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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앙드레 드 리쇼 지음, 이재형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Oh I'll be the one who'll break my heart
I'll be the one to hold the gun
I know more than I knew before
I didn't rest I didn't stop
Did we fight or did we talk
Oh I'll be the one who'll break my heart
I'll be the one to hold the gun
I love you more
I don't know what I knew before
But now I know I wanna win the war
No one likes to take a test
Sometimes you know more is less
Put your weight against the door
Kick drum on the basement floor
Stranded in a fog of words
Loved him like a winter bird
On my head the water pours
Gulf stream through the open door
Fly away
Fly away to what you want to make
I feel it all, I feel it all
The wings are wide, the wings are wide
Wild card inside, wild card inside
Oh I'll be the one to break my heart
I'll be the one who'll break my heart
I'll be the one who'll break my heart
I'll end it thought you started it
The truth lies
The truth lied
And lies divide
-fist, I feel it all.
고통을 읽을 때는 두 개의 선율이 떠올랐다. 파이스트의 맑은 가사와 피아졸라의 어떤 멜로디. 다 떠나가도 무언가 남아있을 거라고, 나를 파괴할 수 있는 자는 나밖에 없다고 말하는 그녀의 밝고 경쾌한 목소리. 그러나 다 떠나가면 무슨 소용인가. 라고 그림자를 바라보는 듯한 피아졸라의 눈빛. 고통은 그런 책이다. 어두운 방, 테이블 위에 놓아둔 책의 모서리가 역광에 꽤 날카로워 보인다.
어찌할 수 없을 때. 내 손으로 나의 굳은 어깨를 쓰다듬어야 할 때. 무심결에 창밖을 보았는데 바람에 흔들리는 전깃줄이 위태로워 보일 때. 저 선이 끊어지면 어떤 일이 생길까. 내 횡격막이 놀라 딸꾹질을 할 때처럼 사람들이 딸꾹질 할까. 문 닫은 카페의 고양이와 개들은 어디로 갔을까. 내가 버린 내 속의 마음은 어떻게 웅크리고 있을까.
어느 날 양로원에 들어가 있었는데 세상에, 자신의 부고를 신문에서 접했단다. (아마도 격분하여) '나는 죽지 않았다' 라는 자전 에세이를 발표했다. 프랑수아 모리앜, 앙드레 지드, 장 콕토가 그의 친구였고 전직 고등학교 철학교사였다. '고통'은 그의 첫 소설. 사회적 금기를 깨지 않았다면 첫 소설에 수여하는 프리 뒤 프리미에 로을 탔겠건만 자극적이고 파격적인 묘사와 주제로 수상에서 제외되었다. 전시 상황에서 프랑스인 여자와 독일군 남자의 육체관계라는 설정 때문이라지만, 나는 이 이야기가 2012년 8월 파리 좌안 어느 주택가의 옆집 남녀였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금기는 상대를 가리지 않는 것.
두 사람의 피는 숲 속 오솔길에서 사냥꾼에게 쫓기는 한 마리 짐승처럼 동맥 속을 흘러다녔다. 어두운 숲과도 같은 육신은 살갗에서부터 모든 사람에게 닫혀 있어 오직 사랑만이 뚫고 들어가 빛을 밝힐 수 있었다.-23페이지
저물녘 조용히 앉아 저녁 기도를 올리며 잠자기 전의 키스를 잊지 않는 어머니. 아버지의 사진을 어루만지는 어머니. 조용조용히 인사를 나누고 조금씩 마을 사람들과 비슷해져 어느 날 그들과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를 어머니. 세계의 모든 것이 한 존재를 중심으로 돌아갈 때, 그 존재가 대다수 사람들이 택한 것일 때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모범적이라고 부른다. 앙드레 드 리쇼의 이 이야기는 첫 장만 읽어도 그 전체를 알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이 이야기를 알고 있다. 아이 엠 러브의 엠마, 안나 카레리나, 보바리 부인, 같은 사람 아닌가. 우리는 단지 이 존재가 어떻게 몰락해가는지 테레즈의 그 길을 지켜볼 뿐인다. 타이타닉이 빙산에 걸려 자멸한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나 무게를 줄이기 위해 구명정을 덜 실었다면 인명피해는 덜했을지도 모른다. 세계기록 경신을 위해 최단 루트를 택하지 않았더라도 빙산은 아예 만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때로는 빙산을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을 자각할 수 없는, 레 미제라블.
