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thirsty > 언어와 번역의 한계를 묻는다 – 피네간의 경야 엿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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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네간의 경야(經夜)
제임스 조이스 지음, 김종건 옮김 / 범우사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나라의 미야타 교코를 기다리며
“ 우리는 이제 이 연속물의 우리들 애인들 사이에 확급擴及하고 있나니 (그대에게! 당신에게!) 농弄나이팅게일의 노포露包의 노래를 (알리스! 알리스델시오 미녀여!) 그들의 은신처로부터, 장미경薔薇景의 건초 속에 숨어, 매력림魅力林의 헤더 측구側丘 위에, 성聖 존 산山, 지니(신령神靈)땅, 우리들의 동료는 무어 마루공원으로부터 황혼박黃昏箔에 의하여 어디로 날랐던고, 스위프트(급急) 성소聖所를 찾아서, 일몰 시우時友 뒤를 (오보에! 여기저기에! 가위 휘청대는 점보点步! 나는 대쉬돌突해야 하나니!) 그들의 평화를 부분음部分音에 쏟아 붓기 위해 (프로프로 프로프로렌스), 달큼하고슬픈 경쾌하고유쾌한, 쌍이雙二조롱노래구애저求愛低. 한 피치의 모든 소리를 공명共鳴속에 조용히 보관할지라. 흑인까마귀, 갈가마귀, 첫째 및 둘째 그들의 셋째와 함께 그들에게 화가 미칠진저. 이제는 넘치는 류트 악기, 이제는 달시머, 그리하여 우리가 페달을 누를 때(부드럽게!) 그대의 이름을 골라내고 모음母音을 더하기 위해.” (이 책, 359.31-360.6)* (이하 경야 經夜**).
* 여기 역문의 페이지와 글줄은 페이버 앤드 페이버(Faber and Faber)(런던) 출판사의 1939년 피네간의 경야의 원판본(세계 유일의)의 페이지를 그대로 따랐는데, 이는 독자는 물론 원본과 역본을 대조하는 연구자의 편의 도모를 위한 배려이다.” (위 책, 역자 서문, p.28)
** 우리말로는 ‘밤샘’의 개념이 ‘wake’와 가장 가깝기는 해도, 우리 풍습과 서양 풍습이 1:1로 대응하는 것은 아니므로, ‘경야(經夜)’라는 한자말을 쓰는 것으로 보이며, 이는 역자의 선택이라고 본다.
세상에서 가장 난해한(또는 가장 번역이 어려운) 문학작품이라고 할만한, 제임스의 조이스의 이 소위 ‘Black Book’은 세계적으로 번역본이 불어본, 독어본, 일어본 3종밖에 없었는데, 2002년 위 책이 나옴으로써 우리도 4번째로 이름을 올렸다고 한다*(위 글의 추천사 및 서문). 노학자(老學者)의 반세기에 걸친 그야말로 필생의 노작(勞作)에 대해, 아직 ‘율리시스’도 잘 모르는 비전문가인 아마추어가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인 줄은 잘 알지만, “작품의 난이성과 연관하여 언급하거니와, 우리에게 외국문학은 결코 외국문학이 아니요, 원전은 우리의 자국문학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여기 역자의 노력은 “보통의 독자들”을 위한 가능한 한의 보편화를 위한 것이다(위 책 작품 소개, p.652)”에 힘입어 진짜 ‘보통 독자’ 입장에서 서평을 쓴다.
* 5년이 지난 지금은 이태리어, 스페인어, 네덜란드어, 헝가리어 등 다른 언어 번역본이 추가된다.
위의 번역문에 해당하는 원문의 꼭지를 보자.
“We are now diffusing among our lovers of this sequence (to you! to you!) the dewfolded song of the naughtingels (Alys! Alysaloe!) from their sheltered positions, in rosescenery haydyng, on the heather side of waldalure, Mount Saint John’s, Jinnyland, whither our allies winged by duskfoil from Mooreparque, swift sanctuary seeking, after Sunsink gang (Oiboe! Hitherzither! Almost dotty! I must dash!) to pour their peace in partial (floflo floreflorence), sweetishsad lightandgayle, twittwin twosingwoolow. Let everie sound of a pitch keep steel in resonance, jemcrow, jackdaw, prime and secund with their terce that whoe betwides them, now full theorbe, now dulcifair, and when we press of pedal (sof!) pick out and vowelise your name.” (359.31-360.6)*
* Finnegans Wake(이하 Wake)는 1939년 런던 Faber and Faber에서 출판된 이래 재편집된 적이 없어, 그 이후 모든 판본의 페이지 및 줄이 원래 책과 똑 같다. 그래야만 연구자들이 서로 같은 곳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위의 표시는 359페이지 31행부터, 360페이지 6행에 걸친 텍스트라는 뜻이다. 필자의 인용은, 위 Faber and Faber (London)의 1939년본과 동시에 미국에서 나온 Viking 판을, 1999년 다시 찍은 Penguin판에서 나왔다.
위의 두 단락 각각의 의미는 고사하고라도, 그들 둘 사이의 필연적인 대응성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대단한 사람일 것이다. 필자 같은 범부(凡夫)로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더구나 역자가 연구자들을 위해 한국어번역판을 원본과 페이지, 줄까지 그대로 맞춘 것을 보면 소름이 돋을 정도다(이 부분은 뒤에 다시 언급하겠다).
