다. 그리고 그들 영웅은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너 역시 영웅이며 기꺼이 비밀과 상징을 통해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여행을 떠나라고.
그들의 속성을 알아 볼 수 없을 때 우리는 중세의 옛 모험담과 로맨스만을 볼 뿐이다. 그리고 그 상징들 속에 녹아있는 풍부한 진실들을 놓치게 된다. 삶의 신비를 잃어버린 우리들은 우리를 향해 외치는 고대의 지혜를 들을 수 없다. 중세의 고딕 성당을 지나가며 고작 그림엽서에 실릴만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처럼 우리는 눈앞에 있는 생의 신비를 볼 수 없는 것이다.
삶은 결코 단체 관광여행이 아니다. 모든 이에게 삶은 편력이자 모험이며 모든 이는 그 자신의 삶에서 여신의 부름을 받아 퀘스트를 떠나는 기사이자 영웅이다. 그리고 그 중 축복받은 몇몇은, 여신의 부름에 자신의 전 존재를 던질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이들은 이시스의 베일을 들추고 신비의 황홀경에 빠질 것이다.
4. 꿈, 그리고 신화
우리의 내부에는 가득 차 있는 꿈의 판테온이 있다 - 조셉 캠벨
기사들이 모여 만찬을 먹으며 환담을 나누는 궁성으로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갑작스럽게 나타나 왕비를 납치하고는 머나먼 자신의 나라로 떠나버린다. 왕비를 찾으러 가는 란슬롯은 그 들어보지 못한 왕국이 한번 가면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등장 할 때에는 누구도 알 수 없었던 그 검은 기사는 알고 보니 먼 마법의 왕국의 유명한 왕자이자 기사이며 그 아버지는 누구나 알고 있는 최고의 현군이다.
전형적인 꿈의 내러티브다.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정체불명의 침입자가 우리, 혹은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을 가져간다. 우리는 두려움에 떤다. 그리고 그를 ?던지 혹은 그로부터 도망간다. 다음 장면에서 우리는 전혀 낯선 곳에 서있는데 그 침입자는 익히 알고 있는 누군가의 얼굴로 변해 있다.
이 다소 모호한 내러티브구조를 보면서 개연성과 리얼리즘을 논하며 극적인 재미가 없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꿈속의 우리는 그 개연성 없는 내러티브에 빠져 두려움에 떨기도 하고 슬픔에 겨워 울기도 한다. 누구도 꿈을 극의 구조로 이해하고 분석하지 않는다. 오히려 꿈속의 미분화된 상징들을 개인의 내밀한 욕망과 무의식의 일부로 파악할 때 우리는 우리들 자신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신화는 인류가 꾸는 꿈이다. 그 속에는 먼 시간의 저편에서 손짓하는 인류의 내밀한 사고와 욕망이 담겨있다. 그 상징을 이해할 때 우리는 인간을 이해하게 되고 인간을 이해할 때 우리들 자신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아더왕의 신화는 그리스신화보다 더 오래된 인류의 원형의식을 보여준다. 여신이 세계를 지배하던 시절, 로고스가 제우스라는 이름으로, 야훼라는 이름으로 여신을 몰아내기 이전의 시절, 어둠 속에서 빛나는 달의 시대에 인류가 꾸었던 꿈들이 소박한 내러티브 내에 반짝이고 있다.
5. 우리 모두는 성배를 찾아야 한다.
<길가메시>는 모든 사람의 서사시다 - 마크 헤드슬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매일 매일 똑같은 행위를 반복할 뿐 진정한 삶의 의미는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끔 이런 의문이 고개를 들곤 한다. 그러나 바쁜 일상사는 그런 생각을 붙잡고 있을 여유를 베풀지 않는다. '옷 속의 가시 같은‘ 의문을 묻어둔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한다. 마음속의 가시는 꿈속으로 스며들고 언젠가는 우리 곁을 찾아올지도 모른다. 아더왕과 그의 기사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궁정생활을 즐길 때 먼 마법의 나라에서 온 여인은 외친다. 그대들은 그저 밥만 먹으며 흥청거리는 게으름뱅이라고. 그녀의 나라에는 모험이 기다리고 있는데 왜 떠나지 않느냐고. 그 여인, 혹은 여신은 우리들 마음 깊은 곳에 가려진 비밀이 우리를 부르기 위해 보낸 사자인 것이다.
삶이 의미 없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모험을 향해 떠나야 한다. 실제의 여행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비밀을 찾는 모험의 여행을 말이다. 아더왕이 찾던 성배와 길가메시가 찾던 불사의 비밀은 우리의 존재 깊숙이 숨겨져 있는 비밀의 상징이다. 사회가 혹은 외부의 권력이 삶에 강제한 가치와 의미들이 아니라 각자의 가슴 속 깊숙이 새겨진 생의 의미를 찾을 때 우리들의 생은 불멸의 것이 된다. 육체적 생은 끝날지라도 우리가 삶의 무대에 아로새긴 의미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브리튼의 숲이 아닐지라도 모험은 존재하고 존재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시작될 수 있다. 지저분하고 어지러운 내방에서, 사무실의 컴퓨터 앞에서도 우리는 모험여행을 시작할 수 있다. 진정으로 비밀을 알기를 원하는 자에게 언제든지 여신은 자신의 사자를 보낸다.
그 부름을 인식하여 존재의 비밀을 찾아 모험을 떠나고 싶다면 우리는 경험자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각자의 모험은 개별적인 것이지만 이미 모험을 끝낸 이들이 상징을 통해 남겨둔 지도하나쯤을 간직한다면 뜻밖의 상황에서 도움을 받을지도 모른다. 먼 옛날 브리튼 숲에서 있었던 일, 아니 그 보다 더 먼 옛날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살았던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기억해 두자.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인 것이다. 우리 모두가 길가메시이고 오시리스와 호루스이며 아더왕의 기사들이니까.
<아발론 연대기>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현대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인 셈이다. 한권의 책에 담을 수 있는 가장 많은 비밀과 의미를 담아둔 훌륭한 편력의 참고서. 생의 모험을 시작하고 싶은 사람에게 브리튼 숲은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