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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른다는 착각 - 팽창하는 우주를 아우르는 어떤 방향성
요시다 노부오 지음, 김정환 옮김, 강형구 감수 / 문학수첩 / 2025년 8월
평점 :
<영화 인터스텔라를 재미있게 보고, 애니메이션 시달소에 나오는 타임워프를 한번이라도 꿈꿔봤다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과학 책>
과학, 특히 물리에 대해서는 관련 지식도 관심도 없는 사람이지만 '시간은 흐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게 느껴져 읽게 되었다. 영화 <테넷>을 수십번을 봐도 아직까지 이해는 커녕 나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하는 친구의 화만 불러일으키는 사람으로서 딱히 재미를 기대하진 않았는데, 나의 예상을 뒤엎고 생각보다 더 흥미롭고 재미있는 책이었다. 물론 100% 이해는 어렵지만, 나같은 사람도 이해시키려는 저자의 노력이 느껴지는 책이다.
시간을 설명하기 위해 우주의 탄생을 비롯해서 생명의 역사, 인간의 기억 등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이런 내용들이 특히 재미있다. 그리고 양자... 역학과 같이 어려운 내용이 나오기도 하는데 저자가 아주 친절하게 '어려운 내용이니 넘겨도 된다'고 말해준다. 덕분에 설명을 위해서는 필요한 내용이지만 굳이 읽지 않아도 되는 어려운 내용들은 저자의 말을 믿고 편하게 넘겨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총 5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장이 끝나면 'SF 작품에 묘사된 시간'이라는 소설, 애니메이션, 게임 등 다양한 SF 작품에 묘사된 시간여행 장치나 시간 왜곡 설정 등에 대해 살펴보는 파트가 등장한다. 그리고 각 장 중간중간에 보충 설명이나 해당 장에서 소개한 과학자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는 칼럼 파트도 있다.
'SF 작품에 묘사된 시간'에서는 영화 <인터스텔라>나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등 익숙한 작품을 예시로 들고있다. 타임머신, 워프, 웜홀 등 SF에 자주 등장하는 설정에 대해 과학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몹시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음! 하지만... SF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다 읽고 나서 상처를 받거나 크게 실망을 할 수도 있다. 워프나 웜홀 같은 것들이 현실에서 불가능한 이유를 요목조목 과학적으로 따지기 때문... SF 팬들의 상상력과 희망을 아주 박살내서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적어도 웜홀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과학자들은 SF를 있는 그대로 재미있게 즐길 수 없다고 생각하면 쌤통이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우주에서 지적 생명이 번영하는 시대가 생각보다 짧다는 것이 놀라웠고, 인간에게 과거의 기억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한 내용이 인상깊었다.
기억은 뉴런이 구성하는 네트워크에 각인되어 있고, 감각기관 등에서 온 신호에 맞춰서 뉴런과 뉴런의 접속이 변화함에 따라 기억이 형성된다. 여기서 접속을 변화시키려면 에너지가 필요하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은 태양에서 날아온 빛을 흡수한 고에너지 분자를 통해서 그 에너지를 흡수한다. 그런데 태양같은 항성은 우주의 시작이 빅뱅이라는 질서 정연한 고에너지 상태였기에 탄생한 것이다. 시간축에서 빅뱅과 가까운 쪽에서 형성된 항성은 빅뱅으로부터 멀어지는 방향으로 향하며, 주위에 에너지를 빛의 형태로 퍼뜨린다. 이 에너지의 흐름을 이용해서 기억을 형성하고 있기에 어떤 순간에 접속할 수 있는 기억은 전부 시간축에서 빅뱅과 가까운 쪽, 즉 과거의 정보로 한정된다.
미래는 아직 없고 과거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과거만 기억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우리는 우주에 존재하는 한, 과거의 기억만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에 과거만이 존재한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우주에 대해 알게 될수록 인간이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저자는 '우주가 터무니없이 거대하기에 '덤'같은 사건 속에서 생명이 꿈틀댈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우주가 물리법칙에 따라 파괴되어 가는 가운데 동반된 사소한 부수 과정에서 생명과 인간이 탄생한 거라니. 우주가 없으면 인간이 없다는 게 당연한 말이지만, 막상 '덤'이라는 말을 들으니 인간이 얼마나 우주에서 작고 하찮은 존재인지 새삼 느껴졌다.
끝없는 우주와 우주에선 먼지보다 작은 인간의 존재를 떠올리면 괜히 허무해지거나 공허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저자도 이런 마음을 아는 건지, '우주에 비하면 인간은 압도적으로 충실한 존재'라고 표현한다. 우주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은 '현재'가 지니는 의미가 전혀 다르며, 우주의 역사에서 모든 시간은 동등하지만 인간에게는 각각의 시간에 뚜렷한 격차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무너져 가는 우주의 가장 화려한 순간에 작지만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우주와 시간 혹은 자신의 삶과 죽음에 관해서 무언가를 알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저자의 말은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우주를 떠올리면서 한없이 허무해지다가도 '충실한 존재'라는 말 한 마디에 다시 정신이 차려진다.
'시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뿐만 아니라 우주의 탄생과 생명의 탄생, 진화까지 폭넓게 과학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은 시간이었다. 어려운 내용이지만 독자가 흥미를 잃지 않게 계속해서 끌고 가는 힘이 있는 책이다! 시간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SF 작품에 묘사된 시간' 한 부분만이라도 읽어보길 추천! 자연스레 다른 내용이 궁금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