여기서 다음 해설(guide)을 한번 보자. 좀 길기는 해도 이 서평의 논리상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그대로 옮겨본다. 우리 같은 아마추어 독자들이 모인 독서모임 장면을 생생하게 그리는 방법으로 경야를 엿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편안히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Derek Attridge*, “Reading Joyce”, in Derek Attridge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James Joyce, 2nd edition 3rd printing,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pp.10-17)”
* 데렉 애트리지는 영국 요크대학(the University of York)의 영어교수로 유명한 조이스 학자이다. 번역은 필자가 직접 한 것이며, 괄호 속 해설에 필자 표시가 있는 것은 필자가 단 것이고, 표시가 없는 나머지 괄호 안 설명은 원래 있는 것이다.
경야를 꼭 처음부터 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제 일군(一群)의 독자들이 있어, 다른 부분보다 다중(多重)의 의미가 덜 빼꼭 찬 부분부터 읽기로 했다. 그 중 한 사람이 자원해서 위의 부분을 큰 소리로 읽는다. 그러면 반응은, 계속되는 명백히 말도 안되는 소리에 대한 썰렁함과 아무리 우습든 일말의 센스가 보인다는 데 대한 낄낄거림이 섞인 것이리라. 괄호와 현란한 수식에 의해 방해를 받기는 하지만, 구문의 문법적 뼈대는 아주 단단해서, 1인칭 복수(we)의 화자(話者)가 2인칭 청자(聽者)에게 무언가를 선언하며 명령을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면, 이해를 위한 발판이 확보된 것이다. ‘We are now diffusing…the…songs of the naughtingales…from their sheltered positions…whither our allies winged…to pour their peace…Let everie sound of a pitch keep still…and when we press of pedal…pick out and vowelise your name(우리는 퍼뜨리고 있다…그…나이팅게일의 노래를…그들의 보호된 위치로부터…그곳에서는 우리 동맹들이 날아올랐다…그들의 평화를 쏟아 붓기 위해…한 음조의 모든 소리를 조용하게 하라…그리고 우리가 페달을 밟을 때…골라내서 네 이름을 말하라).” 이 구문의 안정성은 경야의 특징이며, 단락의 의미를 풀어냄에 있어서, 이 풍부한 말 잔치가 매달려 있는 뼈대의 구조를 추적하는 것을 종종 도와준다.
이 독서그룹의 멤버들이 다음으로 언급하기 시작한 것은 서로 관련된 용어들이 모여 있다는 것이며, 그 중 어떤 것들은 말장난(pun)과 합성어(portmanteau)에 반쯤 숨겨져 있다. 이들 집합 중 가장 뚜렷한 것은 ‘새’와 관련이 있다. 모든 이들이 ‘naughtingels’를 ‘nightingales’로 들었고, 텍스트를 보지 않고 듣기만 한 사람은 ‘lightandgayle’에서도 똑 같은 단어를 들었다고 한다. (누군가가 경야를 읽어줄 때는 책을 내려놓은 것이 종종 도움이 되는데, 시각적으로 모습을 그리다 보면, 청각적인 울림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단서에 이어, 이탈리아어를 아는 한 회원은 이상한 단어 ‘twosingwoolow’가 이탈리아어 ‘usignolo’를 잘못 발음한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이 단어를 영어로 번역하면 역시 ‘nightingale’이 된다. 이 집합에, ‘winged(날아올랐다)’, ‘swift(칼새)’, ‘bird sanctuary(조수 보호구역)’의 의미인 ‘sanctuary(금렵구)’, ‘crow(까마귀)’, jackdaw(갈가마귀)’, 이런 단어를 덧붙이는 데는 암호 해독이 필요 없으리라. 또 누군가가 ‘Hitherzither’이란 아마도 칼새 같은 새들이 여기저기(hither-and-thither) 비행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 아니냐는 의견을 내놓을 수 있다. 어쨌든 독서그룹은, 새들이 내는 소리에 중점이 주어져있다는 사실과, 많은 반복어구들이 새들의 울음소리에 대한 전통적인 표현을 생각나게 한다는데 동의한다. 즉, ‘to you! to you!’는 ‘to whit!(짹짹 새소리 – 필자) to whoo(부엉이 같은 후우우 울음 소리 – 필자)!’를 반영하는데, 이 사실은 ‘나이팅게일’에 더해서 또 다른 밤새인 부엉이의 존재를 나타낸다. 그리고 ‘twittwin’은 ‘짹짹거리는(twittering)’ 새 울음을 암시한다. 다른 구절도 역시 비슷한 방법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데, ‘Alys! Alysaloe!’나 ‘floflo floreflorence’가 그것들이다. 누군가 이 단락이 ‘song’과 ‘twosingwoolow’에 숨겨진 ‘sing’ 양쪽을 다 포함하고 있으며, ‘나이팅게일’의 울음에는 가끔 ‘pour(to flow in a stream. 쉴새 없이 떠들다, 노래하다)’라는 표현이 쓰인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제 구문의 구조로부터 점점 의미 형태가 갖춰지고 있지만, 그 의미는 영어문법의 어순에 의해 제한되는 가능성을 훨씬 넘치기 시작한다. 이해 불가능한 것들이 갑자기 의미를 드러내고, 모순되는 것들이 어떤 패턴을 드러내기 시작할 때마다, 이 발견들은 뭔가 드러내주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만족을 주는가 하면 괜히 들뜨게 만들기도 한다.
