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SF 영화보다 SF 소설을 좋아한다. SF 영화에서는 미래가 총천연색으로 묘사되는 배경이 부각되는 느낌이라면, SF 소설에서는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물들 한 명 한 명의 목소리가 보다 잘 들려오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SF라는 장르를 보고, 읽는 이유는 그것이 보여주는 신비함, 익숙한 낯섦, 그러니까 그것이 제시하는 신비로운 미래 세계에 매혹되어서가 아니다. 백년이 흐르고 이백년이 흐르도록 제 자리인 인간, 인간의 감정 혹은 한계가 사랑스럽게 서글프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이러한 서정성을 건드리는 책을 만날 수 있었다. 더구나 우리나라 여성 작가의 책이라니 더 반가웠다. 표제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포함해 책 속에 수록된 작품 하나하나가 다정하고 좋았다.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시간이 극복되고 공간이 정복되는 세계에 살면서도 점점 더 외로워지는 듯한 허전함은 이 책 속 미래의 어떤 날에도 여전했다. 그래도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 저마다의 외로움을 마음 한 켠에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가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참 따뜻하게 다가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란한 세상 을유세계문학전집 96
레이날도 아레나스 지음, 변선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완전히 다르면서도 너무나 익숙한 세계로의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다. 언어도 잘 통하지 않고 사고의 문법이 완전히 다른 미지의 공간에 던져졌다가 귀환한 느낌이랄까?

 

쿠바의 소설가 레이날도 아레나스의 작품인 이 소설은 세르반도 수사가 종교적, 정치적 탄압을 피해 멕시코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미국으로, 그리고 다시 멕시코로 돌아오는 여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세르반도 수사의 여정을 따라가며 그가 처하게 되는 당혹스러운 상황과 사건들, 그리고 그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을 다양한 각도로 - 실제로 시점이 1인칭, 2인칭, 3인칭으로 계속해서 바뀐다 - 포착하고 표현한다.

 

글을 읽다보면 내가 세르반도의 뒤를 밟아 그의 행적을 쫓는 느낌이 들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그의 옆에서 추격을 피해 함께 도망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소설속 관점과 나의 관점이 시시각각 변하는만큼 주변 세계도 정신차릴 새 없이 널뛴다. 제목 그대로 '현란한 세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사실 작품 속 세계는 현란한만큼 혼란스럽다. 지나치게 과장되고 그로테스크하게 표현되는 면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부분은 간단하게 생략되고 비약한다. 특히 수사가 감옥에 갇혀있을 때를 묘사하는 부분은 현란하다 못해 어지러울 지경이다. 

 

처음에는 소설의 이러한 표현들이 낯설고 버겁게 느껴진다. 그러나 어느 순간 소설의 흐름에 익숙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때였던 것 같다. 객관과 주관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세르반도 수사가 보고 느끼는 세계에 몰입할 수 있게 된 것은.

 

정치적 성향과 성적 취향 때문에 조국에서 배척 당해야 했던 작가의 경험이 세르반도 수사의 끊임없는 탈옥과 도주의 이야기에 녹아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정치, 사회적 배경에 따른 작품 이해보다는 한 사람이 지각하는 세계가 어디까지 늘어나고 변형될 수 있는 것인지에 초점을 맞춰서 이 소설을 읽었다.

 

"나는 오전 6시의 나무가 정오의 나무 그리고 날이 저물 때 그 무리가 우리를 위로해주는 나무와 같지 않음을 끊임없이 발견한다. 밤에 부는 바람이 아침에 부는 바람과 같을까? 해 질 녘의 수영객이 케이크를 자르듯 물살을 헤쳐 나가는 바다가 정오의 바다와 같을까? 시간이 나무나 경치에 영향을 많이 끼치는데, 가장 민감한 피조물인 우리가 그러한 표시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정반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바다처럼 잔인하다가도 부드러워지고, 이기적이면서 관용적이고, 열정적이면서 또한 사색적이고, 말수가 적다가도 많아지고, 공포스럽기도 하다가 숭고해질 때도 있다. 그래서 나는 하나의 현실이 아닌 모든 현실 또는 적어도 몇 가지 현실을 반영하고자 했다." (p.15-16)

 

서문 격인 책의 첫 장에 나오는 위 부분을 부표 삼아 작가가 펼쳐보이는 현란한 세상을 가까스로, 그러나 즐겁게 여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행 전과 후의 나는 어디인지 조금쯤 달라진 것 같기도 하다. 

