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같은 명절날. 우리집 친척들은 주로 서울에서 모여 살기에 지방에 살고 계신 부모님이 역귀성을 하고 있다. 그래서 명절연휴가 되면 난 별로 할 일도 없이 집 밖을 어슬렁거리곤 한다. 우리집은 친척들간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아서 굳이 무리해서 올라올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부모님은 어쨌건 명절에는 상경한다. 보통 서울로 올라온 어머니는 큰집으로 혼자서 일하러 가고 아버지는 아들의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말도 안되는 말을 내게 늘어놓기 일쑤다. 그러기를 몇 년째.. 난 도저히 짜증도 나고 그런 아버지와 더 싸울 힘도 없어져 버렸다. 큰집에서도 제발로 걸어 나와서 집에도 못 들어가고... 그래서 난 명절이 되면 차례만 지내고 큰집을 탈출해서 친구집에 피난(?)을 간다.

이번 명절도 그랬다. 차례를 지내자마자 바로 큰집을 나와버렸다. 어찌보면 친척들간의 갈등의 중심에는 항상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자신의 아들 딸들의 중간에서 적극적으로 긴장을 조성해 가며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다지고 있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럴거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어쩌면 그렇게들 유치하게 되는지... 그런 할머니를 보지 않은지도 벌써 3년이 넘었다. 빨리 돌아가셔야 그나마 친척들간에 얼굴 맞댈 일 없이 편안하게 살텐데. 서로 얼굴 붉히면서 명절때라고 몇일간의 휴전을 선포하는 그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추석연휴전에 친구녀석에게 전화를 걸어 영화를 보여주겠다고 했더니, 친구녀석이 보러가자고 했던 영화가 바로 이거였다. 산자와 죽은자 사이를 연결해 준다는 영매들(무당,점쟁이 등)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였는데, 재미는 있었으나 한숨을 쉴 수 밖에 없었다. 짧은 이승에서의 인연 때문에 괴로워하고 그 맺힌 한을 풀어주기 위한 그 많은 의식들이 우리의 주변에 있는 줄 몰랐었다. 아예 우리의 삶 전체가 그런 맺힌 한을 풀기 위한 제의같았다고나 할까? 인간들의 만남과 관계라는 것들이 그렇게 질긴 것인지, 좀더 쿨한 관계가 올바른 것은 아닌지, 질긴 인연에 얽혀 허우적대며 어쨌거나 같이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인 것인지 그러저러한 생각들을 하며 엔딩 타이틀이 올라갈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만약 이 영화가 지향하는 바가 사실이라면 난 완전 인생 헛 산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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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샾을 갔다가 너무도 일찍 돌아온 금요일 오후, 지난 밤에 뽀지게 마신 술기운에 어지러운 머리를 추스르며 올드보이를 보았다. 이른 오후인데도 상영관은 만원이었다. 박찬욱이라는 감독이 그리 대중과 친한 감독은 아니지만, 그간 마케팅에 때려막은 돈이 장난이 아니어서인지 올드보이는 주말예매1위에 올랐다.

아무리 일본 아해들의 만화에서 빌려온 착상이라지만, 사적으로 운영되는 감방의 존재와 개인적인 원한으로 인한 15년간의 감금은 너무나도 기괴한 설정임에 틀림없다.

영화 초반 최민식의 감금생활과 거기서 풀려나 감금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과정은 나를 완전히 영화에 몰입하게끔 만들었다. 또한, 최민식이 망치를 들고 감금방의 깡패들과 벌이는 사투는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폭력적인 것이 저리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역설의 미학의 사례를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영화의 중반 이후, 감금의 이유가 개인적인 원한인 것으로 드러나면서 그리고 복수를 완성하는 주체가 돈으로 칠갑을 해도 돈이 남는 멋드러진 부자로 이미지화 되면서 왠지 모를 불쾌감이 고개를 들었다. 전편 "복수는 나의 것"에서도 그 주제는 "복수"였다. 올드보이와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감정의 폭발이 극을 이끌어가는 추동력이었으나, 그래도 당시 박찬욱은 개인적 원한과 복수가 사회와 분리될 수 없이 톱나바퀴처럼 맞물려 움직이고 있음을 영화 곳곳에서 드러내려 애썼다. "복수는 나의 것"의 분노는 신하균과 송강호의 개인적인 분노만은 아니었던 것이고, 그들의 사회적 역할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런 고통과 분노를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감독은 사회적으로 강제된 고통과 분노로 범벅이 된 아비규환을 감각적으로 그려내었고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최소한 불편함을 느끼게끔 만들었다. 또한 신하균에게 마지막 복수를 가했던 송강호를 아나키스트단의 이름으로 단죄함으로써 감독은 결국 신하균의 손을 들어준다.

그런데, 개인적 원한과 복수... 게다가 "모래알이나 바위나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라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속편이 어디있나. 공중파 CF까지 내보내는 등 엄청난 마케팅비용을 지출한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올드보이는 대중을 위한 상업영화다. 그건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상업적인 면에서나 메시지적인 면에서나 박찬욱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조화를 원한다. 박찬욱은 그만큼 큰 능력을 가진 감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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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조선사람 정서에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더 잘 어울리는 듯 하다. 물론 그들과 많은 면이 다르기는 하지만, 일본애니를 보고 있을라치면 소소한 심리묘사 등에서 우리와 코드가 비슷한 점이 많음을 느낀다.

