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전하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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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작품이 리뷰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이번 작품 집에서 리뷰의 대상이 될 만한 작품이 있었는지조차 의문이다.

그러나 특정한 이유로 <우리의 소원은 과학소년>의 리뷰를 짧게 작성했다. 나도 우리의 소원 하나를 말하자면 더이상 이런 식으로 문학을 모독하는 일들이 벌어지지 말았으면 한다.


<우리의 소원은 과학 소년>


예술을 이념을 위한 도구로 쓴다면 그것이 예술인지 선전도구인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예컨대 기독교 전도영화를 보자. 누군가 박해를 받고 순교하는 장면을 보며 기독교 신자들은 애절하게 울겠지만 그 이념에 동조하지 않는 관객은 오롯하게 객관적인 예술성 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이념을 설파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면 어떤 극적인 재미가 있다는 것일까? 일제 강점기에 고통받던 사람들은 오로지 여성과 성소수자뿐일까? 그게 아니라면 여성과 성소수자는 약자 중에서도 더 약자, 그러니까 가야트리 스피박이 이야기한 하위주체에게 목소리를 주기 위한 장치로 역사와 소설을 도구로 사용하고자 하는 것일까? 만일 스피박이 이 작품을 읽었다면 경멸 이상의 혐오감을 표현 했으리라 믿는다. 정말 하위주체, 서발턴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작품을 읽고 싶다면 아룬다티 로이를 읽어보자.

 

고증부터 이야기 해보자. 제중원은 1884년 갑오개혁 행정 개혁 때 내무아문으로 폐합 되었고 세브란스병원이 생긴 것은 1904년이므로 안나 서가 활동하던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에 제중원 간호원복장이 등장할 여지는 없다. 더구나 당시의 명칭은 간호원이 아니라 간호부였다는 것은 아래 여러 고증오류를 볼 때 고려의 대상조차 못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평론가의 말을 빌자면 작가는 그저 과거를 활용해서 자신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세계관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권리를 주장 중이라는 것이다. 작가의 정치 논리 앞에서 역사적 사실 따위 사소한 것은 전혀 문제가 될 리가 없다. 역사소설이 아니니까.

 

작가의 역사 무시는 이런 사소한 기관의 역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안나의 아버지 서윤식은 돌연 안나를 지참금을 받고 시집을 보낸다. 작가는 팔아버렸다는 표현을 쓰고 싶었던 것같다. 서윤식은 한남, 아니 조선남이니까. 그 이유는 더욱 황당한 것이 당시를 떠들썩하게 했던 김용주와 홍옥임의 자살사건을 떠올리고 혹시라도 안나가 그런 소동을 벌인다면 자기 이름이 더렵혀질 것이 두려워서란다. 그런 사람이 왜 갑자기 신분도 없던 천기의 딸을 수양딸로 들여서 이화학당까지 보내고 “제중원”의 간호원까지 시켰을까? 이 사실은 역사의 무시는 아니라 개연성 멸시 정도 되겠지만 그 다음 단락에서 심각한 역사적 무지가 나타난다.

 

김용주 홍옥임의 정사(情死)는 1931년 4월 8일이다. 그리고 이 소식에 놀란 서윤식이 안나를 팔아버렸고 남편의 새디즘과 학대에 지쳐 이혼하고 돌아온 것은 빨라도 1932년 정도라고 보면 무난할 것 같다. 그런데 느닷없이 “3·1운동이 한창이던 그 때” 라고 했는데 그때는 1930년 평양고무공장 여성 노동자가 근무환경개선을 외치고 시위가 벌어지던 때라고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임신한 채 돌아온 윤경준을 만난다. 그런데 일본군이 위안부를 끌고 간 것은 1939년 2차대전 발발 후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3·1 운동은 1919년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다. 이쯤 되면 작가가 쓰고 있는 역사는 몇 번째 지구에서 벌어진 사건인지 의아하다. 작가의 정치적 의도를 위해서라면 역사를 마음대로 고치는 것 쯤이야 아무것도 아닌 걸까? 한 공동체가 겪은 역사적 현실을 오로지 작가의 이념을 위해 편집해서 갖다 붙여도 되는 것일까?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공동체의 역사적 시공간을 빌려 쓰며 최소한의 조사조차 하지 않는 불성실함은 어떻게 봐야 하나?

