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산업자본가의 탄생
산업 자본가의 출현은 차지 농업가의 경우처럼 점진적 과정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물론 길드의 장인들, 나아가, 자립적 소규모 수공업자들, 심지어 임금 노동자들까지도 소규모 자본가로 변모하였다. 이들은 임금 노동 착취를 확대하고, 자본 축적을 강화하며 본격적인 자본가로 전환하였다.
중세 도시의 초기 단계에서 도주한 농노들 중 누가 주인이 되고, 누가 하인이 될지는 대체로 그들의 도주 시점으로부터 결정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자본주의적 초기 단계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처럼 달팽이 걸음과 같은 느린 발전으로는, 15세기 말 대발견이 창출한 새로운 세계 시장의 상업적 요구를 충족할 수 없었다. 한편, 중세는 두 가지 독특한 자본 형태를 물려주었다. 그것은 다양한 경제적 사회 구성체에서 발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 시대 이전에도, 이미 자본으로 기능하던 고리대 자본과 상인 자본이다.
‘현재 사회의 모든 부는 먼저 자본가의 수중에 귀속된다. 그는 지주에게 지대를, 노동자에게 임금을, 그리고 조세와 십일조 징수자에게 그들의 요구액을 지불한다. 그리고 연간 노동 생산물의 대부분, 아니 그 최대 부분이면서 끊임없이 증가하는 부분을 자기 몫으로 남긴다. 자본가는 이제 사회 전체 부의 최초 소유자로 간주된다. 비록 이 소유권을 부여한 법률은 없으나, 이러한 소유상의 변화는 자본에 대한 이자 수취로부터 비롯된다. 유럽 전체의 입법자들이 고리대금업을 법률로 방지하려 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나라의 전체 부에 대한 자본가의 권력은 소유권의 완전한 혁명인데, 이와 같은 혁명은 어떤 법령 또는 어떤 일련의 법령으로부터 수행되었는가.’
호지스킨,『자연적 소유권과 인위적 소유권의 대비, 98-99.』는 이 혁명이 결코 법률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답했어야 한다.
농촌의 봉건 제도와 도시의 길드 제도는 고리대 자본 및 상업 자본에서 조성된 화폐 자본이 산업 자본으로 전환하는 일을 가로막았다. 이러한 속박들은 봉건적 가신단의 해체와 농촌 주민의 수탈 및 추방으로부터 제거되었다.
새로운 공장제 수공업은 해안 항구 또는 (옛 도시와 길드의 통제권 밖에 있는) 농촌 지역에 건설되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공업 배양지들을 반대하는 자치 도시들의 치열한 투쟁이 일어났다.
아메리카에서 금과 은의 발견, 원주민의 섬멸, 노예화, 광산 생매장, 동인도 정복 및 약탈 개시, 아프리카가 상업적 흑인 수렵장으로 전환된 일 등은 자본주의적 생산 시대의 새벽을 알리는 요소였다. 이러한 목가적인 과정들은 시초 축적의 주요한 계기들이다. 그 뒤를 이어, 지구를 무대로 유럽 국민들의 무역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은 스페인에 대한 네덜란드의 저항으로 개시되었고, 잉글랜드의 자코뱅 반대 전쟁에서 거대한 규모에 달했으며, 현재까지도 중국에 대한 아편 전쟁 등으로 계속되고 있다.
시초 축적의 상이한 요소들은 대체적인 연대기에 따라 특히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잉글랜드에 분배된다. 잉글랜드에서는 이 상이한 요소들이 17세기 말에 식민 제도, 국채 제도, 근대적 조세 제도, 보호 무역 제도 등을 포함하며 체계적으로 통합되었다. 이러한 방법들은 부분적으로는 잔인한 폭력에 의존하는데, 예컨대, 식민 제도가 그러하다. 그러나 이 모든 방법들은 봉건적 생산 양식을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온실 속에서처럼 촉진해 그 과도기를 단축시키기 위해, 사회의 집중되고 조직된 힘인 국가 권력을 이용한다. 힘은 낡은 사회가 새로운 사회를 잉태하고 있을 때, 조산사 역할을 한다. 힘 그 자체가 하나의 경제적 능력이다.