난 천년여우라고 해서 여우라는 동물이 나오는 애니인 줄 알았는데, 밑에 영어자막을 보니 <Chiyoko, Once and Forever>라는 자막이 나와서 그게 아닌 줄 알았다. 영화는 갑자기 영화계에서 사라져버린 후지와라 치요코라는 일본 여배우를 두사람의 다큐멘터리작가들이 추적하면서 시작된다. 치요코는 1922년 생으로 그녀의 인생은 격동기였던 일본의 현대사에 얼마간 연결되어 있는데, 우연히 경찰에게 추격당하던 민권운동가를 자신의 집에 숨겨주게 되면서 그에 대한 사랑이 싹트게 되고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여배우가 되어 그를 찾아 나선다는 줄거리를 담고 있다.

이 영화를 서양인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정말 우스운 줄거리일지도 모른다. 아무 관계도 없었던 남자와 잠깐 이야기를 했던 것에 불과한데도 그와의 너무나도 조그마한 약속같지도 않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온갖 역경을 마다하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 또한 현실과 치요코가 출연했던 여러편의 영화가 뒤섞여 치요코 자신과 민권운동가 사이의 만남이 천년동안 이루어지지 못했던 남녀간의 운명적 사랑의 조그마한 일부일지 모른다는 설정. <은행나무침대>나 성유리의 어색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끈 최근의 드라마(제목도 기억 안 난다)와 많은 부분 닮아있다.

그러나 분명 빠른 편집, 여러 이야기를 뒤섞는 교묘한 장치들, 연거푸 오버액션을 일삼는 다큐멘터리 작가들로 인해 이 이야기는 식상한 틀에도 불구하고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흥미를 느끼게끔 만들고 있었다.

중반 이후, 치요코가 사랑을 찾아 훗카이도까지 달려가는 장면에서 나는 사실 좀 짜증이 났다. 별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목숨까지 걸 듯한 치요코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그것을 마치 지고지순한 사랑, 순정으로 포장하려는 그 다큐멘터리 작가나 주변의 시선이 너무나도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의 종반 전직 일본 순사를 통해 치요코가 그토록 찾던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다큐멘터리작가 겐요 또한 수십년 동안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치요코에게 말하지 못했던 사실이 밝혀졌을 때, 나는 비로소 이 영화가 <Chiyoko Once and Forever>가 아닌 <Genyo Once and Forever>에 관한 것임을 알게 되었고 이 영화가 좋아졌다.

치요코가 쫓던 그 사람은 이세상에 존재치 않는 사람이었고 치요코가 현실에서 했던 모든 행동들은 무의미한 것, 한낱 자아도취의 결과물이나 자위행위로 생각될지 모른다. 그런데 왜 겐요는 치요코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것은 치요코가 간직한 사랑이 치요코로 하여금 치요코의 남은 인생을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었으며 치요코의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즉, 사랑에 대한 욕망은 치요코의 존재이유였고, 또한 치요코에 대한 사랑은 겐요의 존재이유였다.

모든 사람의 인생에서 사랑이란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의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에 대한 애정과 관심 그리고 사람 이외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애정과 사랑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말이다. 아마도 거북이가 시스템이나 데이터베이스에 대해서 가지는 애정도 이와 비슷한 것이리라. (그렇다고 거북이가 변태는 아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러한 사랑은 조그마한, 일견 허망해보이는 조그마한(치요코와 그 남자의 조그만 약속과도 같은) 계기에서 비롯된다.

나만의 개똥철학이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사랑, 그리고 그것의 허망함, 그러나 그것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나름의 성찰이 담겨 있는 좋은 작품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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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포스터를 봤을 때 "이거 또 친구같은 쓰레기영화아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포스터 한켠에 감독이름이 유하였다. 그의 전작 <결혼은미친짓이다>를 매우 재미나게 본 나로서는 이 영화를 봐야 할 이유가 생긴 셈이었다.

이땅의 모든 이소룡 세대들에게 바친다는 감독의 헌사처럼 영화는 이소룡의 현란한 액션으로 시작된다. 이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1978년...그렇지만, 9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나에게도 스크린에서 보여지는 학교의 모습은 너무나 익숙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학진학이라는 무오류의 절대명제를 향해 소떼몰이를 당하듯 하는 모습은 바뀌지 않은 것 같다.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나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에서처럼 이 영화의 학교도 사회의 조그만 축소판으로 그려진다. 박정희의 유신체제 말 "각하"를 정점으로 한 거대하고도 "평온"해보이는 권력피라미드 아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벅벅 기었듯이, 영화속 "정문고"도 선생들로부터 권력쪼가리를 위임받은 선도부짱을 정점으로 여전히 "평온"해 보인다. 등교길에 수많은 학생들이 선도부학생들에게 충성을 외치며 거수경례를 때리고, 조금이라도 행동이 하 수상해 보이는 놈들은 각목 찜질을 당하며 학교는 평온하다.

