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윽고 슬픈 외국어 -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사상사 / 201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윽고 슬픈 외국어'를 읽고 있다. 작가가 그 언젠가 80년대?쯤 미국 프린스턴에서 살면서 쓴 에세이를 모은 책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비교적 최근 나온 세 에세이집보다는 알차고 조밀하고 재미가 있고 하고자 하는 말이 있다. 앙앙이라는 일본 잡지에 연재한 에세이를 모은 에세이집 (출판사 '비채'에서 나온 미니멀리즘하고 모던한 표지의 에세이집 시리즈)을 읽은 사람 중에는 '그래서 결국 네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시시콜콜한 잡담이냐? 조악한 문장력하고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던데, 그보다 초기작인 이 에세이들을 읽어 보면 젊은 하루키가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다는 걸 알게 될 거다.


하루키의 에세이는 '녹차 회사에서 내는 일본 최고의 우롱차' (본인 표현에 의하면)를 표방하고 있지만 여러모로 도움이 되고 작고 확실한 행복을 가져다준다. '먼 북소리'같은 건 너무 진지해서 토가 나올 지경?에다가 좀 신경질적으로 작가 정신이 묻어나지만, 이 '이윽고 슬픈 외국어'의 경우에는 그런 면이 조금 덜 해서, 젊은 하루키의 조금은 더 진지한 일상 잡념의 구체화 시전을 볼 수 있다.


재즈 카페와 작가를 겸업하다가 재즈 카페를 폐업하고 나니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게 되었다는 얘기, '내려놓고 나니 그 무게를 알 수 있었다'라든가, '그가 생각하는 창조성과 다른 이가 생각하는 창조성은 이름은 같아도 실제로는 전혀 다른 장소에서 다른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는 동명이인 같은 게 아닐까 싶다'같은 문장들은 뭐랄까, 허세라고 부를 수 있는 여지가 조금도 없다.


하루키의 소설에 대해, '왜 이 작가는 여고생의 가슴 크기나 엉덩이 얘기를 하지 않으면 소설이 안 되는 거야?'라고 역정을 내는 점잖은 분들이 많은 모양이지만, 하루키는 여자의 성 충동에 대해서도 꽤 정교하게 주파수를 맞출 줄 아는 몇 안 되는 '세계적' 작가 중에 하나가 아닐까 나는 감히 그렇게 생각해 본다.


여튼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으면, 그리 심각하거나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에, 그 특유의 분위기만 참으면, 대충대충 읽어 넘길 수 있고, 급기야는 나도 여러가지 의미로 이런 에세이를 쓰고 싶다는 생각과 용기가 일어나기 때문에 마음이 헛헛할 때 읽으면 도움이 됩니다. 뭐, 그런 이야기.


post script : 그런데 왜 무라카미 씨를 언급할 때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면' 이라고 평론하는 사람이 많은 거지? 우리나라와 다르게 두 어절인 이름이라서 그 중 한 어절만 따서 얘기하면 뭔가 더 전문적인 느낌이 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그야말로 소설가 이문열씨 작품을 언급할 때 '문열의 소설을 읽으면'이라고 하는 것과 동급인데. 아무래도 외국인이니까 자기 좋을 대로 친하지도 않은데, 게다가 비판하면서도 '이름을 막 부르게 되는' 그런 현상인 것이겠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