기독교를 전문으로 다루는 하위트는『식민과 기독교』에서 기독교적 식민 제도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른바 기독교 인종이 정복할 수 있었던 세계 도처에서, 그리고 모든 주민들에게 가한 야만 행위와 잔인한 행위는 어떤 역사적 시기에도 그 유례가 없었으며, 아무리 난폭하고, 몽매하며, 무정하고, 파렴치한 인종이라도 그것을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17세기 최고의 자본주의국이었던 네덜란드의 식민지 경영사는 ‘배신, 매수, 학살, 비열의 유례없는 광경’을 보여준다. 네덜란드인들이 자바섬에서 사용할 노예를 확보하기 위해 셀레베스섬에서 실행한 인간 약탈 제도만큼 특징적인 점은 없다.
이를 위해, 특별히 인간 도둑들이 훈련되었다. 도둑, 통역, 판매인이 이 거래의 주된 담당자였으며, 토착 군주가 주요 판매인 역할을 하였다. 훔쳐온 젊은이들은 노예 선박으로 운반될 수 있을 만큼 성장할 때까지, 셀레베스섬의 비밀 감옥에 숨겨졌다. 한 공식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가령, 마카사르라는 이 도시는 비밀 감옥들로 가득 차 있다. 그중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더 무서운데, 거기에는 가족으로부터 강제로 분리되어 쇠사슬에 얽매인, 탐욕과 포악의 희생자인 가엾은 인간들로 가득 차 있다.’
말라카를 손에 넣기 위해 네덜란드인들은 포르투갈 총독을 매수하였다. 1641년, 총독은 네덜란드인들의 시내 진입을 허가하였다. 그들은 곧바로 총독의 집으로 달려가 그를 학살하였는데, 이는 약속한 매수 금액인 21,875파운드의 지불을 ‘절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황폐화되고 인구는 감소하였다. 자바섬의 한 지방인 바뉴완기는 1750년에는 주민 수가 80,000명 이상이었는데, 1811년에는 8,000명에 불과하였다. 이것이 바로 평화로운 상업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영국의 동인도 회사는 인도의 정치적 지배 외에도 차 무역과 중국 무역 전반, 그리고 유럽을 왕래하는 화물 수송의 배타적 독점권을 소유하였다. 나아가, 인도 연안 상업, 섬들 사이의 상업, 인도 내륙 상업은 이 회사의 고급 직원들이 독점하였다. 소금, 아편, 후추 및 기타 상품에 대한 독점은 부의 한없이 큰 원천이었다. 회사 직원들이 가격을 설정하고, 인도 사람들을 마음대로 약탈했다. 총독까지도 이러한 사적 거래에 가담하였다. 그의 총애를 받은 이들은 연금술보다 더 교묘하게 무(無)로부터 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계약을 체결하였다. 거액의 재산이 우후죽순처럼 하룻밤 사이에 불어났으며, 시초 축적은 한 푼의 투자도 없이 진행되었다. 워렌 헤이스팅스의 재판은 이러한 실례들로 가득하다. 그 중 한 예는 다음과 같다.
설리반이라는 인물은 아편 생산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인도의 한 지방으로 공무를 떠나려던 순간, 아편 납품 계약을 따냈다. 설리반은 그 계약을 40,000파운드에 빈이라는 사람에게 팔았고, 빈은 그것을 같은 날, 60,000파운드에 다시 되팔았다. 이 계약을 마지막으로 구매해 수행한 사람은 그렇게 하고도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의회에 제출된 한 문서에 따르면, 동인도 회사와 그 직원들은 1757년부터 1766년까지 인도인들로부터 600만 파운드의 선물을 받았다. 1769년부터 1770년까지 영국인들은 쌀을 전부 사재기하고, 그것을 엄청나게 높은 가격이 아니면 다시 팔지 않으면서 인위적으로 기근을 만들어냈다.
원주민에 대한 가장 횡포한 취급은, 물론 서인도와 같이 전적으로 수출 무역을 위해 설립된 재식 농장(플랜테이션 농장)들에서 발생하였다. 또한 멕시코, 동인도와 같이 약탈의 대상으로 내맡겨진 부유하고 인구가 조밀한 나라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진정한 식민지들에서도 시초 축적의 기독교적 성격은 명백히 드러났다. 신교의 엄격한 주창자인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1703년 그들 의회의 결의에 따라 인디언의 머리 가죽 1장 또는 포로 1명에 대해 40파운드의 상금을 걸었다. 1722년에는 머리 가죽 1장당 상금이 100파운드로 증가하였다. 1744년 메사추세츠만 지역이 특정 종족을 반란자로 선언한 뒤에는, 다음과 같은 가격을 책정하였다.