어떤 사랑이든 자기 마음을 인정하느라 보내는 최초의 시간은 축복받은 시간이다. 특히 자신의 감정을 헤아리는 데 그다지 익숙하지 못한 존재들에게는.-84 페이지
여인의 파우더 브러시 끝이 살짝 그 여자의 얼굴을 스친 다음이라 해서 공기 중에 파우더 가루가 남아있지 않은 것은 아닌데, 사람들은 종종 그것을 잊는다. 그 속을 떠다니는 감각적인 공기는 어찌할 것인가. 독일군 장교가 그녀에게 남긴 포도는 어찌할 것인가. 그 흐르는 과육을 입안에서 혀로 느끼지도 않고 어머니와 아들은 서로를 공기 중에 멀겋게 내버려둔다. 포도는 그 사이 그 과육을 잃고 만다. 혀끝에서 맴돌았어야 할 과육이 자멸하는 것은 정해진 순서였다. 타인의 살결을 만질 때 그 살결은 손끝에서 생명을 새롭게 얻는다. 피부가 육화되는 것. 이것이 사랑의 순서가 아니던가. 공간을 허용하는 일. 의미를 만드는 일. 그리하여 좁혀지는 거리. 사람들이 뒷말하는 것은 모른척 한다. 알든 모르든 그것이 중요하기나 한 일인가. 이미 가진 것을 잃을 수는 없는 노릇. 그러나 서로에게 서로가 유일했던 어머니와 아들은 점차 다른 촉각을 감지한다. 생체기가 나았고 다른 멍이 들었다. 바람이 불 때 아마 무심히 머리카락을 넘겼을 어머니가 고개를 뒤로 젖혔을 것이다. 소년의 우주는 어머니의 블랙홀이었다.
갖가지 수단을 써서 아들의 영혼을 휘어잡았던 그녀는 이제 경건한 마음으로 자기 양심에게 묻고 있었다. 외로움으로 고통받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조르제가 그런 고통을 맛보기도 원치 않았던 것이다.-55페이지
열린 문은 닫혀야 하고 닫힌 문은 열어야 한다. 창문을 반쯤만 연다는 것은 소용이 없다. 향수 냄새. 손끝을 스칠 때 느끼던 촉각. 모자를 벗을 때 흔들리는 표정. 치맛자락을 쥐고 사뿐 걸을 때 테레즈의 발걸음. 아이가 잠들 때까지 기다릴 때 어둠이 내리는 그 느리디느린 속도. 확인해야만 할 때의 가쁜 숨소리.