 

여기까지 오면 개연성을 묻는 것은 이미 사치에 불과하다. 그래도 독자를 우롱할 의도가 아니라면 몇 가지 서술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윤경준을 처음 만난 날 안나는 윤경준을 아가씨라고 불렀고 한눈에 남장을 한 여자라고 간파했다. 그런데 다음 장면에서 경찰은 윤경아가 남장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거, 사내 끼리는 믿고 처분합니다. 요즘 저런 변태성욕자들 때문에 미치겠어요.”라고 말하고 여장 남자 수성을 풀어준다(일제강점기에는 경찰이라는 단어는 쓰이지 않았고 순사라고 불렀지만 이 역시 다른 고증 오류에 비하하면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 경찰 역시 한남, 아니 조선남이니 아둔해서 그렇다고 하자. 그래서 남장 여자를 못 알아보는 아둔함도 말이 된다고 넘어가자. 그럼 여장남자는 귀신같이 잡아내는 영민함은 어찌 되는 건가? 독자는 이런 설정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윤선영은 또 어떤가? 동성애자임이 분명한 그녀는 왜 존과 결혼한 것일까? 존이 메리를 돌볼 보모를 구한 것이라서? 그런데 존은 그녀가 과분하다고 여겼다고 한다. 사랑한 것이다. 그런 존의 사랑은 철저하게 무시되어도 괜찮은 것일까?

 

평론가 이소는 이 소설이 철저하게 “윤리”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윤리의 시대는 이념의 불필요함과 혁명의 불필요함을 모두가 받아들인 이후에 시작 되었다” 는 옹골찬 말로 이 소설의 가치를 피력한다. 이 말의 함의를 해독하자면 이념도 혁명도 인간을 도구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이므로 윤리에 배치된다는 칸트의 윤리관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 작가는 페미니즘 혹은 성소수자의 숨겨진 역사를 밝힌다는 이념을 설파하기 위하여 윤선영의 남편 존을 도구로 활용하는 것 정도는 안중에도 없는데. 미국 남자의 인권은 이미 인권이 아니라서 윤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

 

언제까지, 어디까지, 이렇게 문학을 희화하는 것이 용인되어야 하나?

 

낙관하자고 반복되어서 쓰이는 대사도 짚고 넘어가고 싶다. 8-90년대 운동권들이 외치던 구호 중 흔히 쓰이던 것 중 하나가 “이성으로 비관하고 의지로 낙관하자” 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대사 하나까지 이토록 시대착오적일까?

 

참고 문헌을 보면 <조선의 퀴어>라는 논픽션이 있다. 이 소설은이 책에 나오는 선정적인 에피소드를 당시의 시대정신으로 해석하고 싶은 작가가 얼기설기 짜 맞춘 이야기다. 이념과 정치성 없이 객관적으로 이 소설을 평가했다면 불성실하다는 이유만으로도 수상후보조차 되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이래서 정치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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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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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미국을 담은 빛 바랜 풍경사진


벌랜드 부부 곁을 스쳐 가는 군상과 60년대에서 70년대까지 뉴욕의 중산층의 모습그리고 무엇보다도 정경들제임스 설터는 부분 부분이 빛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벌랜드 부부의 삶의 모습분위기정취를 그대로 전달한다화려하고 지적이고 가끔은 눈부시지만 결국은 허무한 당시의 느낌을 그 때 그 순간을 함께 살았던 느낌을 준다.


리처드 포드는 서문에서 제임스 설터가 이들평범한 부부고립되고 마멸되어가는 미국문화의 고립된 향유자들을-너그럽지 않은 눈으로 다룬다고 이야기 한다비리 벌랜드는 좋은 아빠지만 무능한 남자고이들 중 누구도 닮고 싶지 않은 전형이며 이들은 삶을 원하면 마치 한번 더 살 수 있다는 듯 가볍게 여기며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분명 좋은 사람들이지만 말하자면 깊이가 없다는 말이다.


글쎄소설은 독자의 것이니 누구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것인데나는 제임스 설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리처드 포드가 언급한 부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마멸되어가는 미국 중산층 문화의 고립된 향유자로 이들을 그리고자 한 것도 아니고 삶의 진정 중요한 문제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이들을 비판 하려 한 것도 아니다마찬가지로 이들이 심지어 서로를 사랑하고그리고 마지막 까지도 서로를 존중하므로 우리-이 책을 읽는 미국독자들-누구도 이들보다 우월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 함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임스 설터가 말하고자 한 것은 60년대에서 70년대 후반까지 뉴욕 중산층 지식인을 휘감았던 열기시대정신을 그 안에서 살아가는 한 부부의 구체적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싶었던 거 아닐까? 그래서 네드라의 모델이 되었던 여자는 자신의 묘비명에 소설의 한 구절을 새기고 싶다고 말한다. 그녀를 비난하고 비판한 글로 읽지 않았기에.


