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슐츠, <근대 형이상학에 있어서의 神 -―철학과 신학Der Gott der neuzeitlichen Metaphysik, 1957>, 이정복 역, 종로서적, 1983.

 

(현재 유통되는 판본 : 발터 슐츠, <철학자의 신>, 이정복 역, 사랑의학교, 1995)

 

  흔히 데카르트로부터 논구되는 근대 철학사는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이전 시대의 철학과 대별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중세의 신중심적 사고로부터 인간중심적 사고로의 이행이라는 사유 중심의 변동을 꼽을 수 있겠고, 둘째는 철학적 사유의 방법론적 변화가 되겠는데, 데카르트 이후 전개된 그 양상의 다양한 차이점들을 무시할 순 없겠지만 그가 내세운 "방법적 회의"는 근대 철학이 이전의 철학과 스스로를 달리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겠다. 그런데, 여기서 철학적 사유의 중심 이동과 사유의 방법론적 변용은 기실 동일한 문제틀로부터 불거져나온 한 가지 문제의 확장이라 볼 수도 있겠다. 중세기를 통해 학적 사유의 폭은 오로지 신앙과 교리에 의해 인도될 뿐이었기에, 그 제한을 벗어나는 행위는 용납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신적 중심점을 이탈한 근대의 인간들은 스스로의 사유를 자기 자신에 의해 확증해야할 절대적인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때문에 다른 무엇보다도 인식 능력에 대한 철저한 회의는 신을 이반한 인간에게 있어 피할 수 없는 과제로 던져졌던 것. 인간의 존재와 사유는 신 아닌 다른 무엇--곧 그 자신으로부터 근거를 찾아야만 했던 상황이 바로 근대이다.

 


  데카르트는 "사유의 중심 이동"과 "방법적 회의"라는 근대 사유의 특징을 도드라지게 내보여준 인물이다. 물론, 데카르트 자신 결코 당대 교회의 가르침을 내놓고 비판한 바 없던 독실한 신자였지만, 그 유명한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사유하는 나의 확실성'을 '신의 존재 증명'보다 앞세움으로써 중세 철학과는 판이한 사유의 행로는 노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방법론적 절차를 통해 체계적으로 확정되는데, 요약하자면 전지전능한 신의 존재가 우선적으로 담보됨이 없어도 '명석판명한 사유'가 가능하여진 것. 그리하여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자들은 사유의 신학적 부담(辯神論)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던 터.

 

   그러나 슐츠의 이 책은 바로 이 점으로부터 문제점을 찾고 있다. 과연 근대 이래의 철학은 신학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는가? 근대의 철학은 신 없는 철학, 막스 베버가 말하는 탈신성화('세계의 각성')가 표현하는 그대로의 세속 철학을 실현하였는가? 신학으로부터 분리된 철학의 모습은 형이상학에서 가장 명징하게 드러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유의 근거를 밑받침하는 제일원리를 궁구하는 형이상학이야말로 신이 떠난 자리를 벌충해주는 근대 철학의 지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결론부터 말한다면 슐츠는 근대 형이상학은 결단코 신학적 사유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신학은 근대적 사유를 가능케한 근거, 혹은 균형추로서 괄호쳐진 채 지속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논문들에서 데카르트를 전후한 근세 철학자들(쿠자누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 헤겔, 후기 셸링, 포이어바흐, 니체, 하이데거 등)이 그 '괄호'를 어떤 방식으로 설정하였는지 알아볼 수 있다.
  그 네 편의 논문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쿠자누스와 근대 형이상학의 역사
    2. 근대 형이상학에 있어서 "철학자의 신"
    3. 근대의 구성적 체계에 있어서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지양
    4. 헤겔의 절대 정신의 체계와 니체의 동일자의 영원 회귀의 체계

 

   아직은 중세에 속하였던 쿠자누스는 그 자신의 변신론을 새롭게 근거지음으로써 근대에까지 이어지는 신학-철학의 관계를 예비한다. 그에 따르면 신은 "보는 자"이며, "보이는 자"로서의 세계 밖에 존재한다. 그런데 "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상호 관계는 서로를 상대에게 의존하게 만들기에 신을 불완전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빌린 쿠자누스는 또한 신에게 "봄의 과정"이라는 제3의 위치를 설정해 줌으로써 이 난관을 돌파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모든 존재자의 단순한 원상(Urbild)로서의 신은 "보는 자", "보이는 자", "봄의 과정"이라는 존재론적 위계에 한정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신에 의하여 "보이는 자"로서의 인간은 그 스스로가 또한 "보는 자"가 아니고서는 신을 인식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 역시 신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그 스스로 "보는 자"이며, 사물과 인간의 관계를 "보이는 자"와 "보는 자"로 연관지을 수 있기에 역시 "보는 과정"을 알 수 있는 것. "존재자는 볼 수 있게 된 신이다."(17쪽) 신의 "봄"이 단지 수동적 관조에 머물지 않고 사물을 창조해내듯, 인간의 "봄"도 사물에 대한 "형성력"을 지니게 된다. 신과 세계, 인간에 대한 새로운 학적 정의를 노리던 쿠자누스의 논법은 결과적으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위상을 부여하게 되었고, 여기서 인간은 세계 내 존재로서 신에 유사한 힘(Macht)--이것이 곧 근대적 의미에서의 주관성, 주체성(Subjektivit t)이다--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정립된 "자율적 주체"로서의 근대인은 중세의 신이 누리던 바와 동일한 존재론적 위상을 부여받지는 못한다. 쿠자누스는 신과 인간의 차별성 역시 논구하길, 신은 "봄"에 의하여 존재자를 "창조"해냈지만, 인간은 다만 그것에 "동화"할 수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신이 창조해낸 세계에 "봄"으로써 동화될 수 있을 뿐이다. 기실 데카르트에 있어서도 이 점은 다르지 않은데,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사유하는 존재의 확실성으로서의 '지금 현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신의 명증성보다 인간 인식--"나"의 확실성을 앞세운 코기토의 한계는 여기에 있으며, 그 "불확실성"을 결코 도외시할 수 없다.