잠시 쉰 뒤, 누군가 ‘Florence’가 또 다른 ‘Nightingale’이라는 걸 알아차리고(유명한 간호사 Florence Nightingale - 필자), 곧 이어 19세기의 유명한 소프라노 Jenny Lind(여기서는 분명히 지명을 나타내는 ‘Jinnyland’로 바뀌어져 있다)가 영국에서 ‘스웨덴의 나이팅게일(the Swedish Nightingale)’(여기서는 ‘sweetishsad lightandgayle’로 되었다)로 불렸다는 걸 기억한다. 신화학에 관심을 가진 다른 멤버가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지만 동의를 얻지 못한다 - 혹시 ‘terce’는 Tereus가 Philomela를 강간한 것(그리스 신화에서 나쁜 형부 Tereus, 언니 Procne, 동생 Philomela를 둘러싼 치정 및 복수극 – 필자)과 관련이 없는지? 필로멜라 역시 나이팅게일로 변했다. 새 울음에 관련된 집합은 인간의 노래로, 여자에게로, 아마도 육체적 욕망까지로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새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lovers’도, 그럼 오페라와 다른 인간의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 또는 성적 의미에서의 ‘연인들’이 아닌가? 이 점에 대해서는 다시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모든 해석들이 글과의 관련하에서 주장되어질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모든 가능성을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로 통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미묘한 성조(聲調)도, 어떤 상상된 인간의 상황도 이 모든 의미를 동시에 유효하게 만들 수는 없을 것 같다. 경야는 언어가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단일한 의도와 주관성에 복종해야 한다는 믿음을 깨뜨린다.
이제 그룹이 인간의 노래에 주목하게 되자, 새로운 용어들의 집합이 나타난다. 한 사람이 아까부터 마음에 걸리는 ‘rosescenary haydyng’가 가장 다산(多産)한 오페라 작곡가 중 두 사람인 로시니(Rossini)와 하이든(Haydn)을 가리키는 것 같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 ‘twosingwoolow’가 연인의 슬픔을 나타내는 노래인 ‘sing willow(애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노래. 옛날 버드나뭇가지나 고리를 가슴에 달고 그 뜻을 나타냈다고 한다 - 엣센스 영한사전. 필자)’의 버전을 포함하는 것 같다고 지적하며, 오셀로(Othello: 세익스피어의 희곡 – 필자)에서 데스디모나(Desdemona)의 ‘Willow Song’과, 다시 새들로 돌아가서, 미카도(The Micado: 영국의 작곡가 아서 S. 설리번(Arthur S. Sullivan)의 오페라- 필자)에서 자살하는 곤줄박이류 새에 관한 코코(Ko-Ko)의 노래를 인용한다. 세 번째 사람은 서구 교회(로마 카톨릭 교회 – 필자)의 전통에 익숙한데, ‘prime(아침기도)’과 ‘terce(3시경)’가 각각 성무일도(聖務日禱) 중 처음 두 기도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는 또 ‘vowelise’가 ‘vocalise’와 비슷하여 영어동사로서는 ‘sing’의 뜻을, 불어의 명사로서는 노래하는 것(또는 노래연습)이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덧붙인다. 토론이 계속됨에 따라, 인간의 노래에서 음악과 소리에까지 점차 보편적으로 확대되어 간다. ‘pitch(음조)’와 ‘resonance(공명)’은 분명히 이 집합에 속하며, 사전을 찾아본 누군가가 ‘sequence’에는 ‘곡조의 반복’ 외에도 ‘서구 교회의 영창 또는 악곡’의 뜻이 있다고 알려준다. 또 ‘partials’에는 ‘화음의 고성부(또는 부분음部分音)’라는 뜻이 있다는 것도. 이들은 곧, 글에 있는 약간 낯선 오케스트라 악기를 찾아내기 시작한다. ‘gang’에는 gong(벨, 공)이, ‘Oiboe’에는 oboe(오보에)가, ‘Hitherzither’에는 zither(치터: 기타 비슷한 현악기 – 필자), ‘theorbe’에는 theorbo(일종의 류트)(중세 현악기 - 필자)가, ‘dulcifer’에는 덜시머(현을 때려 소리를 내는 악기로 피아노의 원형 – 필자)가, 그리고 암시적으로 ‘pedal(sof!)’에는 피아노가 들어 있다. 그리고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다른 종류의 조직적 소리가 ‘Almost dotty! I must dash!’에 이해 드러나는데, 바로 모스부호이다. (모스부호는 점(dot. 단점短點)과 대시(dash. 선 또는 長點)로 이루어져 있다 – 필자).
다음으로 성(sexuality) 문제가 다루어져, 이것 역시 일련의 연결된 의미로 이끄는지 볼 필요가 있다는 제안이 들어온다. 여러 멤버가 ‘naughtingels’는 ‘nightingales’뿐만 아니라, ‘naughty girls(행실 나쁜 계집애들)’(또는 영국 상류층 발음을 빌면 ‘gels’) (『더블린 사람들』의 “하숙집(The Boarding House)”에서, 딸 폴리 무니는 이렇게 노래한다. “I’m a naughty girl. You needn’t sham: You know I am.” – 필자)가 포함되어 있다고 같이 지적한다. 또 다른 의견도 나오는데, ‘waldalure’에는 ‘allure(유혹하다)’는 단어가 숨어 있고(그리고 성적 유혹이 공중에 떠 있다면, 아마 ‘lure(미끼)’도)(낚시 장면을 상상하라 – 필자), ‘twosingwoolow’에는 ‘woo(구애, 구혼)’이 있다. 여자 이름은 매력과 욕망의 내포(connotation)을 위한 그럴듯한 보고(寶庫)가 아닌가? 그래서 그룹이 ‘Alys! Alysaloe!’