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6회 여성영화제 상영작이다.

60년대에 만들어진 영화라고 믿겨지지 않을만큼 현재의 시대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영화 중간중간에 삽입된 유머러스한 부분도 현재의 관객들에게 무난하게 받아들여지는 재미있는 영화다.

영화의 무대는 18세기 말의 일본으로 화타와 같은 명의를 꿈꾸는 의사 하나오카 세이슈와 그의 아내 카에, 시어머니 오츠기가 영화를 끌어가는 주인공이다. 카에는 어린 시절부터 사모했던 하나오카 가문의 오츠기를 사모하여 그의 며느리로 들어간다. 시어머니 오츠기는 인자하고 현숙한 부인이지만(그리고 카에도 처음에는 그런 줄로만 알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오츠기의 아들과 가부장제적 질서에 대한 집착은 카에에게 당황스럽게 비춰졌다.

세이슈가 에도에서 화란의 의술을 배우고 돌아오는 장면에서 보이듯이 극중의 여성들은 세이슈의 세속적 성공을 위한 도구다. 어머니 오츠기, 아내 카에, 그리고 결혼하지 않은 두 여동생들 모두 세이슈를 위해 가사노동과 세이슈의 에도유학비 마련을 위해 매진한다. 특히 오츠기와 카에는 자신을 스스로 착취하고 파괴하는 정도를 자신의 세이슈에 대한 사랑의 강도를 측정하는 바로미터로 삼으면서, 서로에 대해 우위를 점하려고 경쟁한다. 이들의 경쟁은 세이슈가 만든 마취약의 최종실험을 위해 자원을 하는데서 정점에 달한다.

외과수술을 위해서는 전신마취를 해야하는데 당시에는 환자들이 수술을 고통을 잊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마취약이 존재하지 않았고, 전신마취만 가능하다면 나름의 멸균법을 통해 외과수술을 해서 많은 생명을 구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게 네덜란드의 의술을 접했던 세이슈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서로 자신을 실험대상으로 삼아달라고 애원하자 세이슈는 오츠기와 카에 모두를 대상으로 실험을 하여 마침내 전신마취제 개발에 성공하고 세계최초의 마취수술에 성공한다. 그러나 실험과정에서 마취약의 부작용으로 인해 카에는 실명을 하게 되고, 아들과 며느리에 의해 자신이 속은 것을 안 오츠기는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난다.

한편, 세이슈는 당대의 명 외과의로 승승장구하여 부와 명예를 거머쥐게 되고, 결과적으로 마취약 개발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카에는 뭇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된다. 감독의 생각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세이슈의 누이동생이 종양으로 죽는 장면인데, 자발적으로 자신을 파괴해가며 가부장제적 질서에 경쟁적으로 순응하는 여성들의 어리석음을 여성(세이슈의 누이동생)의 입을 빌려 통렬하게 비판한다.

아멜리 노통은 그의 소설 [사랑의 파괴]에서 사랑을 자발적인 자기파괴과정으로 그려내고 있다. 어떤 인격적 실체에 대한 비합리적(?) 끌림으로 인해 가학과 피학의 행위가 발생하게 된다고 말이다. 물론 노통의 소설에서는 나와 엘레나라는 두 여성이 등장하고, 그러한 자기파괴과정의 수혜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처리되고 있지만, 이 영화의 감독 마스무라 야스조는 가부장제와 그 안에서 경쟁적으로 발생하는 자기파괴과정의 수혜자가 결국 남성임을 분명하게 지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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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서울여성영화제 상영작이다. 한마디로 경쾌한 코메디물이다. 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모~옵시 좋아진다. 현실감이라고는 없는 어리버리한 주인공인 샤를로트는 너무나 매력적이다. 감독의 말에서 샤를로트가 자신의 분신이라고 했는데, 감독을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샤를로트는 에로소설류를 의뢰받아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는 프리랜서 작가다. 글을 써서 살아가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운 한국이지만 벨기에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남편을 저세상으로 보내고 외로움을 느끼던 엄마가 샤를로트의 집으로 쳐들어온다. 수년간 따로 살아왔으니 라이프스타일도 완전히 다를 것이고, 급기야 자신에게 사랑과 애정을 가져달라며 계속 칭얼거리는 엄마 때문에 강박증에 시달리던 샤를로트... 마침내 집을 팔고 이사를 가기로 결심하고 집을 내놓는다. 집을 보기 위해 꾸역꾸역 모여드는 사람들. 이들과의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에피소드들로 이 영화는 시작된다.

앞서 말했듯이 주인공인 샤를로트는 에로소설작가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의 경험조차 없고 그에 대해서 무지하기까지 하다. 그래서인지 샤를로트는 자신의 언어로 소설을 쓰지 못한 채, 옆집에서 들려오는 교성과 남들이 사랑에 대해서 하는 말들을, 그것도 단어로 분절적으로만 수첩에 끄적거릴 뿐이다.