비리 벌랜드는 건축가지만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명성도혹은 네드라 벌랜드가 원하는 만큼의 금전적 성공도 얻지 못한다물론 풍요로왔고 뭐든지 넘치게 많았던 시대, "좋았던 시절"의 중산층이니 충분히 많은 돈을 벌었건만 비리는 스스로리를 좋은 아빠지만 무능하다고 생각하고 네드라는 비리가 절대로 부자가 될 수 없을 거라고 말한다. 비리는 스스로에게 가혹하고 네드라는 비리에게 가혹하다. 리처드 포드는 비리의 문제점 중 하나가 훌륭한 건축가가 되기를 원하지 않고 명성을 얻기 바라는 것이라 말한다. 부당한 것을 원한 것처럼. 포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런 거다. 명성보다는 실력과 창의력을 가지기를 원하고 명성은 뒤따라 오는 것인데 비리는 반대로 생각했다고. 그 사실을 비리가 몰랐을까? 


한명의 프로페셔널한 지업인로서 자신의 직업군에서 명성을 얻는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비리는 가우디를꿈꾸는 사람인데 그만한 재능이 없음에 절망한다하지만 그는 항상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고 책을 만들고 인형극를 하며 자신의 재능을자신의 창의력을지성을음악적 교양을 드러낸다심지어 말년에는 깨닫는다자신이 재능과 지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상주의와 의리인간답기 위한 가치들을 들고 헤매던 일들바로 그 기억 때문에 그는 유지되고 깨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그리고 문제는 그가 그런 자신을 똑똑히 보지 못했고 그게 문제라는 것도(p. 389).


비리는 능력있는 건축가이자 교양있는 중산층이고 분명 평균 이상의 지성을 지닌 사람이지만 그 시대 모든 사람들처럼 무엇이 옳은지어떤 삶이 바른 것인지그리고 무엇보다도 네드라라는 불꽃처럼 자유로운 여인을 어떻게 해야 평생 곁에 둘 수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소설의 그 누구도 네드라를 영원히 곁에 두지 못한다. 비리는 평범하고 다른 모든 남자들도 평범한 사람인데 네드라는 평범하지 않다는 말이다.


무엇보다도 네드라.

이 소설은 네드라를 축으로 해서 모든 캐릭터-비리 벌랜드를 포함해서아니 특히 비리야말로-가 주변을 공전한다네드라는 아름답고 신비롭다사치스러우면서 지적이고 영원한 자유를 원한다네드라와 비리의 처음 장면은 아름답다. 조랑말을 찾으며 강가의 저택에서 묘사되기 시작한 생활은 눈부셨고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다만캐서린은 말한다네드라는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여자라고


사실 네드라는 너무나 이기적이라 스스로의 자유를 단 하나도 포기할 수 없다좋은 사람과는 사랑을 해야하고 비리가 지겨울 때는 지겹다고 말해야 한다변덕스러운 자신의 감정에 마지막까지 충실하다생각해보면 그녀가 바로 70년대의 미국이다.


어떤 미국이냐고이런 거다대마초를 피우고가끔은 더한 마약을 하면서 비틀즈와 클래식을 동시에 들으면서 발래와 연극과 영화를 즐기고 안톤 체홉을 읽다가도 인도의 스승 크리슈나무르티의 책을 읽는다어느날은 연극과 비의를 섞은 조오지 구르지예프(혹은 게오르규 구르지예프)스타일의 공연예술을 보고 그 연글의 배우들은 당연히 바가바드기타를 읽는다물질적 풍요속에서 허무를 느끼고 정신적 자유를 찾기 위해 마약과 동양의 해탈을 꿈꾸던 시대네드라가 바로 그 시대다.


첫 장에서 캐서린은 네드라가 이기적이라 하며 남편 피터가 네드라같은 여자와 결혼했어야 한다고 말한다피터는 화를 낸다하지만 4장에서 캐서린은 말한다네드라는 정말 불쌍한 여자라고불행하다고가정을 떠났으니까피터는 아니라면서그녀는 남자에게 의지하지 않는심지어 입센의 노라와 같은자유롭고 참다운 여자의 삶을 산다고 말한다이들이 대화가 네드라의 삶과 그녀를 바라보는 주변인의 시선을 압축하고 있다그리고 이번 대화에서도 피터는 화를 낸다.