12세 이상 남자의 머리 가죽은 새 통화 100파운드, 남자 포로는 105파운드, 여자나 아동 포로는 55파운드, 여자나 아동 머리 가죽은 50파운드였다. 수십 년 뒤, 식민 제도는 그사이에 본국(영국)에 반기를 들게 된 경건한 청교도의 자손들에게 복수하였다. 이 자손들은 영국인의 매수와 사주 아래 인디언의 도끼에 찍혀 죽었다. 영국 의회는 경찰견과 머리 가죽 벗기기를 ‘신과 자연이 자기들에게 부여한 수단’이라고 선언하기까지 하였다.
식민 제도는 무역과 항해를 급격히 발전시켰다. ‘독점 회사’는 자본 집적의 강력한 지렛대 역할을 하였다. 식민지는 싹트는 공장제 수공업에 판매 시장을 보장해 주었고, 이 시장의 독점은 축적을 더욱 강화하였다. 유럽 밖에서 직접적 약탈, 토착민 노예화, 살인 강도로 획득한 재물은 본국으로 흘러 들어와 거기서 자본으로 전환되었다. 식민 제도를 가장 먼저 발전시킨 네덜란드는 1648년에 이미 상업적 위력의 정점에 도달하였다.
‘이 나라(네덜란드)는 동인도 무역과 유럽의 동남부와 서북부 사이의 교역을 거의 독차지하고 있었다. 이 나라의 어업, 항해, 공장제 수공업은 다른 모든 나라를 능가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 공화국의 자본은 나머지 유럽의 모든 자본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귈리히는 다음과 같이 부언하기를 잊었는데, 네덜란드 인민은 1648년까지 유럽의 다른 모든 인민들을 합한 것보다 더 과도한 노동을 하고 있었고, 더 빈곤했으며, 더 참혹한 억압을 당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오늘날에는 산업적 패권이 상업적 패권을 수반한다. 이와는 달리, 진정한 공장제 수공업 시기에는 상업적 패권이 산업상의 우세를 보장해 주었다. 이 때문에 식민 제도가 당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식민 제도는 ‘낯선 신’이었다. 이 신은 유럽의 옛 신들과 나란히 제단에 앉아 있다가, 어느 날 그 신들을 모두 한꺼번에 때려 엎어버리고, 치부가 인류 궁극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중세에 이미 제노바와 베네치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공공 신용 제도, 곧 국채 제도는 공장제 수공업 시기에 유럽 전체로 확산되었다. 식민 제도는 이에 수반되는 해상 무역 및 무역 전쟁과 더불어 국채 제도를 발달시킨 온실이엇다. 그래서 국채 제도는 먼저 네덜란드에서 확립되었다. 전제 국가이든 입헌 국가이든 공화제 국가이든, 국가를 매각하는 국채는 자본주의 시대를 특징짓는다. 이른바 국부 중 현실적으로 근대적 인민 전체가 소유하는 유일한 부분이 바로 국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민이 국채를 많이 가질수록 그 인민은 부유하게 된다는 근대적 학설이 나오게 된다. 공공 신용은 자본이 굳게 믿는 신념이 된다. 그래서 국채의 성립과 함께 결코 용서할 수 없는 큰 죄는 성령에 대한 모독이 아니라 국채에 대한 불신이다.
공채는 시초 축적의 가장 강력한 지렛대 중 하나이다. 공채는 마술 지팡이처럼 비생산적 화폐에 증식의 힘을 부여하고, 이를 자본으로 전환시킨다. 이때 이 화폐는 산업에 투하하거나 심지어 고리대금업에 투하할 때 반드시 수반되는 위험과 번잡을 전혀 겪을 필요가 없다. 국가의 채권자들은 현실적으로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대부한 금액은 쉽게 양도할 수 있는 공채 증서로 전환되며, 이것은 현금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수중에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렇게 파생된 놀고먹는 금리 생활자 계급, 정부와 국민 사이의 중개인 역할을 하는 금융업자들, 그리고 온갖 국채의 상당 부분을 하늘에서 떨어진 자본으로 이용하는 징세 청부인, 상인, 사적 공장주들의 일확천금의 부는 제외하고도, 국채는 주식회사, 온갖 종류의 유가 증권 거래와 투기업, 한마디로, 증권 투기와 근대적 은행 지배를 발생시켰다.