 

작가의 생애, 혹은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문학 사조 프레임으로 작품을 해석하기에 앞서 하나의 만화경처럼 신비하게 펼쳐지는 소설 속 세상을 여행하듯이 읽어보면 좋겠다 싶다.

 

 

 + 국내 초역 작품인데, 앞으로 더욱 다양한 언어권의 소설들이 번역되어 출간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어쩌면 이 작품이 낯설다고 느꼈던만큼 내가 기존의 영미문학 혹은 유럽문학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던 것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립자 열린책들 세계문학 34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마디로 이 책은 충격이었다. 읽기가 매우 불편했다.

​고등학교 2학년때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으며 느꼈던 충격을 고스란히 십 년만에 다시 느끼게 된 셈인데, 흘러간 세월만큼 충격의 강도도 열 배, 아니 백 배쯤 더 컸다.

솔직히 이야기 해서, 이 책은 매우 야하고 폭력적이며 원색적인 문장들이 가득하다. 197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쳐 일어났던 물질주의 사상과 히피 문화의 실체가 성과 폭력, 변태적 욕구의 적나라한 표현을 통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중간중간 읽기를 그만두고 싶어졌던 적이 스무 번은 훨씬 넘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책의 후반부로 향해갈수록 이 책이 우리에게 반문하는 메세지가 또렷해지면서 서사의 무게감이 서술상의 표현들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읽기를 그만 둘 수 없게 되는 시점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 책은 브뤼노와 미셸이라는 이복형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들은 1960년대 히피와 물질주의 문화의 범람 한 가운데서 태어나 제각기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성장기를 거치게 된다. 동일한 시대에 태어나 비슷한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자랐지만 그들의 성향과 인생은 갈림길에서 길이 나뉘듯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형인 브뤼노는 성에 대한 편집증적인 집착을 키워가는 가운데 성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고립된 채 살아간다. 미셸은 반대로 성적 욕망이나 애정에 대한 갈망이나, 여타의 감정적 욕구를 느끼지 않는다. 그에게는 분자에 대한 연구만이 삶의 의미를 찾게 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는 두 형제의 이야기를 교체시키며, 그들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원하거나 무언가를 찾아 나서거나 혹은 무언가로부터 버림받고 소외되는 과정들을 보여준다. 둘을 따라가다보면 미로 속을 헤메이다 거대한 벽을 마주하고 서 있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 찾아 온다.

과연, 우리는, 우리 개인들은, 각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유한 존재인가?

라는 물음이 솟아오르는 것이다.

미셸은 분자와 원자 등과 관련된 생화학을 연구하는 학자인데, 이러한 문제의식이 그의 소립자에 대한 연구와 생각 등으로 빗대어 표현되고 있는 듯하다.

"그럼으로써 이제 두 개의 가설만이 남게 되었다. 하나의 가설은, 소립자의 운동을 결정하는 감추어진 속성들이 국소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소립자들은 서로 얼마만큼 떨어져 있든 간에 즉각적으로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또 하나의 가설은, 소립자들이 관측 문제와 무관하게 내재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재적인 속성을 지닌 소립자라는 개념을 포기하면, 우리는 깊디깊은 존재론적 공허 앞에 놓이게 된다."

