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란 자신의 좁은 시선에서 벗어나 타인의 눈으로 세상과 자신을 보는 연습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유명한 명제로 마무리되는 『논리철학논고』를 통해 비트겐슈타인은 마침내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하려던 노력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말할 수 있는 것은 말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않는 삶만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케임브리지의 지성계를 떠나서 오스트리아 시골 오지로 떠났던 것이다.그래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자
마음도 0으로는 나눠지지 않겠지. 한 마음이 애틋해도 상대가 0이면 역시 0일 수 밖에 없으니. 아! 이건 곱셈 영역일까? 어떤 수라도 0으로 곱하면 0이 되어버리니.마음이란게 참... 아니, 0이란게...
어떤 수를 0으로 나눠도 그 값이 무한대가 되는 경우는 없다. 나눗셈은 곱셈의 역逆이라고 정의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수를 0으로 나누고 그다음 0을 곱하면 처음 수를 다시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한대에 0을 곱하면 0이 되지 다른 수가 되지는 않는다. 0을 곱해서 0 이외의 값을 얻을 수 있는 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수를 0으로 나눈 결과는 글자 그대로 ‘무정의無定義’인 것이다.
나에게 하고픈 말, 늘...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니?" <인사이드 아웃>
이 영화를 봐야겠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그려진 더할 나위 없이 잔인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 보편적 ‘비극’은 뜻밖의 위로도 선사한다. 인생은 미래의 어딘가에서 반드시 나를 기다릴 안온한 품을 향해 무릎이 깨져도 달려가는 것이다. 또는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을 누군가를 건강한 모습으로 기다리는 일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그렇게 건널목에 아직 다다르지 않은 젊은이와 그곳을 지나온 더 이상 젊지 않은 이들을 격려한다. 분명 시간은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같은 영화를 보는 일은 삶을 연장하는 편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