그러나 집을 보러 오는, 아이를 낳기 직전의 젊은 부부, 장년의 권태를 느끼는 부부 등과 교감을 하게 되면서 변화를 겪게 되고, 샤를로트는 여타 여성들의 삶의 문제들에 공감을 하게 된다. 즉, 먹고 살기 위해 엉터리 포르노소설을 쓰는데(남성들의 관음증적이고도 억압적인 성관념)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자신들의 이야기를 쓰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이런 간단한 주제와 더불어 이 영화에는 자신만의 자아를 위한 공간을 갖기 원하는 여성의 심리, 딸과 엄마 사이에서 벌어지는 애증의 관계, 노년들의 애정에 대한 욕망, 상상력과 공통경험을 통한 공감이라는 많은 꺼리들이 코믹적 요소들과 잘 버무려져 있어 2시간의 러닝타임이 전혀 부담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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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크리스마스이브때 혼자 조용히 이 영화를 봤다. 재밌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이 영화를 가로지르는 키워드는 "쿨"이다. 반쯤 미쳐버린 후기산업사회라는 시공간에서,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를 배제하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조건에서 우리는 무수히 많은 관계를 통해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다. 그런 상처를 일일이 감싸쥐고 아프다고 소리지를 수만은 없기에, 그리고 그 작은 소리에 귀기울여줄 사람은 없기에 우리는 겉으로는 쿨한척 자신을 포장한다. 그것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기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100% 쿨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줄 알지만, 우리는 일종의 가면을 쓴 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잘 나가는 변호사 영작과 그 아내 호정, 그리고 죽어가는 아버지와 바람난 시어머니.. 겉으로는 쿨한 척 하지만 그들의 가슴은 여리고 또 여려서 어느 순간 그들은 하나씩 무너져 내린다. 아들의 죽음과 아내의 외도, 그리고 연인으로부터 받은 상실감으로 가장 먼저 무너져 내리는 영작, 그리고 아들의 죽음으로 한없는 울분을 토해내는 호정, 남편의 최후를 눈앞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시어머니, 신체적인 극한에 몰리자 병상에서 횡설수설 빨치산의 노래를 읊조리던 시아버지... 그때였을까 내 눈에서 눈물이 울컥 치밀었던 때가...

어떤 영화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새로이 느껴질 때가 있다. 바로 이 영화가 그랬다. 근 한달동안 누군가를 좋아했지만, 내 자신이 번번이 그로부터 멀리 떨어진 존재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의 쿨함에 주눅이 들 수 밖에 없어 돌아설 수 밖에 없었는데.. 이 영화를 보고 그의 쿨함이 오히려 안쓰러웠고 그가 쿨의 가면을 쓸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그의 과거가 미웠다. 그랬다... 그저 그런 느낌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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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저택에 의문의 살인사건이 발생하면서 시작되는 이 영화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배우들, 주인공들의 심리와 성격에 걸맞는 멋진 의상들, 중간중간 삽입된 유머러스한 뮤지컬 뿐만 아니라 그 주제면에서도 공감가는 영화였습니다.

우리는 모두들 진정하고도 영원한 사랑을 희구하며 살아갑니다. 세월이 흘러가도 시간의 떼를 타지 않는 영원한 사랑을 주고 받기를 원하지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분명 우리 모두가 애초부터 서로간의 '완전한' 소통이 불가능한 '완전한' 타인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어찌 보면 사랑은 외로움을 천형으로 타고 난 인간들로 하여금 주어진 현실을 살아가게끔 만드는 '잠깐동안의 마약'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의 행위들이 모여 '문명'이라고 불리는 것이 이어져 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에서 표면적인 피해자로 묘사되고 있는 아버지가 바로 그런 사람이지요. 사랑하는 아니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대상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로부터 심한 배신과 모멸을 당하고 맙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영화에 등장하는 8명의 여인들도 모두 같은 피해자임이 밝혀집니다. 주인공들 모두 타인에게 일방적인 사랑과 애정을 보내지만 결국 그것이 쌍방향의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한다거나, 둘만의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도 시간이 흐르면서 변색, 탈색되고 종국에는 자학에 빠져들기도 하지요. 등장인물들 중 그러한 진실(?)을 알고있는 몇몇은 새가 나무열매를 찾아 이 나무 저 나무를 찾아다니듯, 이기적인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상대적(!)인 사랑의 대상을 찾아다니기도 합니다.

