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Omer Z. 리반엘리 지음, 고영범 옮김 / 가쎄(GASSE)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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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인생을 관망 하기란 힘이 덜 드는 행위다. 반면에, 한 사람의 삶을 누르는 매서운 무게와 불가항력의 문제 중심에서 그와 동행 하기란 ‘힘듦’을 가뿐히 넘어선다. 우리는 그가 느끼는 모든 고통과 절망 그리고 눈물과 한 숨 속에 들러붙은 불안을 피부로 숨 쉬듯 느낄 수 있어야 하며, 공감하는 동시에 그가 걸어가는 길 그 시선에서 같은 곳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을 보다 쉽게 풀어 쓴다면, 그런 일 혹은 행위는 그렇게 간단히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서두에 말했듯 오히려 우리는 ‘양심’의 한 쪽 눈을 감고 ‘관망’하는 쪽에서 그 어떤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고 ‘아는 척’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관망’이란, 또 다른 ‘폭력’이다. 그리고 그 ‘관망’은 ‘값 싼 동정’이다. 물론 ‘동정’에 ‘값’이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동정’에 ‘값’이란 표현을 덧붙인 이유는, 그 ‘행위’가 부당하고 폭력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O. Z. 리반엘리’는 작중 화자인 ‘이브라힘’을 통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동정심이란 날카로운 검과 같은 것이다.
동정을 베푸는 사람은 그 손잡이를 안전하게 붙들고 있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상처를 남긴다.
베푸는 사람의 손은 받는 사람의 손 위에 놓인다고
예언자께서는 말씀하시지 않았던가?”(p.211)

[줄거리]
터키 이스탄불에서 신문사 기자로 활동하는 ‘이브라힘’은 회의실에서 ‘자극적인 사건’으로 기사를 준비하는 동료로 부터 미국 잭슨빌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 사건은 ‘인종차별주의자, 반무슬림 깡패들에게 칼에 찔려 치명상을 입은 터키인 후세인 일마에 대한 이야기’ 였다. 이브라힘은 그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후세인 일마’란 이름에서 기억 속 어딘가로 상념이 향하면서 ‘혹시’하는 실마리로 이어졌다. 그렇다. 동료 기자로 부터 듣게 된 ‘후세인 일마’는 터키 남동부에 위치한 고향 ‘마르딘’(MARDiN)에서 유년시절을 함께한 ‘후세인 일마’ 였던 것이다. 기억에서 잊혀진 고향 ‘마르딘’과 친구 ‘후세인’의 추억이 ‘이브라힘’을 붙잡았고, 이내 ‘이브라힘’은 무엇에 홀린듯 이스탄불에서 고향 마르딘으로 향한다. 오로지 ‘후세인’의 ‘죽음’과 관련된 이면의 이야기를 알기 위해. 그렇게 시작된 이브라힘의 여정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놀라운 아니, 미처 자신은 깨닫지 못했거나 외면했던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데...


[감상평]
책 ‘제목’이  『불안』인 이유는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을 반영하기에 매우 합당하다. 소설 속 배경은 터키 ‘마르딘’을 넘어 중동 전체를 향한다. 그리고 다시 시선은 ‘시리아 난민’의 문제로 우리를 이끈다. ‘시리아 난민’문제는 오랜 세월  켜켜이 쌓인 중동의 ‘불안’이다. ‘중동’을 둘러싼 다양한 문제(전쟁, 정치, 종교, 석유 등등)는 단순히 그들만의 이야기를 넘어선다. 결코, ‘그들만의 이야기로 시작된 문제’가 아니다. 중동은 주변 ‘유럽’과 ‘미국’이라는 거대하고 막강한 ‘세력’에 둘러 쌓이면서 끝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 결과로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된 이들은 아무 힘 없고 지극히 연약한 사람들이 받는다. 그들은 ‘종교’로 부터 시작해, 정치적 폭력에 희생 당한다. 그 중에서도 ‘종교’의 영역은 어떤 ‘명분’보다 막강하다.

‘종교’를 앞세운 폭력에는 ‘대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는 언제나 ‘진리’라는 거대한 담론의 옷을 입고, ‘우리편' 아니면 ‘적’으로, 이미 결론 난 이야기 속으로 모든 것을 흡입한다. 마치 우주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공간’의 왜곡과 파급력 만큼이나 ‘종교’의 폭력은 존엄한 인간의 모든 것을 집어 삼킨다. 그 뒤에 남는 것은 생명력 잃은 한 줌의 흙인 육체 뿐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 육체도 산산조각 난다.

그래서일까? 주인공 ‘이브라힘’의 시선으로 죽은 ‘후세인’의 발길을 추척하며 만나는 다양한 ‘현실’은 모든 문장 사이사이에서 ‘절망과 고통 그리고 불안’을 품고 있다. 미래가 보장된 의사 후세인이 ‘난민 캠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그의 삶 기저에는 단순한 ‘공포’를 뛰어넘는 극도의 불안과 절망을 짊어지는 것을 주저 하지 않았다. 한 개인이 해결 할 수 없는 뒤 엉킨 실 타래 틈 사이사이를 후세인은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무엇’을 향해 생명을 다하길 멈추지 않았다.

