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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
은유 지음, 이지선 북디자인 / 읻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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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듣고 이를 담아내는 은유작가의 책이라 당연 어느 소외계층, 혹은 사회적 문제점들을 표면으로 드러내는 인터뷰집이라 생각했다. 은유 작가의 문체나 글이 주는 힘이 좋아 작가의 이름만 보고도 바로 선택해 읽는 편인데, 이 책의 표지를 보고는 조금 의아했다. [한국 시 번역가 인터뷰 산문] 이라니. 사실 문학에서도 조금은 비대중적인 장르라 할 수 있는 ‘시’라는 장르가 약자에 속할 수 있으니 그를 번역하는 이들-초약자가되는-의 목소리를 담은 것인가? 궁금했다. 작년부터 소설이나 에세이보다는 가볍게 들고다니고 글 한 편, 단어 하나로도 하루종일 여운과 온도를 느낄 수 있는게 시 장르라는 걸 알고는 한창 탐독중이었는데, 이 장르를 외국어로 번역하는 이들의 존재에 대해 너무나도 신기했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는 형식도 자유롭고, 글도 이전의 ‘시’라는 형태에서 많이 벗어난, 읽기에 부담없는 것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소설이나 다른 장르에 비해서는 아직은 한참은 허들이 높은 편이고 인기도 그만큼 많지 않을텐데 도대체 누가?



은유 작가는 일곱 명의 시를 번역하는이들을 인터뷰 했는데, 이들의 세계를 탐험하는 일은 너무나도 경이롭고 놀라운 경험이었다. 하나의 언어를 또 다른 언어로 바꾸는 일은 단순히 단어 하나, 글자 하나만 바꾸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한국어 시 안에 응축되어 있는 뜻, 분위기, 뉘앙스, 그리고 작가의 의도를 명확히 알고 난 다음, 이와 부합한 번역하는 언어의 분위기, 문화, 뉘앙스 등을 고려한 전환작업. 상상조차 되지 않는 작업을 하는 이들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벅찬 일인데, 책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이러한 한국 시 번역작업에 도달하게 된 과정과 작품을 번역하는 방법, 한국 시에 대한 번역가들의 생을 살펴보자니 그들만의 서랍에 담겨있는 것들을 훔쳐보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최근까지 좋아하던 시인의 작품을 번역한 번역가들, 한국에서 유독 배척되는 쿼어문학의 명맥을 유지하려 애쓴는 번역가들, 한국사람도 어려운 이상의 시를 영어로 번역하는 작가 등등. 책을 펼치기 전에 그 대상이 ‘약자’일 것이라고 섣불리 생각한 스스로가 너무나도 한심하고 이 장르에 속해 있는 모든이들에게 미안했다. 그 어느 장르의 작가들과 번역가들보다 더 단단하고, 강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시인들을 시를 읽으면서 좋은 작품을 발견할 때 늘 들었던 생각이 있다. 이러한 멋진 작품들도 잘 번역만 되면 우리가 외국 시나 소설을 쉽게 접하고 감동하는것 처럼 외국인들도 이 멋진 작품들을 감상하고 감동할 수 있을텐데 하는 것. 한참은 열악하고 비주류적인, 상업적이지 않다 생각하는 이 분야가 가진 가치와 의미를 찾아내어 이를 제대로 다른 언어를 쓰는 이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았다는 사실에 책을 덮는 순간까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감동과 감사가 한참을 마음 속에 머물러 있었다.


어느 시 번역가는 시 번역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당연히 시는 번역하기 어렵죠. 시는 어쨌든 언어를 극한으로 밀어붙이고, 특별히 이해받고 싶어 하지 않는 경험을 만드는 장르니까 더 어렵죠. 근데 우리가 소통을 할 때 오해를 감수하고 말하는 것처럼 시 번역도 그냥 사람이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일 중에 하나 아닌가 싶어요. 그걸로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다면, 그걸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다면…. 시는 번역을 할 때 그 독자들한테 애정을 보내는 느낌이에요.

