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고(渤海考) - 지혜의 샘.한국고전총서 1
유득공 지음, 송기호 옮김 / 홍익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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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득공(1748~1807) <발해고>/1784

 

 

기존에 6352km라던 중국의 만리장성이 2009년에는 8851km로 늘어나더니 최근에는 21196km 2009년 발표보다도 2배 이상 늘어났다. 중국이 이처럼 고무줄 늘리듯 만리장성의 길이를 부풀리는 것은 누가 봐도 다민족 국가인 중국의 정치적 의도로 현재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들기 위한 중국의 국가적 연구사업인 동북공정의 일환임이 분명하다. ‘고무줄 만리장성의 변천과정을 보면 중국의 이러한 속셈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기존에 중국이 홍보해왔던 만리장성의 길이는 중국내 자위관에서 산하이관으로 말 그대로 만리에 불과했으나 2009년에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을 단둥의 후장산성이라고 늘려 발표했다. 후장산성은 당 태종의 공격에도 함락되지 않았던 고구려의 박작성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 발표로 박작성의 서쪽에 위치한 고구려의 안시성과 요동성까지 만리장성의 일부로 편입시켜버린 것이다. 게다가 올해 새로 발표한 만리장성은 서쪽으로는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하미에서 동쪽으로는 헤이룽장성 무단장까지를 포함함으로써 현재 독립운동이 한창인 티베트는 물론이고 고구려와 발해까지 중국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왜곡은 고구려와 발해의 중국사 편입에 그치지 않고 있다. 우리의 대표 무형문화인 아리랑마저 중국문화유산에 지정하기도 했다.

 

발해를 한국사에 편입시킨 최초의 역사서

 

일본의 독도 침탈에 중국의 고구려와 발해사 왜곡까지 바야흐로 주변 강대국의 영토와 역사에 대한 침략행위는 태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으나 우리의 대응은 약소국의 그것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남북분단으로 중국의 역사 왜곡에 공동 대응할 여력이 없고 일본의 독도 침탈에는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감정적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영토와 역사를 둘러싼 국가간 분쟁은 비단 당사국만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주장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감정적 대응이 아닌 국제사회를 설득시킬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연구와 자료가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발해고>의 저자 혜보(유득공의 字)가 밝힌 저술 동기는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끝내 발해사를 쓰지 않아서 토문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하게 되어, 여진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고, 거란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고려가 마침내 약한 나라가 된 것은 발해 땅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크게 한탄할 일이다. -<발해고> ‘유득공의 서문중에서-

 

유득공은 고려가 거란족과 여진족의 침략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결국 패망의 길을 걷게 된 이유로 역사의식의 부재를 꼽았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합리적인 대응은커녕 교육과정에서 국사를 선택과목으로 전락시켜버린 우리사회의 역사인식에 대한 일침이기도 하다. 심지어 청산되어야 할, 청산했어야만 할 잘못된 역사의 주역들이 버젓이 백주대로에 활보하고 있는 현실은 주변국의 역사왜곡에 대한 대응을 무색하게 만든다.

 

유득공의 <발해고>는 발해를 한국사에 편입시킨 최초의 역사서로 평가받는다. 물론 유득공 이전에도 발해에 관한 기록은 있었으나 대부분 단편적인 언급에 불과했다. 유득공은 <삼국사기>, <고려사> 등 국내 역사서뿐만 아니라 <구당서>, <신당서> 등 중국 서적, <속일본기>, <일본일사> 등 일본 역사서 등 총 22종의 국내외 역사서를 인용해 <발해고>를 저술했다. 유득공의 <발해고>가 발해를 한국사에 편입시킨 본격적인 역사서라는 것은 총 9개의 단원으로 된 책의 구성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군고(君考, 왕에 관한 고찰), 신고(臣考, 신하에 관한 고찰), 지리고(地理考, 지리에 관한 고찰), 직관고(職官考, 관청 및 관직에 관한 고찰), 의장고(儀章考, 의식 및 복장에 관한 고찰), 물산고(物産考, 물산에 관한 고찰), 국어고(國語考, 국어에 관한 고찰), 국서고(國書考, 국서에 관한 고찰), 속국고(屬國考, 후예국가에 관한 고찰)