축제가 끝나고 모든 것이 사라질 때 네드라는 죽고 사람들은 남는다네드라는 가을에 죽지만 비리는 봄이 되어서야 이탈리아에서 돌아왔다. 처음 그들이 정착했던 집터 강변에서 서서 그들이 함께했던 영원할 것 같던 오후를 회상한다. 눈부셨던 오후를 어둠이 가득한 강변에서 바라본다. 이 소설은 눈부신 오후에서 어두운 밤으로 내려 앉는다. 친구들은-특히 네드라는-떠났고 우리는 강변에 서 있다. 피안으로 떠난 네드라를 이쪽 강변에서 바라보듯.


나는 준비됐고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었어마침내 준비가 되었다고.


자유롭던 시대는 막을 내렸다그 시대는 사라지고 파편들만 남았다.



이 평온한 시간이 안락한 공간이 죽음실제로 여기에 있는 모든 것들접시와 물건들조리 기구와 그릇들은 모든 부재하는 것의 삽화였다과거로부터 밀려온 조각들이고 사라져 버린 몸체의 파편들이었다.


제임스 설터가 그리고자 했던 것은 60년대와 70년대 초까지 미국을 떠돌던 공기부유하고 있는 자유의 파편들그리고 이미 사라져 버린 정신의 그림자가 떠돌고 있는 가운데 이들의 사랑도 스러졌다는 것을 묘사한다가족관계가 스러진 것이 아니라 한 시대와 함께 그들의 모든 것도 이미 사라져 버린 것들의 잔여물이 되었다고 말한다그 시대가 사라지고 있기에 그들은


거짓의 증거들 속에서 거짓을 살았다.


이 장면에서 비리는 딱 한번 네드라에게 화를 낸다그는 좋은 사람이지만 우유부단하다그가 가진 결점은 그것이다우유부단하기에 그가 가진 모든 좋은 것들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그리고 마지막까지 강변에 서서 생각하게 된다이제야 준비가 되었다고너무나 늦게.



정취와 분위기그리고 빛과 풍광의 묘사가 서사를 에워싸서 새로운 내러티브를 전달한다는 걸 배운 소설이다하지만 생소한 표현예컨대 "강은 영국인처럼은처럼 찼다"고 말할 때 제임스 설터가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일까?


번역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 같다. 유려하고 멋진 번역있지만 중간중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 있었는데 원어가 궁금하기도 했다. 이 책은 박상미님이 번역했는데 <올댓이즈>는 김영준님에게 맡겼다두 책의 번역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공부가 될 거 같다. 


상미님의 말처럼 이 책 제목의 원어 느낌을 전달하기가 어렵다. Light years라고하면 광년이라는 거리 개념과 가벼운 연대라는 특이한 조어, 두 의미가 된다. 소설 분위기를 보면 빛 속에 떠도는 자유의 정취와 파편, 빛 살속에 먼지처럼 부유하는 가볍고 찰나 같은 우리의 삶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가벼운 나날들이라고 번역하면 그 모든 분위기가 다 증발하고 땅에 떨어진 먼지 조각 같은 이미지만 남는다. 번역의 한계라고 밖에. 


읽고 나서 오랜 여운이 남는다. 넘치는 에너지는 아니지만 묵직한 여운이 가슴에 오래 괸다. 가벼운 나날의 여운은 결코 가볍지 않다.

우리는 빠르게 검은 강에 다가간다.

이 평온한 시간, 이 안락한 공간, 이 죽음. 실제로 여기에 있는 모든 것들, 접시와 물건들, 조리 기구와 그릇들은 모든 부재하는 것의 삽화였다. 과거로부터 밀려온 조각들이고 사라져버린 몸체의 파편들이었다. -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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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많이 읽었네요. 상위 0.53%라는 것도 놀라운데 상위 0.1%가 돠려면 매달 30권을 더 읽어야 한다는 게 충격적이군요. 상위 0.1%는 하루 1.2권을 읽는다는 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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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골의 서
로버트 실버버그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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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과 호러 - 두 개골의 서



1.SF?

작자 역시 이 책이 SF범주에 속하는지 의아스러웠던 모양이다. 영생의 탐색, 그 자체는 매우 SF적임이 분명하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영생을 탐색하는 수많은 도가계열 무협판타지도 SF일까? 결국 로버트 실버버그는 다시 단언한다. 휴고상과 네블러상 후보로 지목되었다는 자체가 SF라는 증거 아니겠냐고. 매우 매우 의문스러운 발언이다. 그 만큼 이 책은 SF라는 장르에서 특이한 책이다.