아름다운 일 중에 하나를 하는 것, 누군가과 이어지는 일을 하는 것. 시 구절같이 아름다운 작업관이다. 은유 작가가 풀어내는 그만의 편안한 화법과 담백한 문체도 너무나 마음에 들었던 독서였지만, 무엇보다도 시 번역이라는 장르에 대해 조금 더 들어가 살펴보고 이들을 열렬히 응원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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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다른 열두 세계 포션 6
이산화 지음 / 읻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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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고르는데 있어서 유독 소설 장르에만 편식이 심하다면 심한 편인데, 특히나 공상과학 소설이라하는 분야는 그 명칭만큼이나 멀고도 가까이 하기 어려운 장르였다. 집어 들기만 하면 다 읽을수나 있을까 걱정부터 앞선 책들과는 달리, 얇은 두께에 묘한 일러스트 위 작은 글씨로 적힌 <전혀 다른 열두 세계>는 좀 더 독서의 범위를 넓히고자 했던 내 시야에 한번에 들어왔다. 하나도 아니고 전혀 다른 열 두개의 세계라니. 외국 고서점을 거닐다 우연히 꽁꽁 숨어있던 비밀의 책을 발견한 기분마저 들었다.



책은 열 두개의,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열 세개의 초단편이 담겨있었는데, 이야기 하나 하나가 책의 제목처럼 전혀 다른 열 두 세계의 장면과 사건들을 밀도있게 보여준다. 장르 소설 답게 각각의 단편을 넘길 때 마다, 눈을 감았다 뜨니 새로운 세계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 SF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간접체험을 가능하게 했다.

책 속에서 또 하나의 장르적 초단편인 <열세 번째>를 제외한 열 두개의 세계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세계는 <이무기 시절도 한 때>와 <새로고침>이었다.



네안데르탈인과 호모사피엔스가 동시대에 공존했으나 기후변화와 생존에 강했던 호모사피엔스가 결국 살아남아 진화를 거듭해 우리 인류로 이어지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소위 ‘우월한’종의 진화과정을 지켜보던 네안데르탈인은 어떠했을까? 하는 궁금증을 늘 품고 있었는데, 이 두 편의 초단편을 읽고 이어진 상상이 이를 조금 해소해주었다. (물론 소설 속의 대상과 장면은 나의 질문과는 완전히 다른 것들이다.)



<이무기 시절도 한 때>에선 본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다른 종으로 진화를 하게 되는 설란과 그를 지켜보는 진화하지 못한 담초가 등장한다. 누군가 바라는 존재로 변화해야하는 선택아닌 선택을 받은 자는 마냥 좋았을까? 책 속에서 어느 순간 용으로 변화해 이곳을 떠나게 될 설란을 보며 담초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생각해보면 용으로 변해가는 내내 설란이 마냥 신나기만 했을 리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무섭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내가 찾아본 내용을 당사자가 찾아보지 않았을 리도 었었다. 학교에 못 가게 된 사람도, 가족과 헤어질 사람도, 곧 하늘로 떠나야 할 사람도 내가 아니라 설란이었으니까.

담초의 설란에 대한 부러운 마음이었을까? 설란은 정말로 무서웠을까? 사실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용이 된 설란도, 끝내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같은 담초도, 뭐가 되었든 각자의 모습으로 각자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꼽았던 <새로고침>의 세상은 좀 더 사실적이고 실제로 살고 있는 우리의 세상과 맞닿아 있다. ‘변화’라는 단어로는 부족한, 완전히 ‘새로고침’ 해야하는 세계에서, 전환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앞선 변화에 패배한 이들의 다가올 ‘새로고침’의 순간에 대한 예민함과 두려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단순하게는 정권이나 정책의 변화에서부터 기술의 변화와 세대와의 급격한 격차, 더 나아가 새로운 환경의 등장이라는 변혁의 파도앞에서, 이를 넘어 볼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이들은 어떻게 살아남아 생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했다.

