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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영 삼국지 三國志 1
고우영 지음 / 애니북스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애니북스, 총10권+설정집. 2004년 6월 23일 화요일 기록.

오늘에야 고우영의 삼국지를 다 읽었다. 일학기 중순부터 틈틈히 짬짬히 읽었으니 대략 2달여가 걸린 셈이다.

고우영 삼국지는 내가 어렸을 적 읽었던 것을 포함하여 그 당시 우후죽순으로 태어난 출판사에서 나왔던 수많은 만화 삼국지의 원조 격이었다. 독특한 개성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그 배경으로는 조선의 변방, 만주에서 태어나 6.25를 겪으며 멀고 먼 부산까지 내려와 대한민국의 격동기를 겪었다는 그의 삶에서 배어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시리즈를 읽으면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미 많이 알려졌다시피, 정형화된 캐릭터의 재창조이다. 그는 정사 삼국지의 사실과 삼국지 연의의 허구를 바탕으로 한 역사적 사료를 사건을 중심으로 인물들의 행동에 개연성을 부여하여- 기존과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민심을 따라 행동하였다는 삼국지최고의 성인군자 유비를 야심을 감추고 능구렁이 같이 사양하며 겉으로 표시하였다는 능구렁이 유비로 표현한 것은 그중 가장 걸출한 해석이라 하겠다.

(이는 물론이고 명예욕을 지니고 관우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꼈다는 제갈량, 맹장이고 선비격이나 우직하였기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였던 관우, 세기의 간웅이자 영웅인 동시에, 자신보다 능력이 많은 사람을 시기하여 죽였던 조조, 아무런 한일이 없었으나 권모술수만으로 천하를 손에 쥐었던 동탁 등 그가 재해석한 인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또한 그가 놀리는 붓펜 하나로 그려지는 캐릭터들은, 얇게 혹은 두껍게, 부메랑 혹은 직선으로서 흑과 백으로 자신의 개성을 뚜렷이 나타내었다. 캐릭터들은 단지 역사속의 케케묵은 그림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할 때, 슬퍼할 때, 음모를 꾸밀 때, 공포를 느낄 때의 수 천가지 표정이 틀리고 수 만가지 행동이 틀리면서- 네모 칸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특히 영웅들의 일대일 마상전은 간결하고 거침이 없었다. 호쾌한 필선! 과연 그다, 하고 탄복하고 말았다. 물론 1/16칸에 중원을 그려넣는 필력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짚어볼 이 작품의 백미는 간간히 등장하는 풍자와 유머다. 뒤가 구린 처형이나 음모가 배어나는 장면에서 병사는 총과 수류탄을 든 군인으로 어느새 번쩍 탈바꿈한다. (이 작품을 그릴 당시는 군사정권이었다.) 한바탕 피보라가 몰아치면 사지가 원통이 뚝 잘라지듯, 지우개를 칼로 베듯 쑹덩쑹덩 잘리는데도 정작 당사자는 '엄마야!' 한마디 달랑하고는 끝이다. 현대적 유머가 곳곳에 배어있고, 심각해야할 장면에는 웃음이 깃든다. 발발 떨어야하는 장면은 200% 오버액션을 해준다. 이러한 계획된 웃음은 독자에게 피비린내 나는 역사속에서 한 발짝 떨어져 한숨 돌릴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실로 감사한 처사고 그 자체로 즐겁지 않을 수 없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소설로 된 삼국지를 읽지 못한 까닭에 어디가 정사이며 어디가 연의인지, 어디까지가 역사서이며 어디부터가 고우영이라는 작가가 부여한 허구인지를 알 수 없다는 점이다. 한바탕 울고 웃으며 감동을 받았지만, 원작을 바탕으로 한 재구성인만큼 고우영의 삼국지를 읽은 뒤 소설로 된 삼국지를 읽는 것은 필연지사이다.

