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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사이 - Blu ㅣ 냉정과 열정 사이
쓰지 히토나리 지음, 양억관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냉정과 열정사이'는 접하기도 전에 유명한 책이었다. 베스트셀러라며 누가 좋았다더라 하는 입바람까지 타고 TV같은 대중매체에 등장하던 책. 하지만 안타깝게도 출간 당시 어렸고 유명세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거부하며 읽지 않았다.
'냉정과 열정사이'가 출간한 지 9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손에 책을 쥐었다. 딱히 '이 것'을 기필코 읽고 말겠어! 라는 본격적인 독서태세가 있지도 않았다. 지나가다가 우연히 시선이 닿았고, 저절로 손이 뻗었다. 상하전후좌우로 크기가 들쑥날쑥하고 표지 색도 뒤죽박죽인 책꽂이에서 '그 책'만이 크로즈업되었다면 다들 알 수 있으리라. 책과의 인연. 누구나 한 번쯤 경험 했을 이 신기한 만남.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민망하게도 '오만과 편견'과 '냉정과 열정사이'가 같은 작가의 것인 줄 알고 있다가, '오만과 편견'을 작정하고 읽은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랬던 걸지도 모른다. '오만과 편견'과 '냉정과 열정사이'란 단어를 음성화하여 음미할 때 드는 묘하게 비슷한 느낌때문에 읽기도 전에 '같은 책'이란 결론이 머릿 속에 박혀있었다. 하지만 왠걸- 로맨스란 점만 빼면 닮은 점이라곤 보이지 않는 글들이었다!
그렇게 우연히 집어든 '냉정과 열정사이 blu'는 한 남자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이야기였다. 쥰세이.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복원사로 일하는 그의 이름. 대학을 일본으로 유학가고 거기서 아오이를 사랑했던 그의 이름. 아오이와 이별한 후 10년이 지나도 있지 못하는 그의 이름.
쥰세이는 처음부터 이런 말을 한다. [사람이란 살아온 날들의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소중한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고, 난 믿고 있다. 아오이가 그 날 밤의 일을 완전히 잊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시는 그녀를 만날 수 없을지 모른다 해도.] 책을 읽는 내내,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난 뒤 가장 먼저 알게 된 것은 이것이 쥰세이였다.
아오이와 헤어진 후 10년이 지나 쥰세이의 삶은 어떠할까. 외국에서 자라 일본속 이방인이던 쥰세이와 반대로 이탈리아계의 피가 흐르지만 그 피를 준 아버지를 원망하고 이탈리아어를 못하고 일본어를 잘하던 메미란 애인이 곁에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탈리아고도 피렌체에서 미술품을 복원하는 복원사일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쥰세이는 메미와 관계하면서 아오이를 떠올리곤 했다. 메미와는 전혀 반대인 기억 속의 아오이를...
그렇다. 쥰세이는 과거에 사로 잡혀 살아가고 있었다. 10년이나 지나도 피렌체 두오모에서 만나자던 아오이에게 매여서 하루하루를 이어 가고 있었다. 그에겐 지난 10년은 미래가 아니며, 현재가 아니었다. 마치 아오이와의 만남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것 마냥 보이기까지 했다.
이런 쥰세이를 뭐라고 해야 할까. 존경하던 스승에게 질투를 받고, 사랑하던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맞이하고, 애인을 품고서 전애인을 꿈꾸는 이 남자를 뭐라 할 수 있을까.
집착, 나약함, 우유부단, 로맨스, 찌질이 등 수많은 단어로 비난할 수 있다. 하지만 비난할 지언정 내칠 수가 없다. 절정으로 치닫을 수록 그가 그녀와 이어지길 바랄 수 밖에 없어진다. 왜 일까. 단지 주인공이기 때문에? 슬픔보다는 기쁨을 바라기에? 무엇때문에?
아마 과거를 잡지는 못해도 여전히 기억하는 쥰세이가 바로 우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맞다. 쥰세이는 우리의 모습이다. 살기위해, 다시 웃을 수 있도록 우리는 슬픔과 괴로움을 잊었다고 과거일 뿐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안타깝게도 그 과거에 대한 감정이란 기억은 여전히 남아서 시간이 갈 수록 더 뚜렷해지기만 한다. 회피한다. 도망간다. 발버둥친다.
그런데 뭔가 잊은 것 같지 않은가? 우리는 하나를 빠뜨렸다. 과거를 과거로 인정하려 애씀에도 모자라는 것. 그것은 '해결'이다. 사라지지 않는 과거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문제거리들...사랑하는 사람과의 오해, 결정내리지 못한 선택, 아직 지키지 못한 약속. 이것을 '해결'해야 진정 내일 그리고 오늘 우리가 웃을 수 있다.
그것을 쥰세이는 차곡차곡 '해결'해 나간다. 메미와 이별하고, 일본에서 복원사를 하기로 했으며,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따스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10년이 걸린 약속을 지키기 위해 두오모에서 아오이를 만난다.
그리고 쥰세이는 거침없이 '시작'한다. 미래를 기대하며 오늘에 웃을 수 있다. 10년을 인정하고 10년 후의 쥰세가 10년 후의 아오이를 안았다. 이 만남은 추억에 대한 아련함일까, 극복한 사랑일까. 이런 바보같은 질문이 또 있으리. 둘 다이다. 아니, 적어도 쥰세이는 행복을 이어가기 위해 아오이를 뒤쫓는다.
이 소설은 해피엔딩인가? 아니면 열린 결말인가? 애매하다. 애매하지만 둘 다일 것이다. 적어도 주인공 쥰세이와 우리는 행복한 꿈을 꿀 수 있게 되었으니까.
쥰세이가 극단 적이긴 해도 분명 우리의 모습이다. 아닌척해도 어쩔 수 없다. 사실이니까. 이 책을 읽는 모든 분들이 쥰세이처럼 지금과 앞으로의 행복한 꿈을 꿀수 있게 되면 좋겠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다시 진심으로 웃을 수 있게.....
[두려움과 불안과 망설임 때문에 모든 것을 향해 등을 돌려버리면, 새로운 기회는 싹이 잘려 다시는 이 세상에 얼굴을 내밀지 못할 것이다. 후회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냉정과 열정사이 bl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