영화의 중반 흑인하녀 샤넬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노래의 가사내용 하나하나가 와닿을 때마다 너무나 가슴이 시리고 허무하기도 했습니다. 외로워서 사랑할 대상을 찾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랑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저마다 집착할 무언가(종교, 돈 등등)를 찾는다는 내용. "외로워서 사랑을 찾고, 외로워서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지만, 그 아이 역시 외로움을 느낄"수 밖에 없는 현실... 이런 것이 인생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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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래간만에 영화관에 갔던 것 같다. 금요일 점심시간에 영화표를 예매해서 퇴근하고 난 뒤 곧장 씨네큐브에 갔다. 가는 길 광화문 동화빌딩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탄핵반대집회 때문이었다. 가는 길에 시커먼 옷을 입은 한 백발 아저씨가 유인물 박스를 어깨에 지고 간다. 지나치고 보니 명계남이었다. 이야 딴나라당, 잔민당, 딴민련 꼴통들 때문에 사람들 참 고생이 많다. 난 군대에서의 기억은 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었고 당시의 말을 잘 하지도 않지만, 군대에서 들었던 한가지 말만은 퍼뜩 머릿속에 떠올랐다. "무능한 간부는 적보다 무섭다." 수구 꼴통들은 제발 여의도에서 삽질하지 말고, 빨리 지구를 떠났으면 싶다.
 
이 영화는 다큐집단 푸른영상의 김동원 감독이 12년간 장기수 할아버지들을 따라다니면서 찍은 필름으로 만들어졌다. 무거운 주제가 12년간의 필름속에 녹아 있는만큼 무거운 분위기를 예상했지만, 막상 영화가 시작되니 2시간이라는 시간은 의외로 빨리 흘러갔다. 간첩이라 불렸던 이들은 영화초반 감독의 나레이션대로 그리 무서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세월에 흔적과도 같은 깊이 패인 주름만큼이나 삶의 고단함을 간직한 폭싹 늙은 노인에 불과했다. 이런 사람들을 머릿속의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만으로 30여년간 감금한다는 게 과연 법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건 문명이 아니라 야만이었다. 분단 이후, 남북한 모두 수천명의 공작원을 남파 혹은 북파했으나, 그들의 실체는 모두 당국자에 의해 공식적으로 부인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이렇게 실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도소에 있는 수십년 동안 전향공작이라는 이름의 갖은 고문이 행해졌고 전향하지 않은 사람들은 당국자들에 의해 비전향이 아닌 '미전향 장기수'로 불렸다. 이 단어에서 공안당국자들은 그들이 언젠가는 전향을 할 거라는 자신감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고문과 감금에도 불구하고 전향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히 사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적인 자존심 때문이었다. 전향공작이나 고문을 가하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에게만큼은 절대로 굴복할 수는 없다는 자존심이 전향서에 사인하는 것을 막았다는 거다.

 등장인물들 중에서 유난히 정이 가는 사람은 조창손 할아버지였다. 나는 그의 인격적인 모습에 끌렸다. 평소 말이 별로 없이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면서, 생명을 사랑하고 한없이 겸손한 그의 모습에서 인격적인 완성이랄까 그런 것을 느꼈다. 취로사업에 나가 청소를 하면서 조창손 할아버지는 쉬는 시간에도 쉬지를 않았다. 이유를 물으니 "내가 쉬면 다른 사람들이 할 일이 늘쟎아. 내가 이렇게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다른 사람들이 할 일이 줄어드니까 이거 얼마나 좋은 거야?"라고 답했다. 할아버지들은 교도소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교도소 밖의 생활도 이들에게 가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수십년의 감옥생활에서 얻은 지병으로 항상 몸은 불편했고, 자신이 먹고 사는데 필요한 돈은 스스로 벌어야 했으니 말이다. 이들은 취로사업이라도 할 수 있음을 고맙게 여겼다. 할아버지들은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조그만 일에 토라지기도 하고 서로 장난도 치고 아이스크림을 맛나게 먹기도 하는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들과 같았다. 이런 사람들이 뭐가 두려워서 30여년을 가두어 두었을까?

장기수 할아버지들은 2001년에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으로 송환된다. 북으로 송환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었고, 강제전향이력 때문에 송환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송환된 이후라도 남과 북을 자유로이 오가는 것이 가능하다면 좋겠지만, 현재로선 둘 중 어느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송환이 결정되자 납북피해자 단체에서 이들을 찾아오는 장면이 있었다. 분단과 냉전의 피해자인 그들 중 일부는 격한 감정을 들이밀며 송환반대를 외치기도 했고 납북자들과 연락을 부탁하기도 했지만, 장기수 할아버지들은 납북이란 없다며 납북자체를 부인했다. 이북체제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거의 광신에 가까웠다. 그들은 50-60년대 북한을 떠나온 사람이었고 기본적으로 자신의 체제에 대한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로 하여금 감정적으로 북한 체제에 찬동하도록 만든 것은 아마도 남한에서의 야만적인 수감생활이었을 것이다. 야만은 또다른 야만을 낳는다. 납북자 가족들의 격한 감정표출과 장기수 할아버지들의 집단 히스테리는 엄연히 분단과 냉전이라는 역사적 실재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단순한 이성으로 무자르듯이 평가할 수 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실재를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략적으로 이용해 먹는 놈들은 "무자르듯 평가한 후 몇배로 두들겨 맞아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푸른영상의 김동원 감독과 북한으로 간 할아버지들이 다시 자유로이 만날 그날이 빨리 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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