중세시대부터 사회와 경제, 정치를 지탱해 오던 신(神) 중심적 가치체제가 붕괴하자 인간과 이성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신에게 선택받은 종족으로서 의미를 갖던 인간은 이제 세계 질서에 의미를 부여하는, 그 존재 자체가 전우주적 생태계의 최상층을 차지하는 신적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신이 약속한 구원과 영생이 퇴색하자, 인간은 생물종으로서 죽음과 직면해야 했다. 아무리 합리적 이성으로 무장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시간의 흐름에 따른 노쇠와 죽음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류의 번영과 풍요를 약속해준 물질론적 가치체제는 그 이면에 존재의 유한함이라는 무서운 진실을 품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인류는 죽음에 대한 무력감과 공포를 외면하기 위해 진보에 더욱 매달렸던 것 같다. 끊이없이 자신들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그 흐름은 각자의 사후에도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잠재우고자 했던 것이다. 1970년대 히피족, 1990년대 X 세대, 그리고 약 십년 후 또 다른 용어로 정의될 2000년대 초반의 청년들. 그들과 우리는 이전 세대보다 진보했다고, 이전 세대와는 다른 무언가를 창조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우리 개개인은 고유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현대사회는 개성을 그 어느것보다 신격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이러한 우리의 자신만만함이 오히려 우리 사고의 자기중심적 한계를 반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브뤼노를 한낱 개인으로만 바라볼 수 있을까? 그의 기관들이 썩어 가는 것은 그의 몫이다. 또한 그는 개인적으로 육체적인 쇠퇴를 겪고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쾌락주의적 인생관이나 그의 의식과 욕망을 구조화하는 역장은 그의 세대 전체에 속한다. 어떤 실험을 위해 장비를 설치하고, 하나 또는 여러 개의 관측 가능한 물리량을 서택하면, 하나의 원자 시스템에 일정한 운동-입자적인 운동이든 파동적인 운동이든-을 부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브뤼노는 한낱 개인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어떤 역사적 흐름의 수동적인 요소일 뿐이다. 동기, 욕망, 가치관 등 어떤 점에서 보더라도 그는 동시대 인들과 전혀 다를 게 없다."

​우리는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가치판단을 하고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의 사고와 움직임은 입자운동 내지는 파동운동으로 설명할 수 있는 거대한 시대 흐름의 일부일 뿐이다. 도시의 물질만능주의가 싫어 귀농을 선택하고, 자연 보호의 일환으로 채식주의를 선언하며 스스로의 자율적인 선택과 실천에 우쭐해 하지만, 사실은 귀촌이든 채식이든 또 하나의 시대적 조류일 뿐이다.

뻔하지 않으려는 뻔함, 그것이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아이러니한 굴레이다.


결국 브뤼노는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고, 미셸은 자가복제를 통해 성적 수단 없이도 종족 번식이 가능한 신(新) 인류를 창조한다. 브뤼노가 온 생애를 통해 대표했던 물질주의 세대가 저물고, 물질적 유한함을 초월한 새로운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이러한 결말을 통해 진정으로 이야기하고 싶어한 것이 과연 욕망과 유한성을 초월한 존재로서의 진보였을까?


나는 감히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 이유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브뤼노와 미셸 모두, 생의 마지막에 그저 단순한 성적 충동이 아닌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브뤼노는 자신의 보잘것 없는 육체와 병적인 욕망을 모두 껴안아 주는 여자를 만나 진정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미셸은 어린 시절 친구 아나벨을 다시 만나, 비록 사랑을 느끼지는 못 했지만, 그녀가 전 인생을 걸고 찾아 헤매었던 사랑이라는 것이 실체에 한 걸음 다가 서게 된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모두 비극으로 끝나 버린다.

얼핏보면 작가가 현대사회의 사랑의 환상을 조롱하고, 새로운 인류상을 제시함으로써 한 단계 진보한 인간을 그려내고 싶어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짜 묘미는 바로 그 트릭을 한 꺼풀 벗겨내고 그 속내를 찾아내는데에 있다.

작가는 우리가 진보해야만 하는 존재인지, 고유한 개별적 존재로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인지 우리에게 다시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가져다 주는 융합적이고 퇴행적인 상태에 빠질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보기에 이 책에서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위의 한 문장에 모두 집약되어 있다.

우리는 비록 거대한 입자 파동 속의 티끌만한 소립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랑 앞에서 진보는 커녕 더욱 유치해지고 비이성적으로 퇴보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과연, 사랑과 가정과 번식이라는 수천 년에 걸친 인류 본래의 테제가 해체된 신인류는 행복할까? 작가가 그린 새로운 인류의 새로운 시대는 작가가 우려하는 궁극의 디스토피아였는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복종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학생 시절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옆구리에 끼고 통학길을 오가며, 내가 꽤나 심오한 인생의 수수께끼 앞에 서 있다고 느꼈다.