에 주목하는 것도 당연한데, 이는 ‘allies(동맹국)’에 의해 뒷받침되어, ‘Alice’의 존재를 의미한다. 그 때 누군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 in Wonderland)’의 작가(루이스 캐럴. Lewis Carroll - 필자)가 어린 소녀들과 놀아주고 사진 찍어주기를 즐겼다는 걸 기억한다(바로 이 사람이 ‘portmanteau word(합성어)’라는 말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그러자 극장 쪽에 밝은 사람이 1930년대 무대 스타 중에 Alice Delysio가 있었고, Gaby Delys라는 프랑스의 현장 미술가도 있었다고 전한다. 바로 이 시점에서 한 회의주의적 참가자가 “어떻게 조이스가 이 모든 의미를 텍스트 속에 집어넣는 것이 가능했겠느냐?”고 반박하자, 두 개의 대응이 나온다. 하나는, 우리는 어떤 특정한 (단어의) 경우라도 조이스가 그렇게 의도적으로 집어넣진 않았다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설사 우리가 (조이스가 그런 의도로 이 단어를 사용하진 않았다는) 사실을 확실히 안다 하드라도 달라질 것은 없는데, 왜냐하면 어쨌든 조이스는 그가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의미를 자아내는 힘을 가진 텍스트를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그룹의 한 멤버는 격리(seclusion)(특히 자연환경 속에서의)와 어둠의 의미에 주목하고 있는데, 이는 나이팅게일 집합과 성적인 타락 둘 다에 관련이 되는 것이다. ‘Dewfolded’는 밤과 둘러 막는 것 양쪽을 의미한다(dew = 밤에 내리는 이슬, fold = 접다, 포개다; 둘러싸다 – 필자). ‘sheltered position(보호된 위치)’은 그대로 알 수 있는 말이다. ‘rosescenery haydyng’은 이미 앞에서 발견한 작곡가 이름과 더불어 장미정원에 숨겨졌다는 느낌(hiding in rose scene – 필자)을 준다. 그리고 ‘other’은 적절하게 ‘heather(히스꽃)’으로 바뀌어져 있다(on the heather side of가 on the other side of라는 영어표현에서 왔다는 말 – 필자). 독일어를 할 줄 하는 사람이 ‘숲’의 독일어인 ‘wald’가 ‘waldalure’에 있다고 하고, 프랑스어를 아는 사람은 ‘duskfoil’이 어둠이 내리는 것(the fall of darkness) ( = dusk 어둠+ foil 얇은 판, 막, 박箔 – 필자)과 잎들(leaves = 프랑스어 feuilles)을 결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Mooreparque’에는 분명히 ‘park(공원, 보호구역, 숲 속의 평지 – 필자)’가 있으며, 그 뒤에는 앞서 말한 ‘sanctuary’가 따른다. 그리고 일몰(sunset), 즉 ‘Sunsink’가 있으며, ‘Sunsink gang’에는 똑 같은 현상을 독일어로 표현한 ‘Sonnenuntergang’이 메아리치고 있다. 어둠에 관한 제안은 그룹의 관심을 어둠(blackness)을 나타내는 단어로 돌린다. 즉, ‘Moor(오셀로와의 연상작용을 다시 일으키는) (오셀로가 바로 ‘베니스의 무어인(흑인)’이 아닌가? – 필자), ‘pitch(피치, 역청. 콜타르 비슷한 것)’, ‘crow(까마귀)’, ‘jackdaw(갈가마귀)’뿐만 아니라 ‘Jim Crow(19세기 중반 미국에서 흑인 얼굴로 노래 부르던 코미디언에서 유래되어, 흑인 차별법안을 Jim Crow laws라 함. Jump Jim Crow, or Jim Cuff. – 필자)’에 대한 암시도 있다. 사전을 찾아보니, 이는 20세기의 인종 차별주의와 관련이 되기는 해도, 19세기 초 (미국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부르던 흑인 노래였다. 그러자 그룹은 이 사실이 ‘gang(갱단, 무리)’, ‘pick(목화 따기), (‘whoe’에 있는) ‘hoe(쟁기)’같은 단어들과 관련이 있는지 생각해본다. 물론 일단 단서가 포착된 이상, 그럴 수도 있다. 이 발견이 그냥 즐기고 끝나는 막다른 골목인지, 또 다른 의미를 드러내는지는 책을 계속 읽어봐야만 한다. 때로는 이와 같이 작은 단서가 수년간 잠자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다가 이것이 장(chapter) 또는 책 전체를 통해 흐르고 있는 연결된 용어 패턴의 부분이라는 걸 문득 깨닫기도 한다.
이때 누군가 말한다. “나는 자꾸 이 글이 전투와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지적할 수 있는 예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에 관한 것뿐이지만. 그녀는 크림전쟁에서 유명해졌잖아.” 다른 사람들이 거든다, “‘peace(평화)’라는 단어가 저기 보여. 그리고 ‘allies’란 동맹국이란 뜻이고.” “앞에서 나왔던 모스부호는 어떻고? 군사 신호를 말하잖아.” 이 새로운 발견에 주의하여, 전체가 텍스트를 몇 분간 검토할 때, 새로운 빛이 문득 보인다 “이런…’waldalure’는 워털루(Waterloo)가 틀림없어!” 그러자 그 전투에 관해 좀 아는 친구가 이어받는다. “맞아, 워털루가 틀림없어. 왜냐하면, ‘Mount Saint John’s’는 Mont St Jean으로, 그 전쟁터 가까이 있던 마을이름이며, 영국군들이 이 이름을 사용했거든. 그들은 나중에 거기다가 워털루 기념관까지 세웠거든. 그리고 이제야 ‘allies’라는 단어의 중첩된 뜻을 알겠네. 유럽대륙에서는 이 워털루 전투를 그 가까이 있던 다른 마을 이름인 La Belle Alliance라는 이름으로 부르거든.” 누군가가 덧붙인다, “아까 그 글을 읽을 때 말이야, ‘sound of a pitch’가 내 귀에는 ‘son of a bitch’로 들렸는데, 어떻게 연관이 있는지 몰랐거든. 근데 지금 보면, 그 용어는 군대 연병장에서는 자주 들을 수 있는 그런 말이지. 그러면 ‘pick out and vowelise your name’은 ‘우렁차게 관등성명을 밝혀라’는 명령으로 볼 수도 있잖아.”