가장 강하고 튼튼한 전사들은 내가 전해주는 ‘새로고침’의 내용에 별 관심이 없음을. 반면 내 목소리에 누구보다도 주의를 기울이는 건 다치고 아픈 사람, 홀로 남은 사람, 집을 잃고 떠돌다 우리 부족에 흘러들어온 사람임을. 이미 한번 새로고침에 버림받은 그들에겐 변화를 너끈이 견뎌낼 여력이 없어, 다음 새로고침이 그들의 적이 아니어야만 간신히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새로고침의 결과가 누군가에겐 진정 치명적일수 있음을 알았다. 위기를 위기로 받아들일 줄 알았다. 오직 그들만이 나처럼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눈을 하고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형태의 진화와 환경의 변화에 약한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다른 누군가의 진화나 앞으로 그들에게 닥칠 변화를 ‘바라보는 것’뿐이다. 이들이 의도적으로 바꾸거나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조금은 염세적이기도, 희망이 없어보이기도 하지만, 작가가 그린 세상으로 들어갔다 나오면서 오히려 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 할 수 있다는 것에 너무나 큰 안도감마저 들었다. 좀 더 고민하고 생각해 볼 새로운 방 하나가 생긴것이다. 독서편식을 깨 보고자 큰 맘 먹고 고른 작지만 큰 세상이 담긴 새로운 장르 덕에 장르소설을 좀 더 찾아 들어가보고 싶어졌다. 토끼굴의 앨리스처럼.



생각해보면 용으로 변해가는 내내 설란이 마냥 신나기만 했을 리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무섭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내가 찾아본 내용을 당사자가 찾아보지 않았을 리도 었었다. 학교에 못 가게 된 사람도, 가족과 헤어질 사람도, 곧 하늘로 떠나야 할 사람도 내가 아니라 설란이었으니까.

가장 강하고 튼튼한 전사들은 내가 전해주는 ‘새로고침’의 내용에 별 관심이 없음을. 반면 내 목소리에 누구보다도 주의를 기울이는 건 다치고 아픈 사람, 홀로 남은 사람, 집을 잃고 떠돌다 우리 부족에 흘러들어온 사람임을. 이미 한번 새로고침에 버림받은 그들에겐 변화를 너끈이 견뎌낼 여력이 없어, 다음 새로고침이 그들의 적이 아니어야만 간신히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새로고침의 결과가 누군가에겐 진정 치명적일수 있음을 알았다. 위기를 위기로 받아들일 줄 알았다. 오직 그들만이 나처럼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눈을 하고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결국에는 인간 시절의 낡디 낡은 추억을 포기하고서 진정으로 신이 되길 선택하지 않을까? 그렇게 믿으며 미열은 조금만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한때 인류는 환경오염과 무분별한 사냥이 여섯 번째 대멸종을 불러왔다면서 두려워했다지만, 지금은 그만한 대멸종이 매 순간 벌어지며 동시에 무수한 종이 새로이 탄생하는 시대니까.

그때까지 나도 도와줄게. 호랑이가 끝까지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덜 처참하게 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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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악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송예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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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연말 흥행했던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오펜하이머>를 꽤나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있다. 맨하튼 프로젝트, 트리티니 실험과 같은 역사 속의 큼직 큼직한 키워드로 기억될 세계대전 시기, 유수히 많은 과학자들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이 엄청난 흥분과 놀라움을 더해주었었다. 존 폰 노이만은 사실 대학시절 책에서 자주 등장하던 ‘게임이론’을 만든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지 러처드 파인먼이나 아인슈타인만큼 익숙한 학자는 아니었다. 사실과 허구를 그 어떤 요리사보다 잘 버무려 이야기로 내어놓는 벵하민 라바투트의 신작이라 고민 없이 펼쳐본 책 <매니악>을 통해 역사의 먼지더미 아래 숨겨져 있던 조니(존 폰 노이만)가 살던 장면으로의 시간이동을 하는 경험을 했다. 뮤지컬과 소설로 유명한 <레베카>에서 주변인들의 서사를 살펴보며 윤곽을 드러내는 레베카처럼, 책에서는 주변 과학자들과 인물들의 말과 에피소드 속에 조니의 형체가 선명하다.



