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크리스마스이브때 혼자 조용히 이 영화를 봤다. 재밌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이 영화를 가로지르는 키워드는 "쿨"이다. 반쯤 미쳐버린 후기산업사회라는 시공간에서,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를 배제하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조건에서 우리는 무수히 많은 관계를 통해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다. 그런 상처를 일일이 감싸쥐고 아프다고 소리지를 수만은 없기에, 그리고 그 작은 소리에 귀기울여줄 사람은 없기에 우리는 겉으로는 쿨한척 자신을 포장한다. 그것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기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100% 쿨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줄 알지만, 우리는 일종의 가면을 쓴 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잘 나가는 변호사 영작과 그 아내 호정, 그리고 죽어가는 아버지와 바람난 시어머니.. 겉으로는 쿨한 척 하지만 그들의 가슴은 여리고 또 여려서 어느 순간 그들은 하나씩 무너져 내린다. 아들의 죽음과 아내의 외도, 그리고 연인으로부터 받은 상실감으로 가장 먼저 무너져 내리는 영작, 그리고 아들의 죽음으로 한없는 울분을 토해내는 호정, 남편의 최후를 눈앞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시어머니, 신체적인 극한에 몰리자 병상에서 횡설수설 빨치산의 노래를 읊조리던 시아버지... 그때였을까 내 눈에서 눈물이 울컥 치밀었던 때가...

어떤 영화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새로이 느껴질 때가 있다. 바로 이 영화가 그랬다. 근 한달동안 누군가를 좋아했지만, 내 자신이 번번이 그로부터 멀리 떨어진 존재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의 쿨함에 주눅이 들 수 밖에 없어 돌아설 수 밖에 없었는데.. 이 영화를 보고 그의 쿨함이 오히려 안쓰러웠고 그가 쿨의 가면을 쓸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그의 과거가 미웠다. 그랬다... 그저 그런 느낌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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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저택에 의문의 살인사건이 발생하면서 시작되는 이 영화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배우들, 주인공들의 심리와 성격에 걸맞는 멋진 의상들, 중간중간 삽입된 유머러스한 뮤지컬 뿐만 아니라 그 주제면에서도 공감가는 영화였습니다.

우리는 모두들 진정하고도 영원한 사랑을 희구하며 살아갑니다. 세월이 흘러가도 시간의 떼를 타지 않는 영원한 사랑을 주고 받기를 원하지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분명 우리 모두가 애초부터 서로간의 '완전한' 소통이 불가능한 '완전한' 타인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어찌 보면 사랑은 외로움을 천형으로 타고 난 인간들로 하여금 주어진 현실을 살아가게끔 만드는 '잠깐동안의 마약'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의 행위들이 모여 '문명'이라고 불리는 것이 이어져 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에서 표면적인 피해자로 묘사되고 있는 아버지가 바로 그런 사람이지요. 사랑하는 아니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대상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로부터 심한 배신과 모멸을 당하고 맙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영화에 등장하는 8명의 여인들도 모두 같은 피해자임이 밝혀집니다. 주인공들 모두 타인에게 일방적인 사랑과 애정을 보내지만 결국 그것이 쌍방향의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한다거나, 둘만의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도 시간이 흐르면서 변색, 탈색되고 종국에는 자학에 빠져들기도 하지요. 등장인물들 중 그러한 진실(?)을 알고있는 몇몇은 새가 나무열매를 찾아 이 나무 저 나무를 찾아다니듯, 이기적인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상대적(!)인 사랑의 대상을 찾아다니기도 합니다.

영화의 중반 흑인하녀 샤넬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노래의 가사내용 하나하나가 와닿을 때마다 너무나 가슴이 시리고 허무하기도 했습니다. 외로워서 사랑할 대상을 찾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랑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저마다 집착할 무언가(종교, 돈 등등)를 찾는다는 내용. "외로워서 사랑을 찾고, 외로워서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지만, 그 아이 역시 외로움을 느낄"수 밖에 없는 현실... 이런 것이 인생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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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래간만에 영화관에 갔던 것 같다. 금요일 점심시간에 영화표를 예매해서 퇴근하고 난 뒤 곧장 씨네큐브에 갔다. 가는 길 광화문 동화빌딩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탄핵반대집회 때문이었다. 가는 길에 시커먼 옷을 입은 한 백발 아저씨가 유인물 박스를 어깨에 지고 간다. 지나치고 보니 명계남이었다. 이야 딴나라당, 잔민당, 딴민련 꼴통들 때문에 사람들 참 고생이 많다. 난 군대에서의 기억은 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었고 당시의 말을 잘 하지도 않지만, 군대에서 들었던 한가지 말만은 퍼뜩 머릿속에 떠올랐다. "무능한 간부는 적보다 무섭다." 수구 꼴통들은 제발 여의도에서 삽질하지 말고, 빨리 지구를 떠났으면 싶다.
 