 

남북국 시대의 실종과 복원

 

유득공의 <발해고>는 발해를 한국사에 편입시킴으로써 기존에 삼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통일신라, 고려, 조선으로 이어졌던 역사 서술을 삼국시대, 남북국 시대(발해, 통일신라), 고려, 조선으로 바꿔놓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이것이 삼국으로 마땅히 삼국사가 있어야 했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였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이라 부르는 것으로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발해고> ‘유득공의 서문중에서-

 

그러나 발해를 포함한 한국사 서술인 남북국 시대는 <발해고>가 쓰여진 1784년 이후 자취를 감췄다가 20세기 후반에서야 복원되었으니 우리 역사인식의 천박함을 반성해 볼 대목이다. 특히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사를 한반도에 국한시키려는 식민사관을 해방 후 수십 년이 지나도록 그대로 가르치고 있었으니 친일 청산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반증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게다가 유득공이 사학자가 아니라 조선을 대표하는 문인이었다는 점은 또 한번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물론 유득공이 문인이었고 또 다양한 국내외 서적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기에 <발해고>가 빛을 볼 수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도 있다.

 

유득공이 사학자가 아니었기에 <발해고>에는 몇 가지 한계가 보이기도 한다. 유득공은 <발해고> 서문에서 발해를 건국한 대씨를 고구려 사람으로 정의하고 그가 소유한 땅은 마땅히 고구려 땅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乞乞仲象)을 속말말갈인으로 규정하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또 고려가 남북국사를 편찬하지 않은 것을 비판한 서문과 달리 본문에서는 발해의 역사 및 풍습만을 기록함으로써 남북국 시대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한편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중화사상에 젖어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유득공의 <발해고> 저술이 가능했던 것도 당시 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중국이 여진족의 청나라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수도 있다. 이런 문인으로서의 한계는 발해 멸망 시기를 926년이 아니라고 주장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중국의 역사서를 지나치게 인용한 데서 발생한 오류로 보인다.

 

이런 몇 가지 오류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발해고>가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결코 무시되어서도 폄하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한편 <발해사>가 아닌 <발해고>로 이름을 붙인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역사서로 완성하지 못하여 정식 역사서로 자처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유득공의 겸손함도 엿보인다.

 

마지막으로 유득공의 오랜 벗인 성해응의 <발해고> 서문도 되새겨볼 대목이라 소개하고자 한다.중국과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해서도 국민감정만을 부추길게 아니라 정확한 역사적 고증을 통한 국제사회 호소와 사라져가는 국사교육의 복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께서 정력을 쏟아 고증하고 연구하여 이 책을 지은 것은 본디 신기한 것을 좋아하는 성정에서 비롯된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자세히 검토하여 국가를 세워 운영해갔던 뜻을 이해하게 된다면 이 세상을 다스리는 정책에 도움이 되는 것이 적지 않을 터인데 이를 알아주는 사람이 극히 적어 함부로 버려지게 되니 실로 애석한 일이다. -<발해고> ‘성해응의 서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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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의 꿈
리처드 바크 지음, 류시화 옮김 / 현문미디어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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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바크(Richard David Bach, 1936~) <갈매기의 꿈>/1970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

 

중·고등학교 아니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부터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다. 당연한 이치인 것을 'Boys be ambitious(젊은이여, 야망을 가져라.)'라는 영어 문장과 대동소이한 의미로 귀가 닳도록 들었다그러나 이 말의 출처인 리처드 바크(Richard David Bach, 1936~) <갈매기의 꿈>은 정작 읽어보지 못했다. 아마도 대학 새내기 시절 처음 샀던 것 같다그때도 결국엔 사회과학 서적에 밀려 책장 한 귀퉁이로 내몰리고 말았다그 후 꿈과 좌절이 반복되었던 20년이라는 세월을 집어삼키고서야 여기에 혹시 내가 꿈꾸는 미래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뽀얀 먼지를 걷어내고 검지 끝에 침과 묵은 때를 묻혀가며 어렵게 책장을 넘겼다. <갈매기의 꿈> 속 명언을 처음 들었던 시절 순수함이 사라져버린 탓일까 아니면 세상이 하 수상한 탓일까 전세계 4천만 독자가 감동했다는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의 꿈이 삐딱한 시선 속으로 들어오고 만다