흔히 천재들의 어린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은 듯 했던 다른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 까지 보았던 연치,

나치의 광풍이 몰아치기 직전 나치와 첩자와 독일의 유수한 인사들이 북적거렸던 루테르스트라세 구역 식당에서 탈출계획을 모의하던 긴장된 상황과 그렇지 못한 조니의 태도

영화 오펜하이머로 조금은 더 익숙했던 로스 엘러모스에서의 조니를 포함한 과학자들의 에피소드들


애니악에서 매니악으로의 개발, 그리고 거기서 이어진 수소폭탄과 새로운 생태학으로의 시도등

처음에는 너무나 멀고 어색한 인물이었던 존 폰 노이만과 그의 궤적에 함께 한 사람들이 조금씩 가까워 지면서 어느 순간 그들의 장면 속에 함께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100프로 이해할 수 없는 수학과 과학적 이론들임에도 그들의 생의 장면들은 고스란히 다 이해가 되는 신기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수학분석기와 숫자 적분기 및 계산기 (Mathematical Analyzer, Numberical Intergarator and Computer), 즉 매니악(MANIAC)에서 코로나시기 이세돌과 커제와의 바둑 대국에 이르기까지 아직 끝나지 않고 계속 진행 중인 ‘지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생각해보게 되었다.


소설이라기엔 실화같고, 실화라기엔 허구가 섞인, 앞으로 인간을 초월한 ‘지성’의 세계를 살아갈 우리가 꼭 한번 읽어봐야 할 책이 아닐까. 처음 시작은 어려웠으나 너무나도 깊이 장면 장면에 빠져드는 바람에 그 여운이 너무나도 길었던, 새해 독서로 아주 진한 향기를 남긴 책이었다.

우리가 ‘가젯’이라고 부르던 폭발 장치 때문에도 골머리를 앓았다. 타워 꼭대기까지 올라기는 과정에서 가젯이 헐거워져 흔들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그대로 떨어져 폭발할 뻔 했다. 폴탄의 생김새는 우스웠다. 커다란 강철 구체에 전선과 코드 뭉치가 바깥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사악한 동시에 조금 깜찎하달까. 어이없이 들리겠지만 정말 그랬다. 기폭 장치를 집어 넣는 구멍들은 테이프로 덮여 있었는데, 흰색 테이프가 십자가 모양으로 붙어 있어 꼭 붕대 같았고, 결과적으로 폭탄의 생김새는 다쳤든지 두들겨맞았든지 해서 부서지기 직전에 겨우 꿰매붙인 프랑켄슈타인의 작은 괴물 같았다.

우리의 컴퓨터는 최초가 아니었다.
세 번쨰도 못 되었다.
하지만 무려 프로그램이 내장된 컴퓨터였다.
모두가 우리를 따라 했다.
우리는 연구의 매 단계 하나하나를 논문으로 발표해 세상에 공개했다.
그렇게 우리의 컴퓨터는 세계 천 오백여 곳에서 복제되었다.
청사진이 된 것이다.
디지털 우주의 D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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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본 후에 다스리는 마음
수아지크 미슐로 지음, 이현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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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와의 단절의 시간이 길어지던 코로나 시기,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꽃꽃이었다. 꽃꽃이라고 해서 무작정 꽃을 예쁘게 배치해 꽂아보는 것이 아니었다. 꽃의 모양과 줄기의 라인, 전체적인 형태에서부터 세밀한 부분까지, 모든 부분을 살피고 혹여 흠집이 있거나 곧지 않는 줄기조차도 어떤 면을 쓰일 수 있는지, 어떤 아름다움으로 표현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이었다. 무언가를 바라보고 살펴보면서 그 진가를 알아내는 것. 이케바나와 꽃꽃이의 시간 동안 내가 채워갔던 것들은 명상의 일부였고 불안한 내면을 바라보고 다스리게 하는 힘이었다.