‘국립’이라는 칭호로 장식된 대은행들은, 그 출생 첫날부터 정부를 원조하여 받은 특권 때문에 정부에 화폐를 대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적 투기업자들의 연합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런 은행들의 자산이 계속 증가하는 것은 국채 누적의 가장 확실한 척도가 되며, 이와 같은 은행들의 전면적 발전은, 1694년 잉글랜드 은행(BOE)의 창립으로부터 시작된다.
BOE는 자기의 화폐(자기 자본)를 8%의 이자로 정부에 대부하는 것으로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와 동시에, 이 은행은 화폐를 주조할 수 있는 권한을 의회로부터 받으면서 자기 자본을 은행권의 형태로 다시 한번 국민에게 대부하였다. BOE는 이 은행권을 가지고 어음을 할인하고, 상품 담보로 대부하며, 귀금속을 매입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은행 자체가 만들어낸 신용 화폐(BOE 은행권)는 유통 수단으로 기능하게 되었으며, BOE는 이 은행권으로 국가에 대부하였고, 국가를 대신해 공채 이자를 지불하였다. 이 은행은 한 손으로는 주면서도, 다른 손으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이 되받았을 뿐 아니라, 되받으면서도, 은행은 자기가 빌려준 최후의 한 푼에 이르기까지 국민에 대한 영원한 채권자로 남아 있었다.
이 은행은 점차 영국의 퇴장 귀금속의 없어서는 안 될 보관 창고로 되었으며, 전체 상업 신용의 무게 중심이 되었다. (잉글랜드에서는 마녀에 대한 화형을 중단하자마자 은행권 위조자의 교수형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은행 귀족, 금융업자, 금리 생활자, 중개인, 주식 투기업자, 증권 거래업자들의 일당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당시의 저술들, 예컨대, 볼링브로크의 저술이 명확히 보여준다.
국채와 더불어 세계 신용 제도가 생겨났는데, 이것은 여러 국민의 시초 축적을 은폐한 원천 중 하나였다. 일례로, 베네치아의 추악한 강탈 제도가 낳은 각종 악행들(샤일록이 보여주듯이)은 몰락하고 있던 베네치아로부터 거액의 화폐를 빌린 네덜란드에게는 풍부한 자본의 비밀 원천 중 하나였다. 이러한 관계는 네덜란드와 잉글랜드 사이에서도 확인된다.
훨씬 뒤처지게 되자, 네덜란드는 더 이상 압도적인 상공업국이 아니었다. 따라서 1701년부터 1776년까지 네덜란드의 주요 사업 중 하나는 방대한 자본의 대부 업무였으며, 특히 자국의 강력한 경쟁국인 잉글랜드에 대한 대부 업무가 두드러졌다. 동일한 현상이 현재 잉글랜드와 미국 사이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오늘날 미국에 나타나고 있는 출처 불명의 많은 자본은 어제 잉글랜드에서 자본으로 전환된 아동들의 피이다.
국채는 국가 세입에 근거하며, 이 세입으로 해마다 이자 지불 등을 충당해야 하므로, 근대적 조세 제도는 국채 제도의 필수적인 보완물이다. 국채는 정부의 임시 지출을 납세자가 당장 그 부담을 느끼지 않는 방식으로 조달할 수 있게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세금 인상을 피할 수 없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 차례로 계약된 국채 누적이 유발하는 세금 증가로 인해, 정부는 새로운 임시 지출이 발생할 때마다 끊임없이 새로운 국채를 발행해야만 한다. 그래서 가장 필수적인 생활 수단에 대한 과세 (따라서 이것의 가격 등귀)를 그 축으로 하는 근대적 조세 제도는 그 자체 안에 조세의 자동적인 점진적 증대의 싹을 품고 있다.
과중한 과세는 우연이 아닌, 오히려 과세 원칙이다. 그러므로 근대적 재정이 최초로 시작된 네덜란드에서 위대한 애국자 드 위트는 자신의『네덜란드 국가의 정치적 격언』(1669)으로부터 조세 제도를 임금 노동자들을 순종, 절욕, 근면하게 하며 과도한 노동을 하게 만드는 가장 좋은 제도라고 찬양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근대적 재정이 임금 노동자의 상태에 미친 파괴적 영향보다는, 이 제도가 농민, 수공업자 등 하층 중간 계급의 모든 구성원을 폭력적으로 수탈한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없다. 이 제도의 수탈적 효과는 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보호 무역 제도로 인해 더욱 강화되었다.