앙드레 드 리쇼는 '다 알고 있잖아?' 라고 능청스레 말하듯 이 타올랐다가 한순간에 더 맹렬해지는 감정과 육체를 밤의 책에서 펼쳐낸다. 그것은 때로는 탐스러운 포도처럼 도발적이고, 집에 쓰인 욕설처럼 수치스럽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질 듯 절망스럽기까지 하다. 마을 사람들의 자명한 웃음. 빵집 주인의 친절하지 않은 친절한 인사. 다를 것이 없다는 데에서 나오는 패배주의적 동료애. 다 같이 겪는 불행은 불행이 아니라는 듯한 시궁창 같은 행복. 어깨동무하고 싶지 않았던 여자. 테레즈 들롱브르는 남편이 전사한 후 어린 아들 조르제와 함께 마을에 이사온 여자였을 뿐이다. 여느 사람과 다르지 않았고 여느 사람과 같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죄가 있었다면 그것은 독일군 오토와 밤마다 만난 것이 아니라 그 남자와 만나고 싶었던 마음을 드러냈다는 데에 있다. 무언가에서 벗어나는 방법의 하나는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가벼운 죄의식을 느꼈지만 그것은 아들에 대해서였지 남편의 추억에 대해서는 아니었다. 오토와 사랑을 나누고 나서 누워있던 처음 몇 밤 그녀는 감미로운 고통을 느끼며 생각했다. '넌 지금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거야.'-114페이지
애착의 대상이었던 아들이 오토로 옮겨간 다음, 오토가 떠난다 해서 다시 그 대상이 아들일 수가 있을까. 그것은 꼭 돌을 끓여 녹이겠다는 생각과도 같다. 한 번도 가지지 못한 사랑은 금방 피어나지만, 이미 시들었던 대상에의 집착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이미 사그라져 무덤덤한 무엇을 다시 의미있는 어떤 존재로 싹 틔우기는 불가능할뿐더러 테레즈는 그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 생각. 고민. 궁금함. 답답함. 갑갑함. 그녀는 과거를 파고들고 아이는 미래에 몸서리친다. 이것은 모자 관계가 아닌 두 세계의 충돌이다. 충돌할 때의 그 모습은 테레즈가 볼 수 있는 자신의 가장 밑바닥의 모습. 진짜 두려운 것은 집에 누가 써둔 욕설이 아닌, 다른 사람 같은 자신을 만나게 되는 일. 차마 거기까지, 그 밑바닥까지는 내려갈 수 없다고 무의식중에 테레즈가 하는 생각이 '넌 지금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거야'라는 부분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거기까지 내려가 보고 싶은 유혹, 몸을 있는 대로 숙이고 땅을 파고 들어가 깊숙한 그곳에 도달했을 때 그녀가 만난 것은, 자기 자신을 끌어당기면서도 끔찍한 어떤 존재였을 것이다. 결국, 스스로가 자신을 파괴하는 사람이 된 다음 남는 것이 무엇인지는 그녀 스스로만이 알 수 있어서, 남에게 쉬이 말해줄 수 없을 것이다.
단숨에 읽어내려가야 그 구조가 더 잔인하게 드러나는 책. 독일군, 프랑스 여인, 포도밭, 어둠, 촛불, 피난민 소녀. 어머니의 연인. 이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 틈은 독자가 그의 눈으로 메꾸어야 할 부분들이다. 집필 당시 민감한 주제였으나 이제는 덜 민감해진 설정, 어머니와 아이가 서로 대하는 시선,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의 기민함(나는 마지막의 그 결말이 차라리 그녀 자신도 몰랐던 그녀의 밑바닥 기민함에서 나왔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이 틈새는 읽는 이만이 채울 수 있는 부분. 앙드레 드 리쇼는 독자의 자리를 겸손하게 비워두는 작가다. 카뮈를 창작으로 이끌기도 한 작품.
처음 들어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훌륭한 책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내가 경험해서 아는 것들, 즉 어머니라든가 가난이라든가 아름다운 저녁 하늘이라든가 하는 것들에 대해 처음으로 나에게 이야기해준 책이다. 습관대로 하룻밤새 그 책을 다 읽었다. 다음날 잠에서 깨었을 때, 낯설고 새로운 자유를 가슴에 안고 나는 머뭇거리며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책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망각과 심심파적만이 아니라는 교훈을 터득한 것이다. 나의 집요한 침묵, 정체를 알 수 없는 고통, 그리고 기묘한 이 세상, 내 가족의 고결함과 가난, 나만 알고 있는 비밀 등, 이 모든 것이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었다. '고통'이라는 책으로부터 나는, 지드가 장차 나를 유인하여 끌어들이게 될 창작의 세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막연하게나마 우선 엿볼 수 있었다.-카뮈
책장을 덮었을 때에는 체념하듯 눈을 감았고 이런 선율이 감은 눈을 채웠다.
괜찮다. 그 바닥은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란다. 라고 말하듯.
그래서 괜찮지가 않았다.
제목은 '너와 함께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너 없이 살 수도 없다'라는 뜻의 프랑스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