그룹 중 한 멤버에 의해 다른 의문이 제기된다. “이런 행위들을 모두 한 자리에 모을 수 있는 그런 특정한 장소가 있을까?” 그럴 리가 없다는 데 모두 동의한다, 왜냐하면 지금 이 단락은 수많은 국가를 무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이스의 작품을 읽은 적이 있던 독자들은 아일랜드, 특히 더블린이 항상 조이스 글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주장한다. 율리시스를 읽은 적이 있는 사람이 ‘Dunsink Time’(Dunsink 관측소에서 정해지는 더블린 지방시각)에 관한 레오폴드 블룸의 명상을 기억하고, 그 모습이 ‘Sunsink gang’에서 어렴풋이 드러난다고 한다. 누군가 ‘시간’은 ‘secund’(‘식물의 잎이나 꽃이 줄기의 한쪽에서만 생기는’이란 뜻이 있지만, 여기서는 시간의 단위인 ‘second(초秒)’ 또는 ‘두 번째’란 의미와 관련 있다. 스페인어로는 segundo – 필자)에서도 보이고, 정시과(定時課: canonical hours)인 ‘prime’과 ‘terce’에도 있다고 덧붙인다. 또 다른 아일랜드와의 연관이 ‘swift’에서 지적되는데, 그러자 이 ‘swift’는 칼새도 아니고, 속도를 나타내는 형용사(‘빠른, 신속한’ – 필자)도 아니며, 아일랜드 출신 작가인 Jonathan Swift(걸리버 여행기의 작가 – 필자)가 된다. 백과사전은 한 때 스위프트가 일했던 영국의 장원 이름이 ‘Moor Park’였다는 정보를 전해 준다. 그룹은 스위프트가 ‘almost dotty(살짝 돈)’였다는 사실을 떠올린다(스위프트는 말년에 정신병을 앓았다 – 필자).
‘dewfolded’라는 단어 역시 코멘트를 불러 일으킨다. 앞에서 ‘dew’와 ‘folded’가 각각 단락의 주제와 관련되는 점에 대해서는 언급을 했지만, 이 두 단어를 합친 합성어는 아직 설명이 필요하다. 마치 ‘dewfolded’는 ‘twofold’와 연관되는 느낌을 주고, 이는 독서그룹이 따를 수 있는 또 다른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 단락에서 감탄문(새소리를 상기시키는 것?)은 모두 쌍으로 되어있다. “to you! to you!’, ‘Alys! Alysaloe!’, ‘Oiboe! Hitherzither!’, ‘Almost dotty! I must dash!’, 그리고 ‘floflo’와 ‘floraflorence’에도 중복이 있다. 또 ‘twittwin’은 중복이 될 뿐만 아니라 ‘twin(쌍둥이)’라는 말까지 포함하고, 바로 뒤에 ‘two’도 따라온다. 이 단락에는 둘 다 나이팅게일인 두 명의 유명한 여성인물이 나온다. 그러나, 비록 ‘betwides’가 ‘between’과 ‘beside’ 사이에서 왔다갔다할 뿐만 아니라, ‘-twi-‘에서 아직 이중성을 암시함에도 불구하고, ‘prime and secund with their terce that whoe betwides them’에는 분명히 삼중(三重)의 원칙이 작용한다. ‘두개인 것들(twos)’과 ‘하나의 셋(a three)’의 패턴은 중요하게 보이지만, 이 독서그룹으로서는 이 패턴이 책의 다른 부분을 가리키지 않는 한 더 이상 밀고 나갈 밑천이 없다.
이 단락은 이제 상호연관된 의미들로 빛나고 있지만, 합성어 중에서 설명이 안된 것도 여럿 있다. 어떤 단어에서 설명이 되지 않는 요소가 남아있는 한 더 생각할 여지가 있다 (그렇다고, 모든 변형을 다 설명할 수 있다고 해도 끝난 것이 아니다). 곤혹스런 합성어로부터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을 몇 개 찾아낸 뒤엔, 왜곡/변형 그 자체도 설명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는 참 쉽다. 예를 들어, ‘Mooreparque’에서 ‘Moor Park’를 찾아낸 후에도, 왜 이런 전환을 거쳤는지를 여전히 질문해야만 하는 것이다. ‘parque’의 철자는, 워털루를 다루는 부분과 명백한 연관이 되어 프랑스를 떠올리게 하지만, 불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또, 그 말의 의미인 ‘fate(운명)’가 ‘whoe betwides them’에 있는 ‘woe betide them(그들에게 재앙이 있을진저!)’라는 경고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Moore’에 ‘e’가 있는 것이 아마도 아일랜드의 시인 Thomas Moore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낸다. 이 의견은 ‘full theorbe, now dulcifer’에서 무어의 시 제목인 ‘Fill the Bumper Fair(당당히 잔을 가득 채워라)’를 발견하자, 받아들여진다. (이제 우리는 두 나이팅게일 외에도 두 명의 아일랜드 시인을 찾았다.) 그룹은 아직까지도 ‘Oiboe’(이탈리아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아마도 의견이 있을 것이다), ‘everie’, ‘sof!’의 철자에 대한 설명을 찾지 못했다. 또 ‘in partial’이 ‘impartial’인지, ‘in resonance’가 ‘in residence’의 반영인지도 모른다. 한편 ‘jemcrow’의 jemmy(영국에서는 jimmy라고 쓰며, 짧은 쇠지레, 즉 a short crowbar를 말한다 – 필자)와 crowbar(작업 현장에서나 도둑이 쓰는 큰 쇠지레), 그리고 단락 끝쯤에 나오는 ‘pick(곡괭이, 쪼는 기구)’로부터 연장(도구)의 집합도 생각할 수 있는지는 아직 미정이다.