생각하나. 어쩌면 작가 고우영은 삼국지라는, 한나라의 스러져가는 명운을 따라 나타난 그 혼돈의 시대를 갈망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 작품은 그러한 시대를 살아간 모든 생명들에 위한 정제된 오마쥬인 것은 아닐까.


긴 장편을 무사히 완결하여 읽을 수 있던 것에 기쁘다.
그리고 그만큼의 시간과 공을 들인 것만큼 충만할 수 있어서 더욱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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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노래 1
토우메 케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0년 11월
평점 :
절판


케이 토우메작, <양의 노래>를 읽었다.  

나는 왠지 이런풍을 좋아한다.
꿈적도 할 수 없는 가위 눌림같은 무거운 난제가 작품 전체를 내리누르는 것 같은 그런 상황 속에서, 정신이라고 해야할까, 의지라고 해야할까? 어쨋든 사유할 수 있는 능력만이 남아 꿈틀거리는. 필사적으로 애쓰는 움직임이 느껴지는 그런 작품.
다시 말하자면 살고 싶다,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되어보고 싶다, 라는 의지가 보이는 작품. 그러나 이 작품에는 현실이 너무나도 무겁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을 때 미적거렸던 것은.

이 작가는 낸 책의 양에 비해(내가 많이 접하지 못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뚜렷한 자기 색채를 갖고 있다. 직선의 펜체, 백색의 얼굴. 전형적인 일본 프로토 타입... 이라는 느낌? 이런 그림체는 복잡한 감정을 직선적인 언어로 그려내려고 애쓰는 등장인물들, 그리고 그런 등장인물이 투영하는 작가 케이 토우메의 의도와 잘 어우러진다.

물론 그림체가 성숙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얼굴과 저 얼굴이 같으니까. 이것도 일본 프로토라고 볼 수 있... 지는 않다. 아마추어적이지.

맞다. 이사람은 아마추어적이라고도 감히 볼 수 있다. 비단 그림체에 국한한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마인드도 그렇다는 소리다. 모두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다른 식으로 감정을 풀어내고 그것 때문에 고뇌하지만 결국은 닮은 꼴이다. 모두가 각자의 감정에 사로잡혀서 그 틀을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타인에게 의지하려 들지 않는다. 그리고 그 감정을 고집한다. 치즈나도, 카즈나도, 야에가시도, 그리고 양부모마저도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법칙'의 예외자는 미나세 뿐이다. 그는 치즈나에 의해 감정을 지배당했기 때문에 감정을 속박하려는 시도를 할 수 없는,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직접 시도할 수는 없는 감정의 거세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카시로가의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수동적 관찰자가 된다. 이 사람은 다른 캐릭터와는 다른 특이성을 갖지만, 극중 큰 의미를 부여받지 못했다.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화가 날 정도로 미적거린다! 이도저도 안되면 덮치는걸 성공하기라도 했어야지!)

이 작품에는 결말이 없다. 정확히는, 비극적 현실로 되돌아갈 수 있는 불안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도돌이표다. 발병만 하면 기억은 되돌아올 수 있고, 야에가시가 치즈나의 대리가 될 수 있다. 그들은 카즈나의 부모님의 전철을 반복할지도 모른다. 혹은 그렇지 않거나.

이 글의 포인트는 야에가시의 마지막 대사- "-하지만 나는 그 때를 두려워하지 않아.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되니까."가 아니다. 글 전체를 짓누르던 현실을 생각할 때 이건 너무 핑크빛 미래다. 낭만적 환상이다.

만화 전체의 풍을 생각한다면- 이 문장이 가장 이 만화의 핵심을 잘 이야기해준다고 생각했다.

치즈나의 대사 중-

"우리들은... 양의 무리에 숨어든 늑대가 아니에요."
"송곳니를 가지고 태어난 양일 뿐이죠."


생각보다 칭찬보다는 비판을 더 많이한 것 같지만
그래도 이 만화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역시, 주인공은 치즈나다.


덧. 뒤죽박죽으로 썼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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