 

  슐츠의 논의는 바로 이 결절점에서 빛을 발한다. 그렇다면 그 "불확실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로부터 유래하는가?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아주 작고 연약하다. 추상적이다. 그것은 두 번째 존재 증명인 신존재 증명을 힘입지 않고서는 세 번째 존재 증명--세계의 실재성을 확증받지 못한다. 이 "불확실성", 존재자의 "유한성"에 대립되는 "무한성"은 바로 신의 것이다: "즉 유한한 주관성은 그것이 주관과 대립하는 힘을 확실할 때에만 자기 자신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힘에 의하려 주관성은 사실상 이미 언제나 기초지워져 있는 것이다."(30쪽)

 

  칸트의 구성적 주관은 이렇게 제한된 근대적 주관의 면모를 숨김없이 보여준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칸트는 현상계 너머의 질서를 논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그렇게 본다면 과학적 사고의 합리성을 정초지워준 것으로 평가되는 칸트 역시 "주관성의 유한성"을 내내 자기 사유의 '벽'으로 절감하였음에 분명하다. 우리는 칸트 물자체의 돌파구로 헤겔을 거론할 수 있겠지만, 슐츠는 여기에 만년의 셸링을 끌어들임으로써 또한 헤겔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개념에 의하여 매개된 철저한 개념으로서의 절대 정신은 그 스스로의 관계에 있어 결코 "절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그러나 헤겔은 분명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터인데, 그의 <대논리학>을 "순수 존재는 순수 무"라는 규정에서 출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와 같이 근원적 초월자의 존재 자체를 아예 무시해버리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슐츠는 니체의 논의가 헤겔의 체계와 유사함을 지적하면서, 결국 "동일자의 영원 회귀" 역시 헤겔과 마찬가지의 형이상학적 체계로 구축됨을 논파하고 있다.(4장) 그러하다면 하이데거의 "존재"는 어떠할까. 슐츠는 <존재와 시간>에 나타난 하이데거의 죽음에 대한 분석을 그 기점으로 삼는다. 하이데거 이전의 철학자들에게 인간의 유한성은 무한한 신에 대비된 제한된 존재자에 불과하다는 점이 가장 중요했다. 곧, 인간의 유한성이란 신의 무한성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도출된 실존적 결론이었던 셈. 그러나 하이데거에게 출발점은 그 어떤 대조나 비교가 아닌, 현존재 자체에서 비롯된다. 현존재에 있어 죽음은 현존재 밖으로부터 이해되어지는 바가 아니라(기독교 신학에서 죽음은 죄의 응보로서 주어지는 것으로 피조물의 운명이라 할 수 있다), 바로 그 스스로로부터 이해되어야 할 바이다. 다시 말해 죽음은 "현존재 그것에 예속되는 한계"라 할 것. 죽음은 인간을 앞서 있으며 인간의 유한성을 열어젖히는 현존재의 가장 외적인 한계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바로 이로부터 죽음-유한성은 현존재의 의미로 나타나게 된다. 하이데거의 죽음에 대한 분석은 <존재와 시간>을 "신이 없는"(gott-loss) 책으로 만들었으며, 형이상학의 신학적 기반으로부터 완전히 절연되도록 만들었다.(2장) 하이데거는 계속하여 그러한 현존재가 "無" 안에 있음을 이야기했고, 이 "無"는 후기에 이르러 "존재"와 연관되지만("Das Nichts ist das Sein selbst"), 궁극적으로 그가 노정하는 형이상학은 근대 형이상학의 '종말'이자 '완성'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기독교적 인격신의 전통으로부터 철저하게 이탈한 "철학자의 신"이 정위되었던 것이다. 기묘하게도 하이데거의 방식은 헤겔이나 포이어바흐의 전통과는 다르게 최고 존재자를 포기함으로써 달성되었다. 그렇지만 "철학자의 신"은 마찬가지로 세속화된 기독신을 타자, 그 逆像으로 간주될 위험이 있을 터이다. 우리는 그러한 예들을 헤겔(관념론)과 포이어바흐(유물론)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통 신학의 신을 추방하고 난 빈 자리를 인간은 그 스스로가 만든 신으로 대체하고자 하였던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까. 프랑스 혁명기의 자코뱅이 '이성의 신'에 대한 경배를 준비하였다는 사실은 그러한 딜레마를 너무나도 극명하게 증거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그런 철학사의 난점이 지닌 원인을 분명하게 갈파하고 있다. 그는 형이상학의 제일 근거로서 설정되었던 '세속화된 신("철학자의 신")'--'절대 정신'과 '감각적 인간(유적 존재)'을 포기하고 그 최고의 자리에 아무것도 돌리지 않음으로써("無") 근대 형이상학의 딜레마를 극복하였던 것: "인간은 근거를 만들려는 그 의지를 포기해야 한다. 無 자체가 이러한 길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無가 근거지우려 하는 의지를 무의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71쪽)