그러나 이제 잠시 멈추고 다시 정리해보자. 이 단락은 어두운 숲 속 은신처로부터 들리는 나이팅게일 울음을 묘사하는 화자의 목소리를 제시한다. 우리 독자(또는 청자聽者)들은 조용히 할 것을, 그리고는 노래에 같이 참여할 것을 요구받는다. 분명히 이 내용 자체로는 ‘더블린 사람들’과 달리 재미가 없다. 그렇지만, 이 목소리의 위로는 중첩된 다른 의미들이 가득 차 있는데, 우리는 이를, 일직선적인 단순성을 가진 보통 말로는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그 텍스트의 하나의 요소로 취급해야만 한다. (아마도 두 마리의) 나이팅게일은 박명(薄明), 밤, 그리고 어둠을 연상시키는 다른 새들 – 부엉이, 칼새, 까마귀, 갈가마귀 – 과 관련이 있고, 또 이를 넘어 여성들과도 관련이 있는데, 특히 노래하는 여성, 전통적으로 성적 유혹을 표상하는 여성(그들은 아마도 오셀로의 여주인공 데스디모나처럼 죄가 없겠지만)과 연결된다. 이 모든 것들이 국제적인 맥락에서 일어나는데, 사용된 복잡한 언어와 지리적 언급은 우리를 스웨덴,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워털루), 영국, 미국 남부, 크림반도로 안내한다. 이 자유시장 개념과 많은 종류의 음악에 대한 주의 환기는 국제간 협력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전쟁의 소리, 노예제의 암시, 최후의 심판(doom)에 대한 경고 역시 탐지할 수 있다. 성적인 차이(sexual difference)가 국가간의 차이 위에 중첩되고 있으며, 군사적 차이 위에 덧씌워지기도 한다. (또는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기도 하는데, 경야에서는 무엇이 문자 그대로이고, 무엇이 비유인지 확실하지 않다.)
(중략)
(이 글이 나오는 전체 74페이지에 달하는 장면이 어딘지 모를 더블린 바에서 TV와 라디오 방송과 떠들썩한 잡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이 글이 라디오 방송과 관련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모스부호가 이를 암시하며, ‘broadcast(방송)’을 프랑스에서는 ‘diffusion’이란 용어를 쓴다는 것도 그렇다. 1930년대 영국 BBC방송의 인기 프로그램 중 하나가 나이팅게일 노래 소리를 생방송으로 내보내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이 드러난다.
(이하 생략)
긴 인용이었지만, 어떻게 감이 오시는지(Does that ring a bell?). 애트리지는 이 부분이 그리 복잡하지 않은 부분이라고 했는데, 그럼 진짜 어려운 부분은 어떨지 과연 짐작이 가시는지? 이 소설이 2차 세계대전 전야인 1939년에 완성되었다는 것, 그가 당시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그래서 조이스 가족이 전쟁을 피해 남부 프랑스로 스위스로 옮겨 다니게 된다)을 고려하여 위의 해설에 한 가지 덧붙이면, 필자 귀에는 ‘Sunsink gang’에서 ‘해를 가라앉힌, 세상을 어둡게 만든, 암흑의’ 독일 나찌스 친위대 ‘SS 무리’가, ‘Hitherzither! Almost dotty! I must dash!’에서 ‘히틀러! 저 미친 놈! 해치워버려야지!’라는 소리가 들린다.
1939년 이 소설이 발표되자 평단이나 독자들의 반응은 ‘무관심’이었다고 한다. 누가 이렇게 골치 아픈, 알 수 없는 책에 신경을 쓰겠는가? 2차대전이 막바지인 5년 뒤, 1944년 미국의 (당시 40세의) 젊은 신화학자(神話學者) 조세프 캠벨(Joseph Campbell: 1904-1987)은 시인이자 소설가인 헨리 로빈슨(Henry Morton Robinson)과 함께 첫 번째 가이드를 내놓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도 이 책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A Skeleton(해골) Key to Finnegans Wake: Unlocking James Joyce’s Masterwork』라는 책이다. ‘집단의 꿈’이라는 신화와 중세문학을 연구한 사람이 처음으로 이 암호를 해독한 사람 중 하나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Tavern Brawl(술집에서의 말다툼)’이란 부제가 붙은 이 장면을 캠벨의 일상적인 말로 옮겨보자.
Radio Announcement:
You have just been listening to an excerpt from …(중략)…
Attention: Stand at!! Ease!!! [The three soldiers.] (attention: 차려, stand at ease 쉬어. 둘 다 군대에서 쓰는 구령이다 – 필자)
We are now broadcasting to our lovers of this sequence, the twofold song of the nightingales [the Two Girls], from their sheltered positions, hiding in rose-scenery on the hither side of the alluring grove. Silence all! Let every sound keep still; and when we press the pedal pick out and vowelize your name.