하긴 소위 인문학적인 SF를 표방하는 작품들이 종종 그러하다. <다아시 경의 모험>시리즈는 어떤가? 대체역사 판타지라는 장르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랜달 개릿의 이 수작을 SF로 분류하기도 한다. 대체역사소설은 평행우주론을 기반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SF로 분류될 수 있다는 것일까?

개인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 소설은 호러미스테리성장소설이다. 네 명의 대학생이 영생을 얻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그 여행이 다소 호러적인 결말로 치달으면서 그중 일부는 성장(?)한다는 이야기.

그러나 SF이건, SF가 아니건 이 소설은 재미있다. 그게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2. 잘되면 신선, 못되어도 건강?

한 동안 이 나라에는 단전호흡의 열풍이 불었다. 그 인기를 바탕으로 여러 책들이 출간되었는데 그 책 중에 <잘되면 신선, 못되어도 건강은 챙긴다>라는 제목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4명의 대학생은 도서관에서 미처 번역되지 않은 <두개골의 서>를 발견하고 그 책에 서 영생하는 수도사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리고 우연히 알게된 정보를 토대로 그 수도사들이 살고 있는 사원으로 간주되는 곳을 향해 출발한다. 이들의 생각을 평균내어 보면 이렇게 표현된다. 잘되면 영생, 못되어도 여행의 즐거움.

이 책이 쓰여진 시점은 1972년도. 한국의 80년대 말과 90년대 중반까지 뭔가 비슷한 분이기가 느껴지던 시기라고 생각된다. 신비주의, 신과학, 뉴에이지의 물결이 사회 전반의 변혁에의 열망과 뒤섞여 물결치던 시절. 로버트 실버버그는 그 시점의 한 단면을 잘라내어 우리에게 생생하게 재생해 준다.

동양의 신비를 서구적으로 재해석하던 시절, 노장사상, 기(氣), 선단술에 대한 호기심과 인도의 신비주의가 서구적으로 분해되어 재생산 되던 그 시절의 지식인에게 ‘영생’은 단순한 메타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최고 대학의 최고지식인이 이 비합리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혹은 반신반의 하면서 이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캐릭터의 사고 곳곳에 묻어나는 모순, 합리적 이성과 직관적 믿음의 충돌은 바로 당시 지식 사회의 횡단면이다. 이 책은 그래서 뛰어난 소설인 동시에 지식인 사회에 대한 훌륭한 풍속자료다.

이 책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스츠키 다이세츠와 엘리아데가 보이고, 칼 융이 쓴 <태을금화종지>의 서문과 해설서가 보이고 프리초프 카프라가 숨어있다. 더 깊이 파고들어가 보면 신지학회와 그들이 섬겼던(혹은 섬겼다고 착각하는) 숨은 그랜드마스터들이 슬며시 웃음을 띠우며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서구식으로 해석되던 동양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시간이 있다면 이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따로 써보고 싶을 만큼 흥미로운 주제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서구적으로 재해석된 동양이 다시 우리에게 우리의 이미지로 다가왔고 그 때가 바로 우리의 80년대와 90년대 중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시절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그립고도 아스라 하지만 잊고 싶은 부분도 있는  옛 시절의 냄새.



3. 문체, 그리고 번역


이 책은 4명의 일인칭시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들의 성격에 따라 네 가지 문체로 이야기는 이어지고 있다. 로버트 실버버그는 이 부분에 대해서 “고약한 글쓰기 훈련”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로버트 실버버그는 훌륭하게 네 명의 캐릭터를 문체를 통해 형상화 하는데 성공했다. 왜냐하면 번역에서도 네 명의 성격은 멋지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티모시는 건조하고 상상력이 부족하며 단도직입적이고 네드는 현란하고 상상력이 풍부하며 말이 길어진다. 이 두 캐릭터 사이에 일라이-그는 네드쪽에 가깝다-와 올리버-그는 티모시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가 있고 이들은 각자의 성정을 일인칭 시점에서 거리낌없이 표현한다. 