이 영화는 다큐집단 푸른영상의 김동원 감독이 12년간 장기수 할아버지들을 따라다니면서 찍은 필름으로 만들어졌다. 무거운 주제가 12년간의 필름속에 녹아 있는만큼 무거운 분위기를 예상했지만, 막상 영화가 시작되니 2시간이라는 시간은 의외로 빨리 흘러갔다. 간첩이라 불렸던 이들은 영화초반 감독의 나레이션대로 그리 무서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세월에 흔적과도 같은 깊이 패인 주름만큼이나 삶의 고단함을 간직한 폭싹 늙은 노인에 불과했다. 이런 사람들을 머릿속의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만으로 30여년간 감금한다는 게 과연 법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건 문명이 아니라 야만이었다. 분단 이후, 남북한 모두 수천명의 공작원을 남파 혹은 북파했으나, 그들의 실체는 모두 당국자에 의해 공식적으로 부인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이렇게 실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도소에 있는 수십년 동안 전향공작이라는 이름의 갖은 고문이 행해졌고 전향하지 않은 사람들은 당국자들에 의해 비전향이 아닌 '미전향 장기수'로 불렸다. 이 단어에서 공안당국자들은 그들이 언젠가는 전향을 할 거라는 자신감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고문과 감금에도 불구하고 전향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히 사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적인 자존심 때문이었다. 전향공작이나 고문을 가하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에게만큼은 절대로 굴복할 수는 없다는 자존심이 전향서에 사인하는 것을 막았다는 거다.

 등장인물들 중에서 유난히 정이 가는 사람은 조창손 할아버지였다. 나는 그의 인격적인 모습에 끌렸다. 평소 말이 별로 없이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면서, 생명을 사랑하고 한없이 겸손한 그의 모습에서 인격적인 완성이랄까 그런 것을 느꼈다. 취로사업에 나가 청소를 하면서 조창손 할아버지는 쉬는 시간에도 쉬지를 않았다. 이유를 물으니 "내가 쉬면 다른 사람들이 할 일이 늘쟎아. 내가 이렇게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다른 사람들이 할 일이 줄어드니까 이거 얼마나 좋은 거야?"라고 답했다. 할아버지들은 교도소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교도소 밖의 생활도 이들에게 가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수십년의 감옥생활에서 얻은 지병으로 항상 몸은 불편했고, 자신이 먹고 사는데 필요한 돈은 스스로 벌어야 했으니 말이다. 이들은 취로사업이라도 할 수 있음을 고맙게 여겼다. 할아버지들은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조그만 일에 토라지기도 하고 서로 장난도 치고 아이스크림을 맛나게 먹기도 하는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들과 같았다. 이런 사람들이 뭐가 두려워서 30여년을 가두어 두었을까?

장기수 할아버지들은 2001년에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으로 송환된다. 북으로 송환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었고, 강제전향이력 때문에 송환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송환된 이후라도 남과 북을 자유로이 오가는 것이 가능하다면 좋겠지만, 현재로선 둘 중 어느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송환이 결정되자 납북피해자 단체에서 이들을 찾아오는 장면이 있었다. 분단과 냉전의 피해자인 그들 중 일부는 격한 감정을 들이밀며 송환반대를 외치기도 했고 납북자들과 연락을 부탁하기도 했지만, 장기수 할아버지들은 납북이란 없다며 납북자체를 부인했다. 이북체제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거의 광신에 가까웠다. 그들은 50-60년대 북한을 떠나온 사람이었고 기본적으로 자신의 체제에 대한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로 하여금 감정적으로 북한 체제에 찬동하도록 만든 것은 아마도 남한에서의 야만적인 수감생활이었을 것이다. 야만은 또다른 야만을 낳는다. 납북자 가족들의 격한 감정표출과 장기수 할아버지들의 집단 히스테리는 엄연히 분단과 냉전이라는 역사적 실재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단순한 이성으로 무자르듯이 평가할 수 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실재를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략적으로 이용해 먹는 놈들은 "무자르듯 평가한 후 몇배로 두들겨 맞아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푸른영상의 김동원 감독과 북한으로 간 할아버지들이 다시 자유로이 만날 그날이 빨리 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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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뻭따끌한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덕에 내 취향과는 맞지 않은 영화를 연거푸 2탄이나 보았다. 이번에는 장장 3시간 반의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다는 말에 보지 않으려고 했으나, 소개팅女의 소망에 이끌려 3탄도 봤다. 영화보구나서 3시간 반동안 고문당하고 나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스펙터클, 과감한 액션, 실사와 맞먹는 CG효과.. 모두 좋다. 하지만 그 지리하게 긴 시간동안 필연성없는 폭력에 시달리고 나면 "도대체 쟤들은 왜 저렇게 싸우지?"라는 물음이 새록새록 피어나는 건 어쩔 수 없다.

머, 서양의 중세에 대해 잘 모르지만, 서양의 중세 신화가 현재의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기껏해야 현실로부터의 도피? 하물며 프로도를 위해 헌신하는 샘, 그리고 왕들과 영웅들을 위해 헌신하는 수많은 '아랫것들'을 보며 이 시대의 "자발적인 복종"에 대해 잠시 생각을 해 봤다. 이 영화의 원작인 반지전쟁이 2차대전이전, 그러니까 귀족과 평민으로 대표되는 영국 구체제의 신분질서가 어느 정도 남아 있던 시절에 씌여졌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범상치 않은 '윗것'을 위해 희생을 감내하는 것이 '아랫것들'의 아름다운 의무라는 식의 뉘앙스를 풍기는, 스펙터클을 가장한 영화가 바로 반지의제왕이 아닐까.