이 와중에 선도부짱에게 반기를 드는 놈이 나타나는데, 이 놈은 어딘가 삐딱한 부잣집 도련님이다. 선생으로부터 위임받아 합법과 불법이 혼합된 폭력을 휘두르는 선도부짱이나 이 부잣집 도령이나 권력의 속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이소룡 이전의 무협영화에서 그려지던 싸나이대 싸나이의 "승부"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이들은 잘 안다. 무조건 상대의 약점을 철저히 이용해 짓밟아 버리는 것. 그렇게 만들어진 승자가 모든 것을 가진다는 "Winner Takes All"의 논리를 이들은 잘 알고 있는 거다. 그리고 그들의 우상 이소룡도 이러한 세상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소룡 이전의 무협영화보다 이소룡 영화의 싸움장면은 더 처절했고 상대방이 방심할 때 뒷통수 갈기기, 급소차기 등 온갖 불법(?)이 난무했으며, 정통파들로부터 "이소룡의 절권도는 무시를 당했던"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승부는 정정당당하지 않은 것이다. 누가 이기든 이긴 놈이 모든 것을 가져간다. 이기기만 하면 정의도 내편으로 만들 수 있다. 그리하여 이소룡은 "뒤돌아보지 말 것"을 그저 "앞만 보고 이길 것을" 우리에게 주문했던 것이다.

암튼 이토록 지저분한 사회의 논리를 따랐던 이 두 놈이 한판을 붙게 되고, 밀려난 부잣집 도령은 자취를 감춘다. 도령 밑에 있던 똘마니들의 새로운 줄서기가 단행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 평소 도련님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던 '햄버거'는 완전한 선도부짱의 행동대원으로 나서고 권력의 단맛을 만끽한다.

한가인에 대한 진정한 사랑 때문에 상처를 받은 우리의 주인공 권상우... 학교 안의 그 권력피라미드를 박살내기로 결심하고 마침내 권상우는 피나는 노력을 통해 이소룡의 절권도로 조그맣고도 불온한 권력피라미드를 개박살낸다. 정정당당하지 않은 방법이라고 욕하는 분들도 계시리라... 하지만 승부란 그런거다.. 권상우의 한가인에 대한 순정이 도련님의 한밤의 쇼로 압도당했듯이, 박정희의 유신이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선전되었듯이 당시의 세상은 (아니 지금도?) 진실보다는 위선이 정의보다는 가진자의 권력이 더 인정받는 곳이 아닌었던가?

물론 권상우가 그 불온한 권력피라미드를 인정하면서 소시민으로 살아갔어도 난 슬펐겠지만, 그가 교내의 조그만 권력피라미드를 박살내는데 성공했을 때도 난 슬펐다. 어차피 그에게 돌아올 것은 더 가혹한 처벌이기 때문이다. 이 사회의 조그만 권력 피라미드 뒤에는 더욱 강고하고 거대한 권력피라미드가 놓여있는 법이다. 이소룡이 "Fist Of Fury"의 마지막 장면에서 라이플을 정조준하고 있는 영국군인들을 향해 발차기를 날리듯이 그의 발차기는 의미없는 지랄이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지만, 한번 지랄해 본거다. 그 지랄 한번으로 권상우는 제도권 밖으로 밀려난다. 그리고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가려는 노력을 꾸역꾸역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착찹했다. 솔직히 난 그런 지랄 한번도 못 해봤다. 그 뒤
에 연이어 서 있는 권력피라미드의 위압감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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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파라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3
후안 룰포 지음, 정창 옮김 / 민음사 / 2003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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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소설중에 읽은 게 없어놔서 그런지 이 책을 읽다가 몇 번이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이런 구성을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르는 건지 문학에 소질이 없는 나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후안 룰포라는 미스테리어스한 작가의 상상력에 갈채를 보내야 할 것 같고, 한편으로는 나라는 인간의 상상력을 철저하게 말살해버린 남한의 제도권 교육당국에 비난의 화살을 돌려야할 것 같다. (-_-)+++   (^^) <-- 얘=교육당국

소설의 내용은 의외로 단순하다. 한 젊은이가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는 이야기인데, 작가는 아버지인 뻬드로 빠라모에 얽힌 이야기들을 뒤죽박죽 섞고 갖가지 파격적인 형식을 삽입하여 소설을 난해하게 만들어 버렸다. 읽는 내내 "이 등장인물은 죽은거야, 살아있는 거야?", "얘가 언제 죽었냐?", "지금 화자는 누구지?"라는 물음 때문에 앞부분에 대한 반복적인 발췌독을 해야했을 정도였다.

소설의 배경은 멕시코혁명기 꼬말라라는 마을이며, 소설의 중간에 각 등장인물들간의 비교적 짧은 대사로 멕시코혁명이 (멕시코 전체를 상징하는) 이 조그마한 마을의 체제와 등장인물들에 미친 영향을 강렬하게 그려내고 있다.

분량이 작아서 시간이 나면 다시 한번 읽어봐야 소설의 맛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이 작가는 독자들에게 결코 친절한 설명을 해 주는 법이 없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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