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ver Let Me Go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 Vintage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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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잡았을 때, 그리 어려운 단어가 아님에도 영한사전을 몇 번이고 찾게 했던 단어들이 있다. carer, donor, fourth donation가 그 단어들이다. carer는 간병인이고, donor가 장기 기증자인 것까지는 이해가 가는데, 저 fourth donation의 fourth라는 단어가 영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네 번째라는 뜻 말고, 다른 뜻이 있나? 도대체 어떻게 장기기증을 네 번째까지 할 수가 있는지 나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함께 산 번역본의 뒷 페이지를 운 좋게도 읽지 않았기에 이 책의 중반을 지날 때까지 이들의 삶이 타인에 의해 철저히 계획된 삶이고 이들은 인간의 장기 기증을 위해 만들어진 복제 생명체들임을 전혀 몰랐다. 펼쳐지는 줄거리에서도 아무런 직접적인 언급이 없고-줄거리는 주인공 셋의 헤일셤 시절 회상 내용이 주를 이룬다- 다만 언뜻 언뜻 비치는 단어들로 그들을 기다리는 운명을 잠깐씩 생각해 보게 되면 그것은 너무도 끔찍해서, 나는 나의 상상력이 극단적으로 치달아 빚어낸 최악의 시나리오라고, 그리고 나의 모자란 영어 실력이 잘못 해석한 조악한 암시라고, 짐짓 그들의 현실에 직면하기를 미뤄왔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타난 나의 그런 반응은 누구보다도 내가 그들을 타자화하는 the world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 

 

<The world didn't want to think about you students, or about the conditions you were brought up in. In other words, my dears, they wanted you back in the shadows.>

 

사람들은 그들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아 한다. 그들이 그늘 속에 머물러 있기를, 자신들의 골칫거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믿기 힘들만큼 악하고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이 목적이라는 좋은 명목을 만나 이뤄낸 성과란 이런 것이다. 애초에 인간이란 존재가 그런 일을 할 줄을 모르면 그런 존재가 생기지도 않았다. 상상력이 가는 모든 곳에는 실현가능성이 내포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그들을 창조해 낸 과학자는 아니지만 조금도 죄책감을 피해갈 수 없었다.

 

자신의 삶이 자신에게만 비밀이라면, 어떨까. 눈부실 만큼 아름다운 유년시절과 아이 특유의 천진함과 조바심 섞인 교우관계를 위해서라면, 이들은 자신의 운명을 몰랐어도 좋았던 걸까. 모든 일의 결국을 그들이 알았더라면, 달라질 게 있었을까.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 모든 것이 인간과 같지만 자율성만은 없는 존재. 그 존재들이 경험하는 인간의 삶.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이기에 인간과 똑같은 질료와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에게도 허락되지 않는 삶의 부분이 있는 걸까? 사람들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인간이란 존재의 본질은 과연 무엇인지 알기 위해 철저히 통제된 상황에서 그들이 생각하는 인간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을 남기고 모두 남김없이 가져가버리는 구성으로 등장 인물들을 실험해 보기 좋아한다. 심지어 그들이 등장인물에게 남긴 것이,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 무작위로 주어지는 상황적인 어떤 것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해야 인간이란 존재의 가장 자연스러운 면을 보게 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건 일견 사실이고.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는 듯한 상황에서도 존재가 피할 수 없는 그 실존 상황은 그들이 인간임을 드러내는 자연스러운 발로가 된다.

 

복제 인간의 처우에 대해 이런 저런 논의가 오가고 여러 풍조와 시류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도 삶이 있다는 것이다. 외부인인 우리에게는 그들의 정체-범주화-가 중요하지만, 주체인 그들에게는 그들의 대상화된 삶 자체가 가진 전부이기에.

 

"It might be just some trend that came and went, But for us, it's our life."

 

그 누구도 'poor creature'가 아닌 존재가 세상에 있었던가. 삶 앞에서는 죽음도 시간을 멈추는 것을.

 

챕터 12, 책의 중반부에서(이 책은 챕터 23개로 구성되었다) 이 책의 핵심 주제라고 할 수 있는 단락이 나온다.

 

Why would there be a "natural" generation between us and our models? They could have used babies, old people, what difference would it have made?

But around here, we'd all sense we were near territory we didn't want to enter, and the arguments would fizzle out.

 

아이나 노인을 가져다 쓰면 될 것이지, 왜 꼭 우리여야 하나? 하지만 더 이상 얘기하다간 돌아올 수 없는 인식의 강을 건너게 될 위험을 감지하고 입을 다물어 버린다.

 

아는 것과 질문하는 것은 한가지이다.그들은  인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질문을 하고, 인간이 아니면 감지할 수 없는 인식의 위험성을 감지한다. 답을 알기에 질문하는 것. 인생의 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은 인간임을 드러낸다. 그것을 가리는 것은 철저한 비인간성, 그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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