 

"내가 계속해서 신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6.25 전쟁 직후 할머니가 세례를 받은 이후 할아버지, 증조할머니, 작은 할아버지들을 시작으로 우리 집 식구가 된 사람들은 모두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나 또한 태어나자 마자 유아 세례를 받고 거의 20년에 가까운 시간을 성실한 신자로 살아왔다.

 

그러나, 19살 겨울방학에 네팔 오지의 고아원으로 봉사활동을 떠난 나는 두 가지 이유에서 내가 믿고 있는 신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첫 번 째 이유는 가난과 질병 때문에 부모로부터 버림 받고 너무도 열악하게 살아가고 있는 고아원 아이들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아이들을 사랑하신다면서, 왜 어떤 아이들은 단지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부모에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비참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네팔 뿐만이 아니라 아프리카, 남미 등지의 극지에서 기아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운명은 대체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이러한 삶의 조건을 결정 짓는 신의 섭리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한 번 들기 시작한 의문은 하나가 채 해결되기도 전에 연이어 내 머리와 마음을 강타했다.

 

두 번 째 이유는 네팔 종교 문화의 너무도 강렬한 인상 때문이었다.

봉사 일정 끄트머리에 견학 차 힌두교 사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마침 어떤 가족이 사원 앞 강가에서 장례를 치르고 있었는데 막 시신을 화장한 듯 했다. 주황빛 두건을 머리까지 둘러 쓴 노파가 한 손으로는 손녀의 손을 꼭 쥐고 다른 손으로는 잿가루를 강 쪽으로 날려 보내고 있었다. 별 생각 없이 그 옆을 지나던 중 다 타지 못한 시신의 발바닥을 보았다. 그 순간 정수리를 벼락으로 맞는 기분이었다.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더 충격적인 것은 화장터 바로 맞은 편 강가에서는 사람들이 태연하게 빨래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국의 낯선 종교가 내뿜는 생생한 이미지와 어지러운 향내 사이에서 나는 내가 믿던 종교의 바깥 세상을, 커다랗고 무지막지한 또 다른 종교가 버티고 서 있는 세상을 엿보았다.

 

그 이후로 부모님을 따라 성당 미사에 참석하면서도 내 머릿속에서는 자꾸만 딴 생각들이 자라났다.

 

"신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가 믿는 신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신이 절대적이고 유일한 존재라면, 우리는 왜 여러가지 종교로 나뉘어서 서로 합쳐지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게 내버려 두는 신의 뜻은 무엇일까?" 등등...


바쁘고 고된 일상에 질문들은 어느새 마음 한 구석 깊은 곳에 묻혀 버렸다.

하지만 근래에 일어나는 각 지역 종교 분쟁들과 그로 인한 유혈 사태들을 바라보며 다시 슬금슬금 여러가지 생각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회사 팀장님의 추천으로 읽게 된 책이 바로 미셸 우엘벡의 [복종]이다.


줄거리를 간추려 보자면, 프랑스 대선에서 이슬람 정권이 승리하면서 교육 부문을 중심으로 이슬람화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한 교수와 지식인 세계가 직면한 갈등과 선택의 문제를 그린 이야기이다.


최근 테러를 차치하고라도도 유럽, 특히 프랑스 내에서 무슬림 세력에 대한 두려움과 사회적 갈등이 꽤 오래 전부터 계속되어 왔음을 짐작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이 책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선택의 기로에 선 교수가 결국 이슬람 체제에 복종하게 되는 이유가 집약된 뒷부분이다.

 

대선 이후 프랑스 지성인 양성소의 핵심부라고 할 수 있는 소르본 대학에 막강한 중동 자본이 유입되기 시작하고, 학교 측은 교수들에게 선택을 종용한다. 교수들은 이슬람교로 개종을 하고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교수직을 유지하든지, 종교 혹은 정치적 신념을 고수하는 대신 퇴직을 해야 하는(대신 평생 동안 여유있게 지낼 수 있는 연금과 퇴직금은 지급된다)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다.

