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다른 열두 세계 포션 6
이산화 지음 / 읻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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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고르는데 있어서 유독 소설 장르에만 편식이 심하다면 심한 편인데, 특히나 공상과학 소설이라하는 분야는 그 명칭만큼이나 멀고도 가까이 하기 어려운 장르였다. 집어 들기만 하면 다 읽을수나 있을까 걱정부터 앞선 책들과는 달리, 얇은 두께에 묘한 일러스트 위 작은 글씨로 적힌 <전혀 다른 열두 세계>는 좀 더 독서의 범위를 넓히고자 했던 내 시야에 한번에 들어왔다. 하나도 아니고 전혀 다른 열 두개의 세계라니. 외국 고서점을 거닐다 우연히 꽁꽁 숨어있던 비밀의 책을 발견한 기분마저 들었다.



책은 열 두개의,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열 세개의 초단편이 담겨있었는데, 이야기 하나 하나가 책의 제목처럼 전혀 다른 열 두 세계의 장면과 사건들을 밀도있게 보여준다. 장르 소설 답게 각각의 단편을 넘길 때 마다, 눈을 감았다 뜨니 새로운 세계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 SF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간접체험을 가능하게 했다.

책 속에서 또 하나의 장르적 초단편인 <열세 번째>를 제외한 열 두개의 세계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세계는 <이무기 시절도 한 때>와 <새로고침>이었다.



네안데르탈인과 호모사피엔스가 동시대에 공존했으나 기후변화와 생존에 강했던 호모사피엔스가 결국 살아남아 진화를 거듭해 우리 인류로 이어지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소위 ‘우월한’종의 진화과정을 지켜보던 네안데르탈인은 어떠했을까? 하는 궁금증을 늘 품고 있었는데, 이 두 편의 초단편을 읽고 이어진 상상이 이를 조금 해소해주었다. (물론 소설 속의 대상과 장면은 나의 질문과는 완전히 다른 것들이다.)



<이무기 시절도 한 때>에선 본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다른 종으로 진화를 하게 되는 설란과 그를 지켜보는 진화하지 못한 담초가 등장한다. 누군가 바라는 존재로 변화해야하는 선택아닌 선택을 받은 자는 마냥 좋았을까? 책 속에서 어느 순간 용으로 변화해 이곳을 떠나게 될 설란을 보며 담초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생각해보면 용으로 변해가는 내내 설란이 마냥 신나기만 했을 리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무섭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내가 찾아본 내용을 당사자가 찾아보지 않았을 리도 었었다. 학교에 못 가게 된 사람도, 가족과 헤어질 사람도, 곧 하늘로 떠나야 할 사람도 내가 아니라 설란이었으니까.

담초의 설란에 대한 부러운 마음이었을까? 설란은 정말로 무서웠을까? 사실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용이 된 설란도, 끝내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같은 담초도, 뭐가 되었든 각자의 모습으로 각자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꼽았던 <새로고침>의 세상은 좀 더 사실적이고 실제로 살고 있는 우리의 세상과 맞닿아 있다. ‘변화’라는 단어로는 부족한, 완전히 ‘새로고침’ 해야하는 세계에서, 전환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앞선 변화에 패배한 이들의 다가올 ‘새로고침’의 순간에 대한 예민함과 두려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단순하게는 정권이나 정책의 변화에서부터 기술의 변화와 세대와의 급격한 격차, 더 나아가 새로운 환경의 등장이라는 변혁의 파도앞에서, 이를 넘어 볼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이들은 어떻게 살아남아 생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했다.

가장 강하고 튼튼한 전사들은 내가 전해주는 ‘새로고침’의 내용에 별 관심이 없음을. 반면 내 목소리에 누구보다도 주의를 기울이는 건 다치고 아픈 사람, 홀로 남은 사람, 집을 잃고 떠돌다 우리 부족에 흘러들어온 사람임을. 이미 한번 새로고침에 버림받은 그들에겐 변화를 너끈이 견뎌낼 여력이 없어, 다음 새로고침이 그들의 적이 아니어야만 간신히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새로고침의 결과가 누군가에겐 진정 치명적일수 있음을 알았다. 위기를 위기로 받아들일 줄 알았다. 오직 그들만이 나처럼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눈을 하고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형태의 진화와 환경의 변화에 약한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다른 누군가의 진화나 앞으로 그들에게 닥칠 변화를 ‘바라보는 것’뿐이다. 이들이 의도적으로 바꾸거나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조금은 염세적이기도, 희망이 없어보이기도 하지만, 작가가 그린 세상으로 들어갔다 나오면서 오히려 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 할 수 있다는 것에 너무나 큰 안도감마저 들었다. 좀 더 고민하고 생각해 볼 새로운 방 하나가 생긴것이다. 독서편식을 깨 보고자 큰 맘 먹고 고른 작지만 큰 세상이 담긴 새로운 장르 덕에 장르소설을 좀 더 찾아 들어가보고 싶어졌다. 토끼굴의 앨리스처럼.



생각해보면 용으로 변해가는 내내 설란이 마냥 신나기만 했을 리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무섭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내가 찾아본 내용을 당사자가 찾아보지 않았을 리도 었었다. 학교에 못 가게 된 사람도, 가족과 헤어질 사람도, 곧 하늘로 떠나야 할 사람도 내가 아니라 설란이었으니까.

가장 강하고 튼튼한 전사들은 내가 전해주는 ‘새로고침’의 내용에 별 관심이 없음을. 반면 내 목소리에 누구보다도 주의를 기울이는 건 다치고 아픈 사람, 홀로 남은 사람, 집을 잃고 떠돌다 우리 부족에 흘러들어온 사람임을. 이미 한번 새로고침에 버림받은 그들에겐 변화를 너끈이 견뎌낼 여력이 없어, 다음 새로고침이 그들의 적이 아니어야만 간신히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새로고침의 결과가 누군가에겐 진정 치명적일수 있음을 알았다. 위기를 위기로 받아들일 줄 알았다. 오직 그들만이 나처럼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눈을 하고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결국에는 인간 시절의 낡디 낡은 추억을 포기하고서 진정으로 신이 되길 선택하지 않을까? 그렇게 믿으며 미열은 조금만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한때 인류는 환경오염과 무분별한 사냥이 여섯 번째 대멸종을 불러왔다면서 두려워했다지만, 지금은 그만한 대멸종이 매 순간 벌어지며 동시에 무수한 종이 새로이 탄생하는 시대니까.

그때까지 나도 도와줄게. 호랑이가 끝까지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덜 처참하게 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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