공채와 이에 상응하는 재정 제도가 부의 자본화와 대중의 수탈에서 수행한 막대한 역할로 인해, 코베트나 더블데이와 같은 저술가들은 부당하게도 근대 인민 빈곤의 주된 원인을 여기에서 찾게 되었다.
보호 무역 제도는 제조업자를 육성하고, 독립적 노동자를 수탈하며, 인민의 생산 수단과 생활 수단을 자본화하고, 낡은 생산 방식이 근대적 생산 방식으로 이행하는 것을 폭력적으로 단축시키기 위한 인위적 수단이었다.
유럽 국가들은 이 발명의 특허를 얻고자 서로 경쟁하였으며, 잉여 가치 추구자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간접적으로는 보호 관세로부터, 그리고 직접적으로는 수출 장려금으로부터 자국 인민을 약탈하였다. 그뿐 아니라, 유럽 국가들은 주변 종속국의 모든 산업을 폭력적으로 전멸시켰는데, 예를 들어, 잉글랜드는 아일랜드의 양모 공장제 수공업을 전멸시켰다.
유럽 대륙에서는 이 과정이 콜베르(J. B. Colbert, 1619-1683: 루이 14세의 재정 담당관으로 중상주의 정책을 실시)의 선례를 따라 더욱 단순화되었다. 여기서는 산업의 시초 자본 일부가 국고에서 직접 유입되었다. H. 미라보는『프로이센 왕국에 대해. 제6권: 101.』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7년 전쟁(1756-1763년) 이전에 작센의 공업이 번영한 원인을 무엇 때문에 그렇게 먼 곳에서 찾으려 하는가. 군주가 빌린 1억 8,000만의 국채에 눈을 돌리기만 하면 그만인데!’
식민 제도, 국채, 무거운 세금, 보호 무역 제도, 무역 전쟁 따위는 진정한 공장제 수공업 시기에는 새싹에 불과했지만, 대규모 공업의 유년기에는 거대하게 번창하였다. 대규모 공업의 탄생은 헤롯왕이 행한 것과 같은 대대적인 아동 살해로부터 축복을 받는다. 영국 해군처럼, 공장들도 강제 징집으로 신병을 보충하였다.
이든은 15세기 마지막 1/3부터 자신의 시대인 18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농촌 주민으로부터 토지를 수탈한 참혹성에 대해서는 매우 냉담하였다. 그는 자본주의적 농업과 ‘경작지와 목장 사이의 올바른 비율’을 확립하는 데 ‘필수적’이었던, 토지 수탈 과정을 큰 만족감을 가지고 경축하였다. 그러나 그는 공장제 수공업적 생산을 공장제 생산으로 전환시키며 자본과 노동력 사이에 올바른 비율을 설정하기 위해 아동을 훔치고 노예화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앞서와 같은 부르주아 경제학적 식견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영 성과를 높이기 위해 빈민 아동들을 오둠막집과 구빈원에서 훔쳐내어 교대제와 야간 노동으로 혹사시키며 휴식도 없이 일하게 하는 공업, 게다가 나이와 성향이 서로 다른 수많은 남녀를 한곳에 몰아넣으면서 방탕과 음란에 감염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공업이 개인적 · 국민적 행복을 총체적으로 증가시킬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는 아마도 국민의 관심사가 될 만하다.’