소설 『불안』의 중심에는 몇 년 전, 세상을 충격과 공포로 빠트린 ISIS을 고발한다. 표면적인 그들의 ‘종교적 열심’(신앙)은 말 그대로 매우 표면적인 ‘명분’에 불과하다. 그들은 ‘종교’라는 가면을 쓰고 자신들의 모든 ‘욕망’과 ‘폭력’을 정당화 한다. 비단 ISIS 뿐이랴? 중동에서 일어나고 사라진 무수한 무장 단체를 비롯해서 세계 곳곳에는 그처럼 하나의 ‘신념’을 명분삼아 모든 악행에 정당성을 부여해왔다. 그 오래전 ‘십자군 전쟁’도 그러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모든 ‘전쟁’ 이면에 ‘종교’의 옷을 입은 ‘신념’의 잔인한 폭력성은 줄곳 멈추지 않았다. 어쩌면 바로 그러한 ‘종교의 잔인한 폭력성’ 이면에 인간이 느끼는 극도의 공포가 ‘불안’ 아닐까? 무장 단체로부터 연원 하는 ‘불안’은 사회 곳곳을 긴장하게 만들고, 그러한 긴장 속에서 사회적 약자는 누구보다도 강력한 ‘불안’에 움추러 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폭력 만큼이나 국가와 집단을 강력하게 위축 시키는 행위는 없다.

바로 그 ‘불안’이 싹트고, 무겁게 내려 앉은 자리에 정반대의 현실에 거주하는 이들의 손길이 가진 외면된 맥락을 ‘리반엘리’는 고민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 ‘손길’을 ‘사랑’이라고, ‘섬김’이라고 이야기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그것을 받는 이들의 시선과 입장에서는 ‘동정’일 수 있다. 당연히 ‘손길’을 제공하는 이들은 그것을 ‘동정’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그것이 ‘동정’임을 자각 한다면, 자신들의 행동이 어디서부터 잘 못 인지를 돌아볼 것이다. 하지만 ‘불안’의 현장을 찾는 많은 이들의 마음에는 그런 ‘자각’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간접적으로 우리는 이 책을 손에 집어 들고 읽기를 시작한 동시에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까지 생각 해야 한다. 혹 내 안에 아무도 모르게 숨어있는 ‘동정’을 지울 수 있게 해달라고. 나의 시선이 행위가 ‘폭력’에 가담하지 않을 수 있도록 이끌어 달라고 기도 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 책을 펼쳐 읽기를 시작한 후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까지, ‘종교’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고 멈추지 않았다. ‘신앙’이라는 행위안에 내포된 우리의 사고는 때로는 매우 순수하게 여겨진다. 때때로 그 순수는 단순한 순수를 넘어 순결이라는 자리까지 내달리기를 유혹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신앙의 순수와 순결’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과연 어디까지 우리의 ‘행위’에 ‘순수’와 ‘순결’이라는 이름표의 의미가 온전해 질 수 있을까? 를 고민하게 됐다.

우리나라도 ‘난민’문제에서 더이상 외면하지 말아야 하는 현실을 마주했다. 보다 적극적이고 신중하며 정의와 공의가 세워지는 결단이 팔요한 시대를 살아간다. 우리도 과거에는 ‘난민’이였다. 그리고 언제든 우리 삶이 ‘난민’이 될 수 있단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그것은 대단하지도 거대 한 것은 아니어도 괜찮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요청한것은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35)다. 과연 ‘사랑’은 무엇인지, 오늘도 고민하며 발 걸음을 옮긴다.

끝으로, 『불안』 읽기에 도움이 될 만한 책으로 『IS는 왜?』(한상용/최재훈, 서해문집, 2016)를 추천한다. 이 책은 중동 전문 기자들에게 듣는 ‘IS 심층 분석’에 해당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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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올해의 책은 <공부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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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루는 것은 도덕이 아니라 신앙이며, 신앙의 중심에 있는 것은 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여기서 기독교 윤리는 다른 모든 윤리와의 모든 가능한 관계를 끊는다.˝

자끄 엘륄, <원함과 행함>,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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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함과 행함>을 앞에 두고 자끄 엘륄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도록 한다. 지금까지 `윤리`혹은 `도덕`이라 여기던 기본적 생각의 방향에서 상당부분 타협적이고 나름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옹호하고 있는 모습이 있다는 사실앞으로 데려간다.

엘륄은 단호히 말한다. 이 곳은 절벽(세상의 도덕)이며, 이 절벽을 극복하는 방법은 절벽임을 자각하고 `예수 그리스도`(선의 본체이신 하나님)께로 회귀하여 발길을 돌려 기쁨과 감사와 감당하기 힘겨울 만큼의 환희 가운데 성도로 달려가야 한다고. 그렇지 않다면 `선`을 이룰 수 있다는 헛된 망상으로 인하여 이 절벽이 마치 `절벽`이 아니라는 회유에 설복되어 떨어질 뿐이라고...말이다..

그가 말하는 이곳은 `절벽`이라는 말이 상당히 급진적이고 강력한 어투로 보여질지도 모르겠다...

ps. 바로 위 문장은 본인이 읽으며 느낀 것을 나름의 방식으로 서술 했을 뿐, 그의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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