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
노정숙 지음 / 문학관 / 2001년 10월
평점 :
품절


'점심을 먹다가 갑자기 목이 메인다. 엄마가 좋아하는 황태구이가 내 눈을 어리게 한다'로 시작하는 이 글은 시작부터 눈물샘 열어 놓기를 강요한다. 아니나 다를까. '정 많은 엄마는 이곳에서도 많은 사람들과 불편 없이 가깝게 지내고 있나보다'로 코끝 찡하게 하고, '늘 아버지한테 잘 하라고 하던 엄마의 그 맹목적인 사랑과 가까운 헌신이 안타까웠다.' '마지막 주검까지도 실험용으로 기증한 엄마. 그곳에서도 늘 들어주고, 나누어주는 것이 엄마의 역할일까. 이제는 그 역할에서 벗어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투정 잘하고 불평도 하는 그런 역할이었으면 좋겠다.' '딸한테 딸 노릇을 하는 철없는 엄마로 사는 나의 영악함을 엄마는 아직도 모르리라. 영원히 모를 것이다'로 이어지는 구절들이 급기야 독자를 울리고 만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염려하는 마음이 커진다. 노인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은 노후에 대한 대비가 없는 탓이다. 보낼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존엄성을 지키며 사는 질의 문제가 앞으로의 숙제다.]

노인 문제가 심각한 것은 모두 긍정하지만 국가적 거시적 안목에선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 우리 나라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선진 문명, 문화의 나라 - 프랑스 철학가이며 소설가인 미셸 뚜르니에의 말을 들어보자. '요즘 어린이들에 관한 문제가 나오면 너도나도 한마디씩 거든다. 그러나 노인에 관한 배려는 어느 곳에도 없다. 혼자 사는 노인이 강간을 당하고도 누구한테 한마디 하소연도 못하는 세상이다.'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자. 가면 갈수록 더욱 심각해지는 것이 노인 문제다. 우리는 모두 지금 늙어 가고 있다.

[넓은 묘역에 커다란 상석, 화려한 비석 위에 빽빽하게 적혀있는 업적들. 그 빛나는 깃발과 화려한 간판들이 그에게 무엇을 줄까. 성공한 후손들을 위안하고, 그들의 허영심을 채우는 것에는 적당하다.]

공무원생활 30여 년에 지방행정 서기관으로 끝을 맺어, 내 죽으면 '현고학생부군(顯考學生府君)'을 면해 '현고지방행정서기관부군(顯考地方行政書記官府君)'으로 지방이 격상된다. 그러나 큰아들이 목사가 돼 헛일이라 하니 옆에 있는 친구 '죽 쑤어 개 좋은 일 했네'라고 비아냥거리는 세상이다. 죽어 빛나는 깃발, 화려한 간판이 무엇이냐. 성공한 후손에겐 위안이지만, 실패한 후손에겐 부담스런 짐이 아닐 수 없다.

요즘 버리기가 성행한다. 조윤정의 수필에선 책(수필집) 버리기를 시작한다. 밀란 쿤테라의 <불멸>에선 주인공 아네스의 아버지가 늙어 죽기 며칠 전 아내와 찍은 자신의 사진들을 하나하나 찢어 버린다. 내가 쓰던 모든 물건들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자손들에겐 한 보따리 짐으로 남을 뿐이다. '월간 문학' 누군가의 수필에서도 늙어 가면서 하나하나 버리는 작업에 몰두하는 자신을 묘사하는 글이 있다. 유지순의 수필 '살림살이 정리'에서도 늙어 꼭 필요한 물건만 남기고 살아가는 정결한 노인의 장면은 숙연하기만 하다.

[고축생, 정귀녀, 최말봉 - 재미있는 이름을 입 속으로 되뇌며, 베라노, 요한금구, 레문도 낯선 세례명도 귀에 익혀본다. 엄마의 이웃을 나도 친하게 불러야 하니까.]

작가와 나는 우즈베키스탄 여행을 같이 한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무료함, 한가로움에 빠져 있었던가. 관광지를 둘러보며 무심코 '이 건 뭣이 깽이냐'하고 어렸을 적 사투리를 썼더니 옆에 있던 작가 왈 '저시 깽이지'라고 응답해 까르르 웃은 적이 있다. 그 웃음이 다시 생각나게 하는 구절이다. 그러나 '엄마의 이웃을 나도 친하게 불러야 하니까' 만만치 않은 여운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만만히 아무렇게나 읽을 글 아니다.

[엄마한테 받기만 한 사랑을 주는데 게으른 나는, 다시 성인이 된 딸이 외할머니를 닮아 내게 엄마노릇을 하려든다. 딸한테 딸 노릇을 하는 철없는 엄마로 사는 나의 영악함을 엄마는 아직도 모르리라. 영원히 모를 것이다.]

이 대목 쓰며 작가는 통곡했으리. 이 대목이 글의 무게를 지탱하는 기둥의 역할을 착실히 해 내고 있다. 그 뒤에 오는 마지막 결구는 너무 무거워 천근만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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