<바라본 후에 다스리는 마음>에서는 실로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레 스며들었던 시간들이 전부 ‘명상’의 시간이었음을 알려주었고, 좀 더 주변의 것들을 바라보고 살펴봄으로써 좀더 바른 명상의 시간에 젖어들 수 있도록 도와준다. 가장 좋았던 점은 기존에 존재했던 여러 예술과 심리에 관한 책들과는 다르게, 익숙한 유명 작품들과 더불어 새로운 현대 작가들의 그림, 사진, 그리고 음악까지 다양한 매체를 곁들여 소개해주었다는 사실이다. 현대작가들의 작품들을 명상과 성찰의 방법으로 들어가는 도입에 소개하고 보여줌으로써 좀 더 오래도록 그 방법과 내용을 기억하고 떠올리기 쉽게 도와준다. 탠 크리투의 <현대의 나르키소스>의 장면은 동기와 명상의 깊이를 결정하는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빅토리아 시머의 <리마인더>는 일상의 시간과 유한함에 대한 성찰을 기억하게 해 준다.



명상이라는 말은 사실 익숙하지만 실로 해보려고 하면 어색하고 어려운 것이었다. 적어도 ‘수행’의 방법을 통해서 이거나 혼자서는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라는 대상이었다. 수아이크 미슬로는 이 가깝고도 먼 ‘명상’이라는 키워드를 일상으로, 언제 어디서든 데려올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제시해준다. 좀 더 명상하기, 좀더 스스로를 알고 가꾸어보기. 2024년 한 해를 시작하는 지금 이 시기, 좀 더 쉬워진 ‘명상’하는 일상을 보내어 봐야 겠다는 과감한 다짐을 해 본다. 명상하고 싶으나 방법을 몰랐던 사람, 혹은 예술작품을 좋아하나 새롭게 이를 바라보는 시각을 얻길 원하는 사람이라면 꼭 이 책을 읽어보기를 추천하고 싶다. 굽은 꽃 줄기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바라보고 아름답게 배치하고자 했던 그 시기 처럼, 스스로와 일상을 그렇게 지켜보고 바라보고 귀히 여겨보고 싶어졌다.


킨츠쿠로이가 그렇듯 자기 연민은 갱신의 예술이다. 금 간 도자기 또는 흠집이 생긴 사람은 사용이 끝난 게 아니라 변이 과정을 겪고 있을 뿐이다.

틀에서 벗어나는 것. 명상의 관점에서 이 말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통제의 끈을 늦춘다는 의미다. 당신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것. 달아나려는 것과 기꺼이 함꼐 살아가기를 받아들이기.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분석정신, 즉 모든 것을 당신의 손 안에 넣어 해체하고 알아보고만 싶은 마음 상태를 과감히 놓아줌으로써 오히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새로운 해답을 향해 마음을 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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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컬렉터 - 집과 예술, 소통하는 아트 컬렉션
김지은 지음 / 아트북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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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작품을 모으지만, 작품도 사람을 모은다.


팬데믹 시기 이동과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물리적인 제약들보다 심리적인 압박과 우울감에 어려운 시간들을 보냈다. 집의 인테리어도 바꾸어 보고, 다양한 책들이나 매체도 찾아보고 하며 이를 극복해나갔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힘이되고 버틸 수 있는 시간으로 만들어 준 것들이 바로 예술작품을 찾아보고 감상하고 공부해보는 것들이었다.