(캠벨, 위의 책, New World Library, 2005.10, p.231)
조이스는 경야가 율리시스에 비해서도 훨씬 난해하다는 불평에 대해 “사람들은 그것이 암난(暗難이겠지요? – 필자)스럽다고 한다. 그들은 그걸 율리시스와 비교한다. 그러나 율리시스의 행동은 대낮에 주로 일어났었다. 나의 새 책의 행동은 주로 밤에 일어난다. 밤에는 만사가 불명확한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답했다고 한다. (번역서, 작품 소개, p.631). 해설의 그 장황한 더듬거림도 밤중 꿈 속 잠깐 사이에 스쳐간 생각을 어떡하든 되살려보려는 안간힘에 불과하다고 보면, 왜 이 책의 언어를, 율리시스에서 시도한 ‘의식의 흐름(flow of consciousness)’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무의식(또는 잠재의식)의 흐름이며 ‘꿈의 언어(language of dream)’(앞의 책, pp.629-630)이라 하는지 충분히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러나, 역자의 번역 및 원문(각각 10줄에 불과)과 그 아래 해설을 비교해 보면, 과연 언어와 번역의 한계는 어디까지이며 언어와 번역의 관계는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 책이 특별히 예외적인 만큼, 그에 대한 답을 일반화시킬 생각은 없으며, 이 책에만 한정된 것이라고 해도 좋다. 애트리지의 해설처럼 구구절절 늘어놓으면 그것을 번역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원문이나 번역문 또는 캠벨의 해골만 남은 1차 암호해독문처럼 던져 놓으면, 도대체 어떤 ‘보통 독자’(특별해 봤자 마찬가지리라)가 이를 소화할 수 있겠는가? 필자는 좋은 번역의 기본 조건은 독자들이(그들이 누구이든) 알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또 최대한 원본을 반영해야 하며, 형식과 내용이 물론 조화를 이루면 최상이겠지만, 부득이 한 충돌의 경우에는 형식이 내용에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에 서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원본과 페이지, 줄 수를 맞추기 위해 역자는 아마도 끔찍한 노력을 했을 것이며, 이로부터 혹간 형식을 위해 내용을 희생하기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뒤에 나오는 여러 가지 역자의 말로 미루어봐도 억측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의 역자는 “하루 평균 7~8시간을 매일 원전原典의 반 쪽 또는 한 쪽, 심지어 한 단락을, 페이지당 100회 이상 각종 사전들을 뒤져야 하고, 수많은 참고서들을 섭렵涉獵해야 하는, 때로는 분통 터지는 노동은 율리시스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성싶었다…기나긴 세월 동안 참으로 인고忍苦에 다름 아니었으며, 영상靈想이 떠오르면 밤중에도 발작적으로 일어나야 했던 반半광증, 그것은 정녕코 수도승修道僧의 단말마적斷末魔的 고행과도 같은 경험이었다”고 토로하고 있다. (역자 서문, p.27)
역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조이스 역시 경제적 어려움과 전쟁의 음울한 그림자 속에, 녹내장(필자는 젊은 시절 아니 어린 시절부터의 방탕으로 인한 매독梅毒(syphilis)이 원인이라고 보는 입장에 기운다)으로 인한 10여 차례의 눈수술로 거의 실명에 가까운 상태에서(이게 이 책이 ‘흐릿한 책’이 된 원인은 아닐까?), 딸의 정신병 발작에 따른 괴로움 속에서도, 무려 17년에 걸쳐 이 작품을 썼다고 하니(평균 1페이지를 쓰는데 9일 걸렸고, 방금 우리가 본 단락 하나 쓰는데 3일이 걸렸다고 한다. Derek Attridge, 위의 글, pp.18-19), 우리가 이를 접근조차 하기 힘들다든지, 또는 암난하지 못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리라.
개그맨처럼 언어에 재치가 있는 사람이면 말을 다룰 때 언어에 내재한 의미의 다중성(多重星)을 이용하여 중의성(重義性: ambiguity)을 지닌 단편적인 말장난(pun)을 할 수는 있겠지만, 600페이지가 넘는 대작 소설 전체를 다의적多義的(polysemantic), 다성적多聲的(polyphonic), 60여 개가 넘는 다언어적多言語的(polylingual)인 언어(이를 역자는 경야어라 부른다, 역자 서문, p.25)로, 거기다가 온갖 인류의 꿈, 신화를 다져 넣어 쓸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는가? 필자도 위의 해설을 보기 전엔 조이스의 성취에 대해 반신반의했었다. 언어라는 매체媒體(medium)가 이렇게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다중의 뜻을 실을 수 있다니! 수많은 결(channel)을 갖추고 그 결마다 다른 언어와 뜻을 실을 수 있는 조이스의 언어는 요즘 말로 하면 ‘광대역廣帶域(broadband)’이자 ‘음성다중방송’에 틀림없겠다. 이는 물론 영어와 나아가서 언어의 장인匠人(master)이자, 치열한 문학정신을 가진 천재(天才) 조이스만이 가능했던 일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역자의 ‘우공이산(寓公移山)’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번역의 의미와 한계에 관련된 ‘보통 독자’로서의 아쉬움은 해소되지 않는다. 원본이나 해설서 없이 이 번역본만으로 과연 경야를 원본만큼 즐길 수 있을 것인가? 필자의 대답은 아무리 애를 써봐도 안된다는 것이다. 짤막한 위의 원본 해설 예에서 우리가 실제 경험했던, 수많은 언어들과, 그 의미의 중첩, 그 울리는 음성의 반향을 우리가 번역본에서도 대등하게 맛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주관적인 생각 또는 자만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역자로서 최선의 등가물(等價物)을 찾았다’ 말을 의심하자는 것은 아니다.