 

 

비행사 출신 작가의 비상

 

그래도 간단한 책 소개쯤은 해줘야 고전의 반열에 오른 <갈매기의 꿈>과 저자에 대한 예의이지 싶다. 리처드 바크와 <어린 왕자>의 저자  생텍쥐베리(Antoine de Saint Exupery 1900~1944)의 공통점을 아는지 모르겠다. 두 사람 모두 프로 비행사 겸 작가였단다. 게다가 두 작가의 대표작이 <갈매기의 꿈> <야간 비행>이라니 세월을 뛰어넘은 운명적인 만남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두 작가의 대표작 <갈매기의 꿈> <어린 왕자>는 또 어떤가. 두 소설의 주제가 순수한 사랑과 자유에의 갈망이라는 공통점까지 있으니 결코 예사롭지 않은 우연이다.

 

<갈매기의 꿈> 주제를 몇 개 단어로 정리해 본다면 도전과 사랑과 자유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의 모험은 이와 같이 지극히 교과서적인 교훈을 실천하는 과정이다. 갈매기라는 생물학적 한계에 안주할 수 없었던 조나단 리빙스턴의 꿈은 왕따로 이어지고 무리로부터 추방당하게 된다. 명석한 두뇌를 가진 조나단 리빙스턴은 이런 외부환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꿈을 이루어 나간다. 출간된 후 일부 종교로부터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오만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을만큼 조나단 리빙스턴의 능력은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는다. 비행사 출신 작가답게 갈매기의 비상이 마치 전투기의 이착륙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러면서도 동료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소설 <갈매기의 꿈>이 주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이 왜 중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 없으면서도 왜 그렇게 자주 인용되었는지 알 수 있다. 조나단 리빙스턴의 모험은 청소년들이 품어야 할 꿈이어야 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기성세대의 간절함이다. 그러나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감상은 조나단 리빙스턴이 그렇게 거부하고자 했던 현실, 교육적으로는 천박하다 싶은 우리네 일상도 결코 폄하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라는 것이다. 게다가 조나단 리빙스턴은 창공이라는 경계가 없는 무한의 공간을 살고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처한 현실은 지역, 국가, 세계라는 공간적 한계와 정치, 경제, 문화 등 무형의 제한적 공간이라는 점이다. 이상만큼이나 가치있는 삶이 현실이라는 반증이다.

 

 

평범한 삶에도 소중한 가치가 있다

 

대부분의 갈매기들은 지극히 단순한 비상 이상의 것은 배우려고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즉 해변을 떠나 먹이를 비축하고 되돌아오는 것 이상은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모든 갈매기들에게 있어서 당면한 문제는 나는 것이 아니라 먹이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갈매기에게는 먹이를 구하는 것보다 나는 것이 훨씬 중요한 문제였다.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나는 것을 사랑했다. -<갈매기의 꿈> 중에서-

 

비상을 꿈꿔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돌기 하나 없이 둥그런 달 한 가운데 옥토끼 부부를 그려보지 않은 사람이 또 있을까.  개천에서 용난다는 옛말을 신앙처럼 믿으며 밤을 새워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조나단 리빙스턴만 비상을 꿈꾸는 것은 아니다. 창공을 가로지르는 멋진 비행은 조나단 리빙스턴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꿈이기도 하다. 조나단 리빙스턴과 우리네 이웃들이 다른 게 있다면 추방당해도 꿈을 펼칠 수 있는 창공이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 비상 이상의 것은 배우려고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게 아니라 좌절이라는 이름으로 낮은 비상에서마저 추락하고 마는 현실이다. 먹는 것 이상의 무엇을 추구하지만 그 열망이 커질수록 추락의 아픔은 중력의 무게만큼 처참해지는 현실이다. 누구나 평범하게 사는 것 같지만 그 속에는 조나단 리빙스턴 못지않은 꿈이 있고 야망이 있다. 그저 그렇게 평범해 보일 뿐이다. 마트 후미진 구석에서 박스를 줍고 있는 노인을 향해 '너는 저렇게 살면 안돼'하고 눈을 마주친 아이에게 천박한 교훈은 얘기하지 말자.