이 소설이 고약한 글쓰기 훈련이라는 저작의 주장에 동의하며 동시에 번역자에게는 더욱더 혹독한 훈련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근래에 읽었던 몇몇 번역 소설과 달리 매끄럽게 읽히는 것을 볼 때, 또 네명의 성격이 문체에서 드러나는 것을 고려할 때 번역의 완성도도 상당히 높아 보인다. 덕분에 즐거운 글읽기, 행복한 글읽기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4. 그 밖에 몇 가지........

북스피어에서 나오는 책은 이번이 두 번째인데 지난번 <아발론 연대기>에서와 같이 이번에도 디자인이나 외장에 만족감을 느꼈다. “무슨 책인데 그렇게 있어 보여?” 책상 위에 놓인 이 책을 보고 던진 마님의 말이다. 하드카피 양장본에 두께에 비해 가벼운 무게, 은백색의 책갈피띠, 멋진 표지 디자인, 본문에 바로 주석을 달아서 독서의 흐름을 끊지 않는 편집디자인........ 컨텐츠도 좋지만 소장욕을 불러일으킬만한 외장과 꾸밈새도 좋았다.


내 취향으로 판단하자면 결말부분이 약간 아쉽기는 했지만 이 보다 나은 결말을 기대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결말과 각 캐릭터의 성격, 기대 등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작자의 의도나 지향점을 분석할 여지가 또 생긴다. 분명히 작자는 무언가 다른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다음 기회에 스포일러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작자의 의도를 좀 더 분석한 글을 올렸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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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발론 연대기 - 전8권 세트
장 마르칼 지음, 김정란 옮김 / 북스피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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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끝없는 상상력의 원천, 아더왕과 그의 기사들


과거의 왕이었고 미래에도 왕인 자 - 글래스턴배리 수도원 아더왕의 묘비에서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 어린 시절 우리의 상상력과 꿈을 그 얼마나 자극하던 단어였던가. 우리는 막대기 엑스칼리버를 들고 상상의 백마를 타고 골목 골목을 브리튼의 어느 숲속이라고 여기며 달렸다. 이순신도 멋졌고 김유신도 멋졌지만 아더왕와 원탁의 기사는 무언가 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단어였다.


우리에게만 그러했을까? 아더왕과 그의 멋진 기사들에 대한 이야기는 천년이 넘는 시간을 넘어 수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중세 유럽의 시인들은 각 민족과 지방의 전설에 아더왕의 이야기를 결합했고 끝없이 순환시켜가며 마침내 죽지 않는 왕, 과거에도 왕이었고 미래에도 왕인 한 인물과 그를 둘러싼 ‘불멸의 상징’에 대한 이야기를 완성했다.


종교와 신화, 신화와 비의, 그리고 주술과 상징이 버무려진 이야기들을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로 여긴다. 하지만 재미있는 이야기 중 천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뛰어넘어 현대인의 가슴에 아로새겨지는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다. 왜 아더왕은 그토록 오래 우리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을까?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라서?


<아발론 연대기>를 읽으면서 나는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아더왕이 살았던 브리튼의 숲속에 숨겨진 수많은 비밀과 상징들이 고스란히 아발론에 잠들어 있었고 인류는 그 비밀과 상징을 통해 시간을 넘어서 한 때 인류가 가졌던 지혜를 후손에게 전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비의와 상징들은 기독교가 고대의 신비를 억압하기 전, 태고의 인류의 원형적인 사고와 신앙이었다.



2. 여신들의 이야기


성모여, 당신은 살아있는 희망의 원천입니다. - 단테


<아발론 연대기>를 흔히 기사들의 편력, 모험 이야기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아발론 연대기는 <여신들의 이야기>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기사들은 여신들의 계획, 양육, 음모에 따라 끊임없는 모험을 겪는다. 최고의 기사인 란슬롯은 여신에게 키워졌고 귀네비아로 상징되는 여신의 힘으로 모험을 떠나고 왕국을 분열시키고 다시 평화를 찾는다. 란슬롯은 귀네비아를 볼 때마다 황홀경에 빠진다. 마치 이시스를 본 ‘입문자(initiator)'들이 이시스의 현현을 보며 황홀경에 빠져들 때처럼. 그리고 귀네비아의 사랑을 얻은 후 무한의 힘을 발휘한다. 이시스가 사랑의 힘으로 자신의 베일을 걷고 입문자에게 진실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해주면 입문자는 세상의 모든 미혹을 물리칠 지혜와 힘을 가지게 되는 것처럼.


