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상징 우리 시대의 고전 5
폴 리쾨르 지음, 양명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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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한 집중력을 요하는 책이었다. 대륙의 철학자가 쓴 책답게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석학이라는 거대하고도 낯선 도시에서 정처 없이 두리번거리다가 폴 리쾨르라는 보금자리를 발견한 기분이다. 감히 말한다면 이 책의 해석학은 자크 데리다의 포스트 모던적 해체주의 해석학과 대척점에 서있는 기독교적 해석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2부로 되어있다. 1부는 ‘흠’, ‘죄’, ‘허물’이라는 1차 상징을 해석하고 2부는 ‘신화’라는 2차 상징의 기능을 해석함으로써 인간의 윤리, 도덕, 신앙의 문제들에 천착한다. 먼저 1차 상징에 대해 역자가 정리한 것을 인용해 본다. “흠은 금기와 터부로 이루어진 원시 종교의 악체험이다. 죄의식은 인격적인 존재와의 관계 단절의 체험으로 누구에게나 ‘들어 있는 악’이다. 허물은 죄가 내면화되고 세분화되어 ‘저지르는 악’이다.” 이를 풀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흠’은 어떤 악으로 인해 인간이 스스로 더러워 졌다고 느끼는 체험의 상징이고, ‘죄’는 그렇게 더러운 자신이 거룩한 하나님과 단절되었음을 느끼는 체험의 상징이며, ‘허물’은 죄로 인해 벌어진 하나님과의 간극을 메꾸는 과정에서 그것이 결국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는 체험의 상징이다.

이러한 허물의식은 의로움에 이르는 율법을 요청하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완전한 의로움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무한한 계명도 요청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인간에게 계명이 넘치는 만큼 이를 지키지 못하는 잘못(죄) 역시 넘치게 된다. 그리고 저자에 의하면 바로 이 지점에서,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라는 바울의 선포가 의미를 갖게 된다. 허물의식은 칭의론의 자궁인 것이다.

세 가지 악의 상징에 관한 고찰 후에 저자는 2부에서 이 악의 상징이 어떻게 ‘신화’를 통해 전달되는지 분석한다. 에덴의 인간은 순결한 자유를 지닌 선한 존재였다. 그런 그/그녀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자유를 제한하는 ‘금지’가 아니라 자유에 방향성을 부여하는 ‘한계’였다. 그러나 뱀은 “하나님이 정말로 [……]라고 말씀하셨느냐?”라고 유혹함으로써 ‘한계’를 ‘금지’로 바꾸어 버린다. 그 때문에 선악과라는 한계 아래에서 자신의 ‘유한성’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인간은 이제 금지 아래에서 자신의 ‘유한성’을 극복하고 하나님과 같은 ‘무한성’에 도달하려는 욕망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욕망하는 무한성은 이성이나 행복의 무한성이 아니라 ‘욕망 그 자체의 무한성’이라는 점에서 비극을 예고한다.

그리고 바로 이 '타락 신화’의 2차 상징 속에 흠·죄·허물이라는 1차 상징이 들어있다. 즉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인간의 선한 유한성에 흠이 생겼고(“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창 3:7a) 그 흠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다(“야훼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창 3:8b).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인간의 무한한 욕망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무한한 허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야훼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 6:5).  

이와 같은 저자의 철학적 성서 해석은 깊이 감춰졌던 무엇인가를 마침내 드러내는 듯 심오했다. 또한 내 안에 굳어져 있던 기존의 화석화 된 성서 해석을 벗겨낼 듯 전복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저자가 결론부에서 말한 것처럼 상징은 내게도 어떤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악은 아담이라는 특정인의 죄로 인해 수동적으로 전달받게 된 것이 아니라, 혹 아담이라는 상징 안에서 나를 포함한 보편인간 속에 가능성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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