게다가 반지의제왕에서의 곤도르의 섭정은 거의 광인 수준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곤도르를 다스렸던 이실도루의 후손 아라곤왕이 돌아오면서 악의 세력은 물러가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한다. 이 얼마나 웃긴 혈통주의인가? 혈통에 의한 왕위의 계승... 삼성그룹 이건희-이재용으로 이어지는 그룹승계는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 혈통에 의한 왕위의 계승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짓는 그들에겐 왕손의 피가 흐르고 있다면 요정을 아내로 맞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또한, 이러한 근대이전의 서구이야기가 오히려 일본과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인기를 끄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고스포드파크 등의 영화에서 그려지는 구귀족층은 더이상 시혜적인 동정조차 베풀지 않는 쓰레기일 뿐이다. 그러나 모리카오루의 엠마나 기타 메이드류 만화에서 보여지는 귀족층은 부와 명예, 그리고 도덕성까지도 거머쥔 그야말로 범상치 않은 혈통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그에 대한 경배와 의무의 이행은 자발적이며 아름다운 것으로 묘사된다. 실질적인 법적 평등조차 거머쥐지 못한 세상에서 이런 말도 안되는 혈통주의가 판을 치다니.. 이것은 야만으로의 복귀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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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의 마지막날, 종무식을 마치자 팀장이 그냥 가랜다. 집에 가는 길에 씨네큐브를 지나다 이번이 아니면 보기 힘들 것 같아 표를 사서 들어갔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영화 무지 웃긴다. 내용이 웃겨서가 아니라 배우들이 진짜 어설퍼서다. 보고 있으면 피식피식 웃게 된다. 미친놈처럼말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에스키모 부족사회 안에서 권력투쟁이 벌어지는데 그게 애정문제와 얽혀들고 집안의 철없는 것들이 끼여들어 싸가지 없는 짓을 하게 되면서 살인도 나고 아수라장이 되어버린다는 거다.

내가 무식해서 그런건지는 모르겠는데, 평단에서 이 영화를 가리켜 치켜세우듯 "진정한 마스터피스", "놀라운 대서사시","톨킨을 긴장시킨 라이벌"까지는 아닌 것 같다. 그저 주류영화로부터 철저한 변경지대로 인식되던 툰드라지대의 에스키모 전설과 삶에 대한 영화라는 점, 에스키모 원주민어로 촬영되었다는 점, 깐느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할만큼 툰드라지대의 생경한 환경을 계절변화에 맞추어 기막히게 담아냈다는 점이 매력적인 정도다.

평단에서 난리가 난 것처럼 이 영화를 추켜세우는 이유는 평론가집단이 그런 이벤트라도 꾸준히 벌이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 밖에 없는 직종이라는 점, 그리고 그들의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 때문이 아닐까 한다. 영화의 중간중간 그리고 갈등을 해결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역할을 하는 샤먼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야말로 논증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필요조차 없는 '절대지식'이다. 난 윤회, 환생, 영혼 등등 이런거 무척 싫어해서 그런지 그런 장면이 자꾸 나오니까 짜증이 났다.

암튼 러닝타임이 거의 3시간에 달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배경(이 영화속 툰드라지대의 봄과 여름은 정말로 아름답다. 개인적으로 <봄날은 간다>의 화면을 좋아하는데 그 영화나 이 영화나 봄날의 풍경을 너무나도 아름답게 잘 잡아냈다.)과 배우들의 어설픈 연기덕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칼들고 사람 죽이러 가는데 지풀에 자빠지질 않나, 다큰 어른이 토끼고기 혼자 쳐먹겠다고 갖은 궁상을 다떨지 않나, "별들의 고향"에 나올법한 연애씬까지 무리없이 소화해낸다. 특히나 45초간 이어지는 우리 아타나주아 아저씨의 全裸疾走씬은 쳐다보기 민망했다.(특히 난 오늘 맨 앞자리에서 봤거든-_-;;)

그런데 가장 인상깊게 남는 건 아무래도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보여주는 제작과정이다. 이미 문명이라는 것이 깊숙이 침투한 에스키모인들의 삶을 보여주는데, 이제 더이상 에스키모들은 가죽옷을 바늘에 기워입지 않고 샤먼을 찾지도 않는다. 그런 오리엔탈리즘은 서구인들이나, 서구인들의 눈을 가지게 된 우리의 마음 속에만 있을 뿐이다. 아마도 그걸 확인시켜주기 위해 감독은 그런 엔딩크레딧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감독의 사려깊음에 박수를 보낸다. 특히 알고봤더니 우리 오키아저씨는 가죽잠바에 이어폰 꽂고 썬글라스 끼고 다니는 오렌지 에스키모다. 그거보구서 오늘 관객들 다 뒤집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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