<다빈치 코드>가 그리 좋은 책은 아니지만 적어도 몇 가지 진실은 담고 있다. 기독교는 인유의 의식에서 여신을 도려내고 그 자리에 신을 앉혔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기독교로 인해 여신은 중세의 무의식으로 가라앉아 신화와 전설에서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아발론 연대기>는 기독교가 절대권력으로 유럽을 지배할 때 여신이 어떤 모습으로 자신을 숨겼고 어떻게 자신을 원형으로 만들어 보존하였는지를 보여준다. 여신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 그리고 자신을 볼 수 있는 자 에게만 기꺼이 자신의 베일을 걷는다.


3. 비밀과 상징의 숲


상징은 다른 표현양식을 통해서는 도저히 드러낼 수 없는 인간존재의 가장 깊은 측면을 드러낸다 - 진 쿠퍼


유럽의 성당을 가면 우리는 가끔 놀라게 된다. 도대체 중세에 건설된 성당에 왜 이렇게 기독교와 관계없는 조각과 그림이 많은 것일까? 물론 전면을 장식한 화려한 모자이크와 벽화, 조각은 틀림없는 기독교의 그것이다. 그러나 기둥아래, 벽면 아래를 살펴보면 기기묘묘한 조각과 그림들이 곧잘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성당의 위용과 성스러움에 압도당한 우리는 그런 하찮은 조각에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고 지나간다. 아미앵성당에 조각되어 있는 연금술의 상징도, 옥스퍼드와 킬펙의 성당에 조각되어 있는 셰엘라-나-기그의 이교도적인 상징도 관광객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니까.


성당을 지은 메이슨은 기독교에 많은 상징과 기호를 심어서 그 기호를 아는 사람에게만 자신들의 신비를 전한다. 마찬가지로 중세에 널리 퍼진 신화와 전설에는 고대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이 읽을 수 있는 비밀이 숨어 있다. 란슬롯은 왜 세 가지 색깔의 갑옷과 무기를 들고 모험을 완수한 것일까? 왜 멀린은 악마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것일까? 왜 란슬롯은 수레에 탄 순간 수치스러운 기사로 취급받았을까?


저승과 이승, 그리고 그 경계에 선 사람들이 있다. 그 경계의 비밀을 알고 전하려는 사람들을 우리는 마법사, 혹은 샤먼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한번은 누구나 샤먼이 되어 경계를 넘어 여행을 떠나야 한다. 살아 있으면서 그 여행을 완수할 수 있는 사람을 고대인들은 ‘영웅’이라고 불렀다. 란슬롯과 가웨인은 그런 의미에서 영웅이다. 칼 차고 전쟁을 하는 영웅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의 영혼을 지닌 채 완전함을 찾아 또 다른 차원의 부름에 응할 줄 아는 순례자로서의 영웅.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가 한번은 겪어야할 삶의 여행에 자신의 존재 전체를 걸 줄 줄 아는 용기를 가졌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영웅이다. 그리고 그들 영웅은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너 역시 영웅이며 기꺼이 비밀과 상징을 통해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여행을 떠나라고.


그들의 속성을 알아 볼 수 없을 때 우리는 중세의 옛 모험담과 로맨스만을 볼 뿐이다. 그리고 그 상징들 속에 녹아있는 풍부한 진실들을 놓치게 된다. 삶의 신비를 잃어버린 우리들은 우리를 향해 외치는 고대의 지혜를 들을 수 없다. 중세의 고딕 성당을 지나가며 고작 그림엽서에 실릴만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처럼 우리는 눈앞에 있는 생의 신비를 볼 수 없는 것이다.


삶은 결코 단체 관광여행이 아니다. 모든 이에게 삶은 편력이자 모험이며 모든 이는 그 자신의 삶에서 여신의 부름을 받아 퀘스트를 떠나는 기사이자 영웅이다. 그리고 그 중 축복받은 몇몇은, 여신의 부름에 자신의 전 존재를 던질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이들은 이시스의 베일을 들추고 신비의 황홀경에 빠질 것이다.



4. 꿈, 그리고 신화


우리의 내부에는 가득 차 있는 꿈의 판테온이 있다 - 조셉 캠벨


기사들이 모여 만찬을 먹으며 환담을 나누는 궁성으로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갑작스럽게 나타나 왕비를 납치하고는 머나먼 자신의 나라로 떠나버린다. 왕비를 찾으러 가는 란슬롯은 그 들어보지 못한 왕국이 한번 가면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등장 할 때에는 누구도 알 수 없었던 그 검은 기사는 알고 보니 먼 마법의 왕국의 유명한 왕자이자 기사이며 그 아버지는 누구나 알고 있는 최고의 현군이다.