작가는 세계 곳곳의 친구들이자 컬렉터들과의 연결고리를 통해 그들의 작품을 보는 관점과 그에 녹아있는 삶의 가치를 우리에게 공유한다. 인터뷰와 각 나라의 컬렉터들의 이야기를 통해, 단지 작품을 수집해서 인테리어용으로 장식하거나, 나중의 수익을 위해 투자의 명목으로 구입하는 것으로 치부되던 아트 컬렉터에 대한 편견과 벽을 아주 보란듯이 부숴버린다.


인기있는 작가나 돈이 되는 작품의 것들에 몰리는 우리네의 예술을 보는 눈과는 달리, 책 속의 인물들은 물질적인 것이 아닌 내적인 만족과 가치를 발견하는데 그 누구보다도 진심이며 작가의 생에적 가치를 살피고, 자신의 삶의 공간에 녹일 수 있는 작품을 탐험한다. 늘 상상하던 진짜 컬렉터들의 삶의 면면이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고 경외스럽기까지 했다. 13평의 임대아파트에서 4732점이나 되는 작품들을 수집해 미술관에 기증하는 사람들, 아이들과 하나의 작품에 대해 각자의 시선에 대해 공유하는 사람들, 동시대의 작가를 응원하고 지지하며 작품을 수집하는 사람들 등등. 물론 작품을 수집하려면 그만한 재정적 상황이 고려되어야 하지만, 한정된 돈이 작품을 자신의 공간으로 데려오거나 수집하는 것의 제약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걸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여러 사람들의 인터뷰와 집에 걸린 작품들의 사진을 통해서 눈이 즐겁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미술 하면 자주 떠오르는 고전적, 르네상스 언저리에 머무른 미술사적 작품들이 아닌, 동시대의 미술, 예술, 새로운 작가들의 작품과 세계를 구경하고 알게 되는 즐거움이 너무나도 커서, 책을 읽으며 앞으로 살펴보고 찾아보고 싶은 작가 목록을 작성하느라 책을 읽는데 꽤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오늘날의 베를린 필 하모닉을 만든 것은 외국 관광객들이 아닌 정기권 끊어 오는 베를린 시민이라는 책 속 인터뷰이의 말이 참으로 오래도록 남았다. 해외 유명공연이나 비싼 공연을 보는 것도 좋지만 시립교향악단의 정기권을 끊어 자주 가는 것 또한 중요하다. 가능성 있는 젊은 음악가들을 평소에 후원하는 것이 최고의 공연을 지하철을 타고 가서 볼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만든다는 것이다.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찾고 보는 것도 좋지만, 가능성 있고 가치관이 맞는 젊은 작가들을 좀 더 살피고 그들의 작은 작품이라도 컬렉팅해서 지지를 보여준다면 그 자체로 얼마나 가치 있는 컬렉팅이 되는 것인가. 한치의 예상도 할 수 없는 망망대해를 헤쳐나가는 요즘, 가라앉지 않도록 부유할 수 있는 예술이라는 튼튼한 뗏목이자 구명정을 하나 얻은 기분이다. 김지은 작가의 또 다른 책이 정말로, 진심으로 기다려진다.



나고 자란 집을 떠나면 고향에 대한 향수가 더 깊어진다. 고향에 머물 때보다 더 강렬하고 열정적인 시선으로 고향을 바라보고 느끼게 된다. 멀어진 고향 땅과의 ‘거리’는 작품을 탄생시키고 관객은 작품을 통해 한 번도 밟지 않은 대륙과 그 역사에 가까워진다.

예술가는 사회적 현상을 감지하고 작품을 통해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으로 사람들을 안내한다. 사건의 전말을 밝히는 것은 목격자의 몫이다. 여기서 ‘사건’ 대신 ‘예술’이라는 단어를, ‘목격자’대신 ‘관람자’라는 단어를 바꿔넣어도 좋을 것이다. 예술이 실마리를 찾아내고 각자의 해석으로 작품을 완성시키는 것은 관람자의 적극적인 ‘참여’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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