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식탁 위의 책들 -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종이 위의 음식들
정은지 지음 / 앨리스 / 2012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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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저자의 블로그에 들어가게 되었었다. 어쩌다보니 내 취향의 포스팅들을 보게 되었고, 잠깐이나마 역했다.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자신의 모습을 보다보면 어느순간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게 나다.
책을 썼다길래, 어떤 팔자가 좋은 사람일까 싶은 생각이 들어 그 책을 찾아보니 '식탁 위의 책들'이었다. 알라딘에서 이 책의 표지로 된 공책을 주는 행사를 해서 알고 있는 책이었다. 그리고 음식과 관련된 책이라면 안 읽거나 안 사고는 못배기는 나는,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리게 되었다.

빌려온 책은 생각했던 것과는 여러모로 달랐고, 결론적으로 나는 이 책이 좋다.

일단 일러스트가 글 못지 않은 작품이다. 좋아하는 스타일의 non-agressive한 꼴라주와 나같은 성미의 사람은 하다가 색연필을 집어던지고 말것 같은 단정하고 한결같은 채색의 그림들이 책을 따뜻하게 해준다. 마치 동화집을 읽는 것만큼의 따뜻함이다.

둘째로, 중복되는 글은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내가 책의 소장성, 완성도를 평가하는데 쓰는 나만의 기준으로, 챕터 시작면에 본편에서 나올 글이 '인용되어'나와 있는 것은 싫다.(self-quotation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걸 하는걸까. 논문도 abstract는 자기글로 고쳐서 다시 쓴다.) 요즘 나오는 책들에 보면, 대체 무슨 스타일을 중시하려고 그러는지는 모르겠는데, 챕터 시작하는 intro페이지에 대체로 편집자 임의로 이게 이 챕터의 가장 중요한 문장들이라고 생각하는 소위 '핵심 narrative'가 들어가는 걸 흔히 본다. 나는 그걸 열심히 읽고 나서 본편을 읽을때 그 문장이 또 나와서 내 눈이 그 문장들을 두번 읽게 되면, 왠 활자낭비에 시간낭비가 아닐 수 없어 매우매우 화가 난다. 배신감이 들 정도다. 이건 마치 내가 13000원내고 읽을만한 글 250페이지를 주문했는데, 그중 10페이지는 중복되는 것을 발견했을때 화가나는 그런 양상의 화다. 믿음이 깨어진다. 아마도 이건 비디오 세대인 멍청이들을 위해 '지식e'같은 걸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몹쓸 편집이다. 정은지의 책에는 그런 멍청한 편집 구성이 없다. 챕터를 시작하는 글이건, 본편의 글이건, 문학 속의 음식묘사를 인용해 놓은 글이건 겹치는 곳이 없어서, 이거 나를 놀리는거야 라는 불신감이 들지도 않고,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글을 나를 어렵게 하지 않는다. 어렵게 하지 않다는 것은 쉽게 읽히고 지루하지 않고 기분나쁜 구석(offensive)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글을 쓰다보면 정말 내가 원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텍스트가 개인적인 감상이상의 것이 되기 위해 한 자료조사에서 나온 결과물들을 버리기에 너무 아까워 글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상관없이 백과사전 서술을 하고 마는 멍청이들이 있다. 그렇게 텍스트 분량을 늘여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어쨌든 정은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너무 어려운 말을 쓰지도 않고, 내가 전혀 알고 싶지 않은 역사적 사실을 집요하게 늘어놓지도 않는다.
'OO의 역사를 모르면 소양 떨어지는 애호가에만 머무르는 것처럼 느껴지니까 강박적으로 서술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세상엔 의외로 많으니까. 심지어 그걸 독자가 원하고 있고 독자를 위한 배려라고 생각하는 바보들도 있다. 나는 그것이 독자를 무의식적으로 배려하는 그녀의 타고난 감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적절한 책을 고른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지은이는 어린이 책 서점에서 일했고 번역도 한다. (책도 쓰고 블로그도 한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나오는 대부분의 책은 어린이용 영미권 소설이다. 나는 그 점 또한 좋다. 잊고 있었던 내 자신의 어떤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메리포핀스, 빨간 머리 앤, 소공녀, 집 없는 아이, 심지어 호첸플로츠 까지.. 내가 어린시절 달디 달게 읽고 닳고 닳게 읽었던 그 시절의 명작동화들, 메르헨 동화집이 나의 일부분을 구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나는 조금 더 편안해 졌달까. 왜 예전에는 나는 그렇게 도피처가 많았는데 이제와서 막다른 골목에 있다고 느끼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은이가 그들을 바라보는 관점도 마음에 든다. 그녀는 어리고 고집스럽고 독립적이고 자신만의 불행을 가진 소녀/소년들을 찬양하거나, 멸시하거나,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작가에게 이제보니 허무맹랑한 거짓말쟁이라고 얘기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그녀만의 방식으로 그들을 껴안는데, 메리포핀스의 적은 급료를 동정하고, Sara가 어디에서 공주ego와 자신의 진짜 처지를 어느정도 타협했는지 서술하고, 키다리 아저씨와 결혼한 snob 주디라고 생각하지만 속편에서 나오지 않을까 끝까지 조바심내며 좋아해주는 식이다.

처음에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녀가 그저 먹는 것과 요리와 먹는 행위를 좋아하고 글을 잘 쓰는 사람인줄만 알았다. 하지만 책을 덮을 때에는 그녀가 아동문학을 사랑하고 영어를 읽고 쓰는 것을 전혀 불편해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블로그를 링크하여 시간날때마다 들르고 싶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권하는 대로 절대로 이런저런 책을 들고 밥상머리에 앉지 못한다. 그러면 나는 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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