전형적인 꿈의 내러티브다.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정체불명의 침입자가 우리, 혹은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을 가져간다. 우리는 두려움에 떤다. 그리고 그를 ?던지 혹은 그로부터 도망간다. 다음 장면에서 우리는 전혀 낯선 곳에 서있는데 그 침입자는 익히 알고 있는 누군가의 얼굴로 변해 있다.


이 다소 모호한 내러티브구조를 보면서 개연성과 리얼리즘을 논하며 극적인 재미가 없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꿈속의 우리는 그 개연성 없는 내러티브에 빠져 두려움에 떨기도 하고 슬픔에 겨워 울기도 한다. 누구도 꿈을 극의 구조로 이해하고 분석하지 않는다. 오히려 꿈속의 미분화된 상징들을 개인의 내밀한 욕망과 무의식의 일부로 파악할 때 우리는 우리들 자신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신화는 인류가 꾸는 꿈이다. 그 속에는 먼 시간의 저편에서 손짓하는 인류의 내밀한 사고와 욕망이 담겨있다. 그 상징을 이해할 때 우리는 인간을 이해하게 되고 인간을 이해할 때 우리들 자신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아더왕의 신화는 그리스신화보다 더 오래된 인류의 원형의식을 보여준다. 여신이 세계를 지배하던 시절, 로고스가 제우스라는 이름으로, 야훼라는 이름으로 여신을 몰아내기 이전의 시절, 어둠 속에서 빛나는 달의 시대에 인류가 꾸었던 꿈들이 소박한 내러티브 내에 반짝이고 있다.



5. 우리 모두는 성배를 찾아야 한다.


<길가메시>는 모든 사람의 서사시다 - 마크 헤드슬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매일 매일 똑같은 행위를 반복할 뿐 진정한 삶의 의미는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끔 이런 의문이 고개를 들곤 한다. 그러나 바쁜 일상사는 그런 생각을 붙잡고 있을 여유를 베풀지 않는다. '옷 속의 가시 같은‘ 의문을 묻어둔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한다. 마음속의 가시는 꿈속으로 스며들고 언젠가는 우리 곁을 찾아올지도 모른다. 아더왕과 그의 기사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궁정생활을 즐길 때 먼 마법의 나라에서 온 여인은 외친다. 그대들은 그저 밥만 먹으며 흥청거리는 게으름뱅이라고. 그녀의 나라에는 모험이 기다리고 있는데 왜 떠나지 않느냐고. 그 여인, 혹은 여신은 우리들 마음 깊은 곳에 가려진 비밀이 우리를 부르기 위해 보낸 사자인 것이다.


삶이 의미 없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모험을 향해 떠나야 한다. 실제의 여행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비밀을 찾는 모험의 여행을 말이다. 아더왕이 찾던 성배와 길가메시가 찾던 불사의 비밀은 우리의 존재 깊숙이 숨겨져 있는 비밀의 상징이다. 사회가 혹은 외부의 권력이 삶에 강제한 가치와 의미들이 아니라 각자의 가슴 속 깊숙이 새겨진 생의 의미를 찾을 때 우리들의 생은 불멸의 것이 된다. 육체적 생은 끝날지라도 우리가 삶의 무대에 아로새긴 의미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브리튼의 숲이 아닐지라도 모험은 존재하고 존재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시작될 수 있다. 지저분하고 어지러운 내방에서, 사무실의 컴퓨터 앞에서도 우리는 모험여행을 시작할 수 있다. 진정으로 비밀을 알기를 원하는 자에게 언제든지 여신은 자신의 사자를 보낸다.


그 부름을 인식하여 존재의 비밀을 찾아 모험을 떠나고 싶다면 우리는 경험자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각자의 모험은 개별적인 것이지만 이미 모험을 끝낸 이들이 상징을 통해 남겨둔 지도하나쯤을 간직한다면 뜻밖의 상황에서 도움을 받을지도 모른다. 먼 옛날 브리튼 숲에서 있었던 일, 아니 그 보다 더 먼 옛날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살았던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기억해 두자.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인 것이다. 우리 모두가 길가메시이고 오시리스와 호루스이며 아더왕의 기사들이니까.


<아발론 연대기>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현대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인 셈이다. 한권의 책에 담을 수 있는 가장 많은 비밀과 의미를 담아둔 훌륭한 편력의 참고서. 생의 모험을 시작하고 싶은 사람에게 브리튼 숲은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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