필든은『공장 제도의 저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더비셔, 노팅엄셔, 특히 랭커셔에서는 최근에 발명된 기계가 물레 바퀴를 돌릴 수 있는 하천가의 큰 공장들에서 사용되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는 수천 명의 일손이 갑자기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인구가 희박했으며 토지가 척박했던 랭커셔에서는 무엇보다도 사람 손이 요구되었다. 아동들의 민첩한 작은 손가락이 특히 필요했다. 즉시 런던, 버밍엄, 기타 교구 구빈원에서 도제(!)를 모집하는 관습이 생겼고, 7세부터 13-14세까지 의지할 곳 없는 수천 명의 아동들이 북부로 수송되었다. 고용주 (곧 아동 도둑)가 자기 도제를 입히고, 먹이고, 공장 가까이 도제 수용소에 묵게 하는 것이 상례로 되었다. 그들의 노동을 감독하기 위해 감시인이 배치되었다. 이 감시인의 급료는 아동들로부터 짜낸 생산량에 비례했기 때문에, 아동들을 될수록 더 많이 노동시키는 것이 그들에게 이익이 되었다. 그 결과, 당연히 학대가 심했다. 많은 공장 지대들, 특히 랭커셔에서 공장주의 손아귀에 맡겨진 이러한 천진하고, 고독한 아동들은 천인공노할 학대를 당하였다. 그들은 과도한 노동에 죽도록 시달렸고, 채찍으로 맞았으며, 쇠사슬에 얽매였고, 매우 교활한 학대로 고통을 받았다. 굶주림으로 피골이 상접한 그들은 채찍으로 노동을 강요당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때로는 자살에 이르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대중의 눈에서 멀리 떨어진 더비셔, 노팅엄셔, 랭커셔의 아름답고 낭만적인 산골짜기는 고문과 살인의 음산한 장소로 변하였다. 공장주들의 이윤은 막대한 것이었으나, 이는 그들의 탐욕에 불을 지폈을 뿐이다. 그들은 야간 노동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곧 그들은 주간 노동으로 피로에 쓰러진 직공들 한 조를 교체하기 위해, 야간 노동을 위한 다른 조의 직공들을 준비하였다. 주간 조는 야간 조가 방금 빠져나간 침대로 기어들어갔으며, 반대로, 야간 조는 주간 조가 빠져나간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침대가 식을 사이가 없었다고 랭커셔 사람들은 전한다.’
공장제 수공업 시기에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발전함에 따라 유럽의 사회 여론은 수치와 양심이라는 최후의 흔적마저 잃어버렸다. 여러 나라들은 어떤 치욕스러운 짓이라도 일단 그것이 자본 축적의 수단이 되기만 하면 그것을 파렴치하게 자랑하였다. 예컨대, 속물인 A. 앤더슨의 소박한『상업 연대기』를 읽어 보라. 거기에는 종래 잉글랜드가 흑인 무역을 아프리카와 영령(英領) 서인도 사이에서만 했는데, 이제는 아프리카와 스페인령 아메리카 사이에서도 해도 좋다는 특권을 유트레히트 평화 조약 체결 시 아시엔토 협약으로 스페인으로부터 강탈한 사실을 잉글랜드 정책의 승리라고 떠들어대고 있다.
잉글랜드는 1743년에 이르기까지 매년 4,800명의 흑인을 스페인령 아메리카에 공급할 권리를 얻었다. 이것은 동시에 잉글랜드의 노예 밀수 무역을 은폐하려는 공식적 시도였다. 리버풀은 노예 무역으로부터 크게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노예 무역은 이 도시 시초 축적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리버풀의 ‘명성’은 여전히 노예 무역의 성공에 있으며, 이 노예 무역은, 애이킨의 저서에 따르면,
‘리버풀의 상업을 특징짓고, 그 상업을 현재의 번영 상태로까지 끌고 온 용감한 모험 정신에 부합했으며, 또한 노예 무역은 해군과 선원에게 큰 고용 기회를 창출했고, 영국 공산품에 큰 수요를 창출했다.’
리버풀 노예 무역 선박 수
1730년: 15척
1751년: 53척
1760년: 74척
1770년: 96척
1792년: 132척
면공업은 잉글랜드에 아동 노예 제도를 도입하였고, 미국에서는 종래 대체로 가부장제적 노예 제도를 상업적 착취 제도로 전환시키는 자극제가 되었다. 사실상 유럽의 임금 노동자라는 은폐된 노예 제도는 신대륙의 노골적인 노예 제도를 자기 발판으로 삼아야만 그 죄악이 덜 두드러져 보일 형편이었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영원한 자연 법칙’이 자유롭게 작용하고, 노동자와 노동 수단 사이의 분리를 완성하며, 한쪽 끝에서는 사회의 생산 수단과 생활 수단을 자본으로 전환시키고, 다른 쪽 끝에서는 인민 대중을 임금 노동자, 곧 자유로운 ‘노동 빈민’ (이는 근대사의 인위적인 산물)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위에서 말한 모든 수고가 필요했다.’
화폐가, 오지에,『공공 신용, 265.』의 말대로, ‘한쪽 볼에 핏자국을 띠고, 이 세상에 나온다.’고 한다면, 자본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이 세상에 나온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