 

  어찌 본다면 하이데거에 이르러 더 이상 슐츠의 주장은 유효하지 않은 것 같다. 슐츠는 일관하여 주장하길, 근대 형이상학은 그 자신의 타자로서 기독교적 신을 항상 對他的으로 의식하는 가운데 정립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근대 형이상학이 성립되기 위한 내적 필연성으로서의 "對關係"(e contratio)는 인간의 "자율적 자기 의식"(autonomes Selbstbewusstsein)마저 신학에 비친 상을 모델로 삼도록 요구했다. 여기서 신학은 극복된게 아니라 단지 괄호쳐진 채 철학의 반대편에 은폐되어 있었다는 말. 그러나 슐츠의 주장은 하이데거에게서는 돌연 무력함을 감출 수 없는데, 하이데거는 최고 존재자를 옹위함없는 전적인 "無"에 현존재를 맡겨버린 탓이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無-存在'에서도 역시 타자화된 신의 그림자를 엿보려는 슐츠의 언명은 논리의 초월마저 요청하는 듯 보인다.

 

  "신을 어떤 규정된 존재자로 그리고 파악할 수 있는 존재자로 만들어 버릴 때 경험된 것은 단지 사유의 힘이었다. 그것은 규정된 신적 존재자까지도 지배하는 사유 바로 그것의 힘이었다. 그 이유는 규정된 신적 존재자가 바로 사유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사유의 본질)은 모든 규정된 존재자, 파악할 수 있는 모든 존재자를 사유하면서 넘어선다. 이 존재자에 대한 사유의 힘을 끝까지 생각한 사람은 사유의 무력을 경험하기에 이른다. 사유 자신이 또 그 자체로서 있을 수 없는 이 무력을 경험하게 된다. 만일 그 사유가 존재 자신으로부터 제약받고 가능성을 받지 않으면 그렇다. 이 마지막 길을 감히 걸어가는 자. 그는 더 이상 사유 안에서 용해될 수 없는 철학자의 신을 찾는다."(76-77쪽)

 

  사유를 넘어서게 된 사유. 그것을 우리는 과연 여전히 "사유"라고 부를 수 있을까. 사유의 한계(유한성)를 넘어서게 되었을 때 만나는 바, 그것은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이며 슐츠는 "신"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슐츠에 의하면 하이데거의 "존재"조차 '신의 타자'에 다름아니다. 저자의 사유가 흐르는 맥은 하이데거의 영향력을 완연히 보여주고 있지만 결국 신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 평문의 논조와 마찬가지로 역자인 이정복 교수 역시 슐츠가 하이데거의 "존재"를 '신의 타자'로 간주함은 지나치다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이미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학이 걸었던 길보다 더 먼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던가? 때문에 리차드슨의 "존재는 신과 신들이 나타날 수 있는 그 영역이 미리 있기 때문에 세속화된 신일 수 없다"는 진술은 단순한 논리 이상의 설득력을 갖는다.


  국역본으로 180여쪽에 이르는 비교적 짧은 책자이지만, 그 내용은 사뭇 사람을 감탄하게 만드는 바 있다. 우리는 철학사를 통해 교과서적 내용을 숙지하기에 바쁘기에 근대 철학사의 내용을 인간학의 변용으로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슐츠는 개개 철학자들의 사유에 내재된 신의 영역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만도 이 책은 철학사의 경계를 넘어 신학사적 자취도 남길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다만 아쉬운 점은 1957년 간행되었던 탓에 현대적 논의는 거의 담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철학사적인 사전 지식이 충분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거의 한 장도 제대로 독해되지 않을 성싶을 정도로 어려운 책이라는 점이다. 여기엔 지나치게 직역조의 번역도 문제가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세계적인"이라 옮긴 독어의 원어는 "weltlich"인데, 이를 곧이곧대로 가져다가 "세계적 존재자"라는 식의 번역을 내놓는다면 너무나도 이상한 조합이 되지 않을까. 아무튼 교양을 넘어선 철학사의 심도를 짚고자 하는 이들에겐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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