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독하는 정독을 위해서는 조용한 개인적 공간이 필요하며, 홀로 그 공간에서 부동자세를 취해야 한다. 인류가 처음부터 책을 읽을 만한 집중력과 오랫동안 부동자세로 있을 수 있는 인내력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닐 터이다. 그래서 높은 집중력과 훈련을 요하는 이런 자세는 역사적으로 발전해온 것이 틀림없다. 또한, 근대인들은 어려서부터 가정과 학교, 도서관과 같은 ‘근대적’ 공간에서 책 읽는 자세를 집단적으로 훈련한다. 부모와 선생이 행하는 이 훈련에 적응하지 못하면, ‘주의산만한’ ‘열등생’이나 ‘지진아’가 된다. -136쪽
대중은 묵독을 위한 신체훈련과 비슷한 훈련을 연극과 영화 보기를 통해서도 새롭게 경험한다. 1890년대와 1900년대 활성화되었던 토론공간을 대체하며 등장한 극장과 영화상영관은 공공의 공간인 동시에 고립된 개인의 공간이다. 이 공간의 문화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각적 체험을 근간으로 했다. 서구적인 근대극장의 관객은 익명의 다른 개인들과 함께 동일한 체험을 공유하되, 객석의 개별 시선들을 하나로 모으는 수렴점으로서의 무대나 스크린을 쳐다보게 된다. 타인과의 대화나 교류는 중단되고, 부동자세로 한 곳만을 집중하여 응시해야 한다. -140쪽
인간들이 이 정도의 지식을 갖지 못했던 시절, 사람들은 누구나 똑같이 그런 무지의 늪에 빠져있다는 사실로 자신을 위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솔랑카는 이 순간에도 어딘가의 누군가는 솔랑카 자신이 영원히 알지 못할 일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더구나 그렇게 이미 알려진 그 일들은 지극히 중요해서 반드시 알아둬야 할 것들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는 바보들이 흔히 느끼는 그 무지근한 노여움, 그 느릿느릿한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마치 수벌이나 일개미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채플린과 프리츠 랑의 오래된 영화에서 비실비실 돌아다니는 수천 명 중의 하나, 높은 곳에 올라앉은 지식이 권력을 휘두르며 군림할 때, 그 밑에서 힘없이 살다가 언젠가는 사회의 톱니바퀴에 휘말려 으스러지고 말 운명을 가진 그 얼굴 없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105-6쪽
극단적인 육체적 아름다움은 모든 빛을 끌어모아 이 캄캄한 세사을 밝혀주는 찬란한 등대가 된다. 저렇게 자비로운 불꽃을 바라볼 수 있거늘 그 누가 주변의 어둠 속을 들여다보랴? 저렇게 눈부신 광채가 나타났거늘 굳이 말하고 먹고 자고 일할 이유가 또 무엇이랴? 자신의 하찮은 인생이 끝나는 그날까지 그저 그 빛만 바라보고 있어도 좋지 않으랴?-143쪽
그래, 말은 행위가 아니다. 솔랑카는 초조하게 걸음을 옮기며 그렇게 인정했다. 그러나 또한 말은 곧 행위가 될 수도 있다.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장소에서 내뱉은 말은 산을 움직이거나 세상을 바꿔놓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옳거니,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는 것 - 즉 어떤 행동과 그것을 정의하는 말을 분리시키는 것 - 요즘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변명이 되는 듯싶다. ‘진심이 아니었다‘고 말함으로써 자기가 저지른 악행의 의미를 지워버릴 수 있다. -151-2쪽
죽은 세 여자와 그들의 살아 있는 자매들은 일찍이 엘리너가 정의했던 데스데모나의 의미에 딱 들어맞는 존재였다. 그들은 소유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저 바깥에는 흉악한 오셀로가 배회하고 있다. 다만, 이 오셀로의 목적은 자신이 소유할 수 없는 것을 파괴해버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그 소유 불가능성 자체가 자신의 명예를 모독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희곡 "오셀로"4ㅢ 이 Y2K판 리바이벌에서 그가 여자들을 죽이는 이유는 그들의 부정 때문이 아니라 무관심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단순히 그런 여자들도 얼마든지 망가뜨릴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을 망가뜨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인간다움이 없음을 폭로하기 위해서, 그들의 인형다움을 폭로하기 위해서 말이다. 왜냐하면 그 여자들은 - 그렇다! - 인조인간이기 때문이다. 현대판 인형들, 기계화되어 컴퓨터로 움직이는 인형들. -166쪽
글쎄요, 어쩌면 제가 특권증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는 건지도 모르죠.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인지도 모르구요. "강박충동." "로프." 아시겠죠? ‘왜 그런 짓을 하지?‘ ‘우린 할 수 있으니까.‘ 그놈들은 자기가 황제라는 걸 증명하고 싶은 거죠. 자기들이야말로 우월하고 위대한 존재, 거룩한 존재, 말하자면 신과 같은 존재라는 걸 말예요. 법도 자기들은 건드릴 수 없다 이거죠. -333쪽
그러나 현실에서의 사랑을 이루기 위하여 무엇보다, 돈이 필요했다. 학교 앞 문방구에는 빳빳하게 투명 코팅된 컬러 사진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이중에 이선희를 선택하든 허재를 선택하든, 어쨌든, 너는 백 원의 동전을 지불해야만 했다. 재화는 한정되어 있고, 선택의 폭은 넓었다. 허재인가, 이선희인가. 결정하지 못하고 너는 늘 쭈뼛댔다. 그때 너는 몰랐다. 제 안의 욕망을 냉랭하게 응시하는 일이야말로 지상에서 가장 어렵고 고통스럽다는 사실을.-171쪽
물론 혁명은 순수하지 않았다. 혁명의 과정은 매 순간 자신의 행위가 옳은지 질문해야 할 만큼 혼란스럽게 진행되었다. 그의 내면은 고뇌와 허무감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동시대의 다른 지식인과 달랐다. 상처 입은 영혼을 견고한 육체 속에 가두고, 지금 당장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끊임없이 찾아냈다. 백군과 연합할 때조차, 외국 세력과 손잡을 때조차, 그의 영혼에선 음모와 타협의 더러운 악취가 나지 않았다.-183쪽
지치지 않고 주도면밀하게 혁명을 향해 나아가는 전사로서의 삶, 이것이야말로 싸빈코프라는 이름이 짊어지고 가야 할 공식적인 삶이었다. 대신 그의 입으로 직접 말할 수 없는 혼돈과 모호함과 좌절과 냉소는 롭쉰이라는 이름으로 비공식적으로 공존했다. -183쪽
나는 승리를 믿고 있는가? 후방에서는 무지와 뇌물과 도둑질이 판을 친다. 날 때부터 눈이 먼 쥐새끼들. 전선에서는 무지와 용맹과 약탈이 위세를 떨친다. 적들을 그대로 닮은 분신. 나는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 두렵다. 우리가 반대방향으로 날뛸까 두렵다. 우리는 그렇게 날뛰게 될 것이다. 탐욕에 눈이 먼 어두운 마음으로 모스끄바를 사랑하고 있기에.-24쪽
1 구경하는 동물들이 빨간 끈을 끊으려는 동물의 표정을 자기도 모르게 따라하고 있다.
2 다음 페이지에서 끈 끊기를 시도할 동물이 이전 페이지 한구석에 이미 등장해서 다른 동물이 끈을 끊으려고 하는 것을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