 

삶을 위한 의미를 찾고 더 높은 목적을 추구하는 갈매기보다 더 책임감이 강한 갈매기가 어디에 존재한다는 말입니까? 수천 년 동안 우리는 물고기 머리밖에 찾아다니지 못했소. 그러나 이제 우리는 삶을 영위할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배우고, 발견하고, 자유롭게 될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 -<갈매기의 꿈> 중에서-

 

조나단 리빙스턴, 혹시 너 아니었니? 도심 속 어두운 뒷골목을 전전하던 어느 여자의 꿈이었던 로또 한 장을 물어가버린 갈매기가. 조나단 리빙스턴은 여름 해변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손에 들린 새우깡에 열광하는 동료들을 이상이 없다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천년 동안 물고기 머리만 찾아다니던 갈매기들에게 새우깡은 좀 더 진보된 삶의 방식임을 잊고 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이상을 말하지만 정해진 이상을 강요받는 현실, 다수에서 이탈한 생각은 어느새 변색된 돌연변이가 되고마는 현실, 국민보다는 권력을 위해 충성하도록 키워지는 현실, 무수한 평범한 삶 속에는 물고기 머리밖에 없었던 삶의 목적이 새우깡으로 시나브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또 하나의 현실이다.

 

 

고통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다

 

연장자 갈매기 치앙이 유언으로 남긴 '끊임없이 사랑을 위해 힘써라.'라는 말은  갈매기 집단 또는 보통 사람들이 힘겨운 현실을 버텨낼 수 있는 힘이다. 갈매기가 가진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어버린 조나단 리빙스턴이 동료들에게 갖는 애정은 이미 '사랑'이 아닌 '시혜'로 변질되었는지도 모른다. 조나단 리빙스턴의 비행연습 스승인 셜리반이 강조했던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는 말에 이의를 달 생각은 없지만 비록 높이 날지도 못하고 멀리 보지도 못하지만 그저 물고기 머리말고도 새우깡이라는 소소한 삶의 이유를 발견한 동료 갈매기들의 일상 또한 폄하될 수 없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시혜'가 아니라 같이 웃고 같이 울 수 있는 '사랑'이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 국내 모언론에서 <갈매기의 꿈> 저자 리처드 바크의 인터뷰 기사를 찾았다. 세계화, 금융위기 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해 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변했다고 한다.

 

" `고통 받는다는 것`은 개인적인 선택에 불과하다고 봐요. 우리 정신과 신체의 일치를 믿는다면 고통이란 여름날 얼음처럼 녹아내리지 않을까요. 자유란 어느 길로 갈지 우리가 결정하고, 운명은 우리 손에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대신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서 비롯한다고 봐요."

 

멋진 말이다. 한편 다분히 종교적이고 교과서적이다. 현재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갖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기적적인 비행 기술을 익힌 조나단 리빙스턴처럼 살아가라는 말처럼 들린다. 물론 누구나 그렇게 살고 싶어하고 그렇게 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게 보통 사람들의 일상이다. 그러나 지금의 세계화,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고통 받는다는 것이 개인의 선택에 불과할까. 혹시 그런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게 오히려 더 정확한 현실이 아닐까. 새우깡 하나에 안주해버린 일상 속에도 삶에 대한 치열한 열정과 투쟁이 있다는 사실도 조나단 리빙스턴의 꿈과 자유, 이상만큼이나 소중한 가치는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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