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한 아름다움
심상정 지음 / 레디앙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자전소설이란 이름으로 픽션이 논픽션으로 둔갑해 팔리던 시절이 있었다. 소설의 시대에 실화란 다소 구질구질해 보였을 법도 하고 신뢰가 안 갔을 수도 있다. 당신은 그렇게 스스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그게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 게 뭐냐, 당신의 성공담을 일면식도 없는 내가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나. 그런데 재밌게도 이게 소설이 되면 묘하게 따뜻한 이야기가 되고, ‘이게 작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거래’라는 입소문이 붙어 ‘감동 실화소설’로 격상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근래 들어 소설이라는 이복동생일랑 제 놀던 물에서 맘껏 놀게 두고 온전한 자전들이 출판되고 있다. 납득될 만한 단서가 있어야만 하는 소설식 개연성과는 반대로 현실이란 건 사실 온갖 우연이 남발되는 장소가 아닌가. 드라마보다 드라마 같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우연은 삶의 오묘함에 감탄하게 만든다. 세상이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 너머 영적인 섭리에 의해 이루어지는지도 모른다는 경외심마저 갖게 만든다.

소설이 주는 감동이 단순한 재미에 불과하다고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시고기』 속의 아버지가, 전신마비 아들을 실은 휠체어를 밀고 보스톤 마라톤을 완주하는 호이트 부자에 관한 실화만큼 감동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실화를 읽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거기, 성공이든 실패든 나 역시 예외는 아닐 거라는 실감에 있을 것이다.

책 속의 인물이 이건희가 아니라 심상정이라면 더욱 그렇지 않을까. 그 삶의 뒤에는 소설보다 더 소설적인 이야기가 숨어 있을 거라는 기대가 들 수밖에 없다. 자서전이나 평전도 근본적으로 책인 까닭에, 이렇게 살았더니 돈이 제 발로 찾아오더라는 따분한 자기자랑, 사실은 애비 유산 자랑 따위와는 본질적으로 기대치가 다를 수밖에 없다.

『당당한 아름다움』은 심상정이 쓴 심상정 이야기다. 따라서 평전은 아니다. 그러면 자서전인가? 의당 그래야만 하는데, 이 책은 자서전도 아니다. 이 책은 의정활동보고서 혹은 전직 국회의원의 낙선사례다. 지난 4년간 국회의원 심상정은 이렇게나 노력했고 그 결과 이처럼 대단한 실적을 쌓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선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유권자여 이 보고서를 읽고 4년 후에 올바른 판단하시길. 심상정이라는 아이템으로 이 정도의 책밖에 되지 못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출판 기획자의 역량과 감각 탓이다. 인간 심상정을 볼 수 있었던 큰 기회였는데 아쉽게 됐다.

자서전의 형식을 빌린 평전인데다, 구성 방식 또한 심상정이란 인물보다는 박정희에게나 어울릴 신화화 일변도다. 평전 속 간디는 지독한 싸움꾼이고 그의 갈등은 인도의 역사와 인류의 정신사를 뒤바꿀 갈림길이지만, 자서전 속 간디는 지독히 무능한 인간이고 그의 갈등은 책을 접어 던져 버리고 싶을 만큼 읽는 이를 짜증나게 만든다. 그런데 이 인물이 마하트마-위대한 영혼이란 칭송을 받게 되고 실제로도 위대해져 가되, 위대한 동시에 바보스럽다. 평전 속 밥 딜런은 시대의 대변자고 뒤틀린 시대를 또 한 번 비트는 재주 있는 시인이지만, 자서전 속 밥 딜런은 시대의 대변자이고 싶지도 않고 대변한 적도 없으며 신문을 보다가 이상한 사건이 있으면 가사를 쓰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면 그들은 정말로 사람들의 평과는 무관한 사람이냐, 절대로 그렇지 않다.

심상정의 자전에 대한 기대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정책을 입안하고 현 시대의 문제를 나열하고 다음 선거를 대비하는 내용을 원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대단해요, 하는 사회 각계 인사의 칭송을 바란 게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 종잇장들이 이재오의 의정활동보고서라든가 정동영의 낙선사례라면 예사롭게 지나치거나 예사롭지 않게 집어 던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사롭지 않다. 단지 심상정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렇다. 그녀는 권위가 있기는커녕 세상의 온갖 권위와 맞서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대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권위를 주고 자신을 그 권위를 지키는 파수꾼이라 자처하게 만든다.

대선 참패 후 민주노동당은 대선 패배의 책임 추궁과 당 혁신을 위해 비상대책위를 구성하고 그녀를 위원장으로 추대한다. 선거가 목전인 때에, 지금쯤이면 지역구로 내려가 유권자를 만나야 할 때에 그녀에게 달가운 일일 수 없다. 그녀는 먼저 당을 수습하기로 한다. 그러나 끝내 분당. 아무런 성과 없이 지역구로 내려 온 그녀에게 다시 아버지의 부고라는 시련이 다가온다. 당선하는 거 보실 때까지 살아 주십사 약속했었다. 당선하고 찾아오라 말씀하시던 아버지였다. 심상정이라는 이름에 기대를 걸고 찾아 든 자원봉사자들이 그녀의 빈자리를 메운다. 점차 줄어드는 격차, 필요한 건 시간이다.

선호도, 이미지, 그런 건 애시 당초 상대가 안 됐다. ‘빨갱이 데모꾼’들이 모인 당이라 하더라도 심상정이란 이름만은 믿을 수 있지 않나. 하지만 그녀의 당선에 가장 큰 걸림돌은 애석하게도 유권자다. 그들이 원하는 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안정된 잠자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 공전의 아파트값 폭등으로 몇 해 전 이웃 마을 사람들이 한 몫 챙겨 갈 때 생겨난 복통을 치료하는 일이다. 그녀의 공약엔 애석하게도 뉴타운이 빠져 있다. 사람들이 찾고 있는 것은 뉴타운 세 글자다.

그녀는 졌다. 루쉰이 입을 빌려 그녀는 다음을 기약한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녀의 확성기가 되는 날을 기다리며 그녀는 지금 지역공동체로 내려가 있다.

이 얼마나 눈시울 찍어 내려야 하는 이야기인가. 그렇더라도 이 책은 지루한 부분이 많다. 안 읽어도 그만인 서론, 비슷한 본론, 판박이 결론으로 이어지는 ‘내가 아는 심상정’과 같은 콘텐츠는 이 책을 이도저도 아닌 것으로 만든다. ‘이것은 모두가 지지해 주신 국민 여러분의 성원’ 투의 문장이 난립하면서 당원 홍보지를 읽고 있었나 착각하게도 만든다. 하지만 읽어야 한다. 스포츠채널에서 두고두고 방영하는 ‘감동의 그 순간’이 〈우생순〉의 감동을 능가하듯, 심상정에게 걸어볼 수 있는 희망은 이 책을 능가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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