주인공 역시 선택지를 앞에 두고 망설이는 교수 중 한명이다. 그는 위스망스라는 프랑스 소설가를 연구하는 꽤 명망 높은 중견 교수인데, 고립된 독신 생활에서 오는 고독감과 권태에 허우적 대는 인물이다. 

대선 직후 교수는 혼란스러운 파리를 떠나 프랑스 남부로 피신한다. 선택을 유보하는 대신 그는 말년에 카톨릭에 귀의했던 위스망스의 발자취를 좇는다. 아마 그도도 자신의 뿌리와 자기 확신을 종교로부터, 그가 나고 자라온 프랑스의 근간이 되었던 카톨릭으로부터 찾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결국 그가 도피 여행의 끝에 발견한 것은 위스망스도 자기도 결국 종교나 정치, 고통과 구원이라는 거대한 담론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원한 것은 단지 따뜻한 가정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며 느끼는 소시민적 행복이었던 것이다.


"위스망스의 유일한 진짜 주제는 소시민적 행복이었다. 상류층의 행복이 아닌, 독신자에게는 절망적으로 접근이 불가능한 소시민적 행복.

(...) 그의 눈에는 예술가들끼리, 혹은 친구들끼리 둘러 앉아 '적당한' 와인을 곁들여 고추냉이 소스에 포토푀를 찍어 먹는 즐거운 식사 시간이야 말로 진짜 행복을 대변하는 풍경이었다.

그러고, 창밖으로는 한겨울 돌풍이 생 쉴피스 성당탑을 때리는 가운데, 난롯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자두주 한 잔을 걸치면 그만이었다."


파리로 돌아온 그에게 학교는 즉각 답을 줄 것을 요구한다. 마지막 결정을 앞두고 고민하던 와중에 그는 학교에 남기로 선택한 동료 교수를 만난다. 동료 교수는 이슬람의 중매문화를 이용해 어리고 아리따운 새 부인을 막 맞이한 참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자신이 결국 학교에 남을 것임을 확신한다.


결국 독신의 외로운 교수가 이슬람교로 개종을 하고 교수직에 머물기로 선택한 이유는 직업적 책임감도, 학문적 열정도, 종교적 선택도 아니었다. 그를 복종하게 한 것은 가정의 안락함을 누리고 싶은 소시민적 소망, 단지 그뿐이었다.


작품 속에는 주인공을 둘러 싼 다양한 정치적 견해와 이해관계를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 어쩌면, 자신의 소시민적 행복이 처한 위협감에서 온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오늘날 일어나는 종교 갈등은 정치, 경제 문제와 첨예하게 얽혀 해결이 더욱 어려운 실정이다.

자기들끼리는 신전(神戰) 혹은 정의추구라고 외치는 구호가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은 배후에 버티고 서 있는 자본과 권력의 논리가 너무도 적나라하기 때문일까?

전쟁에서 이기는 자가 신에게 선택받은 자가 되고, 신에게 선택 받은 자가 세계의 패권을 쥐게 될 터, 대체 이 전쟁을 기획한 신은 누구인가?

 

책장을 덮으며 잠시 새로운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왜 나는 기아와 질병으로 고통받는 운명에 처할 아이들을 세상에 내 보낸 신에게 분개했는가?

지금 이 순간에도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신의 전사들은 대체 어떠한 근거로 신이 자신들에게 그러한 권리를 부여했다고 자신하는가?

 

왜 나는, 그리고 우리는 신이 인간에게 친절해야 한다고 확신하는가?


전 우주적 차원에서 볼 때 인간은 사자, 코끼리, 개미, 나무와 같이 생태계를 구성하는 작은 구성원일 뿐이다.

신에게 우리의 고통과 번뇌는 사자와 사슴이 벌이는 생존 경쟁과 하등 차이가 없을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다른 종에게는 없는 특별한 이성과 권한을 부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한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반대 편의 적들에게 우리의 신에게 복종하라고 소리를 질러대고 있다. 그러면 구원과 영광이 따를 것이라면서.

그러나 정작 세계가 펼치고 있는 이 지난한 싸움의 실체는,

신을 우리의 소시민적 행복을 위해 복종시키려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