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말하는 ‘중년의 꼰대’는 바로 ‘견디는’ 자세가 극적으로 인격화된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회사에서 상사의 욕설을 견디고, 부하의 막말을 참고, 클라이언트의 안하무인도 참고, 만원 전철을 타야 하는 장거리 출퇴근을 참고, 무뚝뚝한 아내의 얼굴을 참고, 아이들의 침묵이 주는 경멸을 참고, 거액의 대출금을 참고, 닳아버린 양복 팔꿈치를 참고, 치질의 고통을 참고……. 


이렇게 온몸이 인내로 둘러싸인 이들이 ‘중년의 꼰대’라는 존재입니다. ‘불쾌함을 견디는 나’를 ‘그릇이 큰 사람’이라고 착각하면 그때부터 ‘꼰대가 되는 길’은 탄탄대로입니다. 그런 사람은 불쾌한 인간관계만을 계속 선택하게 됩니다.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아마도 상당히 일찍부터) 불쾌한 인간관계를 견디고 있는 자신을 ‘허용’했든가, 아니면 ‘자랑스러워’했든가, 어쨌든 ‘인정’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불쾌함을 견디는’ 것을 자신의 그릇이 크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지표 또는 인간적 성숙의 증거라는 식으로 합리화해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는 비극적입니다. 꼰대가 집에만 오면 항상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가족들은 웃다가도 얼굴이 굳어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불쾌한 인간관계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왜 자신의 주변에는 재수 없는 사람들밖에 없는지 한탄하며 가끔 홧김에 술잔을 꺾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꼰대’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별이나 연령과는 무관하게 ‘불쾌한 인간관계를 견디는’ 스스로를 한 번이라도 합리화하고 그런 방식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 사람은 이후의 삶에서 반복적으로 불쾌한 인간관계를 견디는 방식을 선택하게 됩니다.



지칠 때 솔직하게 “아, 너무 힘들다”라고 말하고 적절히 넘길 줄 아는 것은 살아가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태도입니다. 지친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아프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지겹다는 것은 활동적이라는 증명입니다. 


그러나 ‘한 단계 위의 자신’ 혹은 ‘불쾌함을 견디는 자신’  에 도취되어 있으면 몸과 마음이 비명을 지를 만큼 아파도 좀처럼 쉬지 못합니다. 지쳐서 멈춰 서기라도 하면 나약한 자신을 탓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에도, 정신에도, 가혹한 일입니다.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화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능성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가능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능성을 소중히 아껴야 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강하지만 약합니다. 노력할 수 있지만 노력 한 만큼 지칩니다. 무리해서 미리 당겨쓴 에너지는 훗날 반드 시 갚아야 할 때가 옵니다. 이 당연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듯합니다. 조금 더 유연하고 자유로운 내가 되기 위해 우선 어깨에 힘을 조금 빼봅시다. 몸의 센서를 켜고 신체 감수성을 높이는 겁니다. 불쾌한 인간관계를 피하고 예의와 매뉴얼로 내 몸을 지킵니다. 이렇듯 별것 아닌 일로 행복해지는 것은 하나의 능력입니다.




"힘만 조금 뺐을 뿐인데

다른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의 대표 지성이 들려주는

유연하고 자유로운 인생을 위한 

몸과 마음의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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