잠깐 앞의 상황으로 되돌아가보자. 번역본이 원본의 뜻을 해설만큼 잘 전해주던가? 혹시라도, 번역본이 오히려 원본의 이해에 지장을 준 것은 아닌가? 이 단락에 대한 여러 해설을 이미 본 입장에서 쉽게 말해, 원문이 쉬웠는가, 번역본이 쉬웠는가? 이에 대한 대답도 딱 정해져 있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독자의 영어/언어(우리말, 한자) 이해도나 지식은 천차만별일 테니까. 물론 이것도 필자의 주관적 판단이지만, 필자에게는 원본-해설 쪽이, 번역본-원본-해설을 거치는 쪽보다 훨씬 쉬웠다. 번역본-해설의 직접 연결은 (그 missing link로 인해) 필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의 지난한 것으로 보인다. 번역을 통해 한 꺼풀 벗겨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겹이 덧씌워진다면, 도대체 번역의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물론 역자도 원저의 시청각성, 음의音義의 동시적 효과에 대해서는 진작부터 주의했고(번역본, 작품 소개, pp.641-642), 또 나름대로 성과가 있다는 걸 우리 역시 직접 볼 수 있지만, 이 번역본의 울림이 원본의 울림과 동일 또는 등가(等價)라고 한다면 이 역시 필자처럼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겠는가? “산을 옮긴 결과물은 역시 산이로되, 원래 그 산이 아니더라”고 하면 비유가 될지 모르겠다. 더구나 한자를 점점 멀리하는 사회풍조인지라 세월이 지난 후 젊은 사람들이 이 번역본을 보면, 그 자체로 원본만큼 아득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의 아쉬움은 이 책이 ‘another, low-profile Wake’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필자의 생각이 기우(杞憂)가 아닌 것이, 이 번역본으로부터 5년 후의 역자는 이런 말을 한다.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김종건 옮김, 3정 최종개정판, 생각의 나무, 2007. 3).
“문체와 기법, 언어의 모방은 이질적 문학 작품의 번역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숙제다. “(위의 책, p.11)”
“역문의 가독성(可讀性)을 위해 언어의 다기적(多岐的) 변덕성(polymorphous perversity)을 가끔 어쩔 수 없이 해체하기는 했다… 이것이 작품의 산문성을 넓혀 독자의 이해를 돕는 것은 사실이나, 텍스트의 본질 또는 정신을 망가뜨리기 일쑤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위의 책, p.11)
“번역상, 복잡한 내용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하여 형식을 파괴하는 일은, 조이스 작품에 관한 한 결코 이상적인 해결책이 못 된다.” (위의 책 p.12)
“조이스는 언어의 대가이며, 이 ‘언어적 주술의 아수라장’을 번역하는 역자라면 이런 경험을 토대로 『율리시스』에도 그와 대등한 언어유희의 묘미와 취지를 살리고자 애쓰리라.” (위의 책, p.12)
“한글과 한자의 응축을 통한 이런 언어감각이 당분간은 생소할지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쌓이는 친밀감을 통해 작품을 한층 고양시킬 것이요, 그 현란한 ‘말(言) 맛’은 이내 고전이 되고 역사가 될 것이다.” (위의 책, p.13)
위의 말들은 앞서 말한 필자의 언어와 번역에 대한 생각과는 정반대 입장으로 보인다. 이질적(異質的)인 문학의 번역에서 내용이 아니고 형식이 우선이 될 수 있을까? ‘이질적’이라는 의미는 뭘까? ‘성질이 다르다’는 것은 ‘내용과 형식이 다르다’는 것이리라. 내용을 따르자니 형식이 울고, 형식을 따르자니 내용이 울 판인 어려움이 있을 때, 어떤 번역물의 독자가 전적으로 폐쇄적인 일군(一群)의 전문독자가 아닌 바에야, 5년 전 말대로 어떻게 “보통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지 계속 염려해야 하는 것이 번역 아닐까 하는 것이 필자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물음이다.
필자가 보건대, 역자가 정말 본보기가 되는 존경할만한 학자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부득이 내용까지 희생한 형식미의 전달에 있어서도 그만큼 뛰어난, 예술가로서의 번역가로서도 그런가? 다시 말해 ‘역자의 언어유희’는 성공하고 있는가? 그런데 과연 그것이 ‘역자의 언어유희’인가? ‘조이스 언어유희의 번역’인가? 역자가 나름으로 정의한 ‘번역’의 의미는 정당한가? 라는 물음에 대한 ‘보통 독자’로서 필자의 답은 회의적이며(정당한 문학사적 평가는 필자의 능력 한참 밖이다), 이 ‘괴물(monster)’ 번역이 아직은 우리 ‘보통 독자’에게는 과분하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이는 ‘보통 독자’의 개별 사정이 아니라, 우리말, 우리 번역, 우리 문학의 역사와 내용, 기법, 나아가 우리 문화와 지식 수준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도 역시 우리와 사정이 비슷하다. 이 책의 70년이 넘는 장구한 번역 역사에도 불구하고 1991년부터 1993년 사이 처음으로 완간된 야냐제 나오키의 번역본이, 조이스의 언어실험을 그대로 도입하여 해체하고 합성한 일본어를 만들어 번역한데다가, 문학적 격조를 유지하는데 성공했다고 하여 일본 영문학계의 지지를 받았지만, 일반 독자들은 그 난해함(esoteric nature)에 고개를 돌리게 되고*, 2004년 6월 미야타 교코라는 여류 번역가에 의해서 원본의 절반 분량인 축약번역본(그런데 주석까지 포함하면 흥미롭게도 원래 책과 같은 분량인 628페이지라고 한다) 이 나왔는데, 이는 신조어 없이 평이한 일본어를 사용 가독성을 높이고 어려운 설명은 각주로 처리했다는 데서, 일반 독자의 접근이 쉽고, 반응이 좋다고 한다. 아래 글에 우리나라의 구세대 영문학자라고 할 수 있는 나영균 교수(이화여대 명예교수)는 나오키의 번역을 극찬했다는 내용과, 신세대 영문학자라고 할 수 있는 전은경 교수(숭실대)는 교코의 방식이 일반독자에게 접근 가능한 방식이라고 호감을 표시했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도, 필자의 지금 생각과도 비슷한 간극(間隙)을 보여준다.
* Ito Eishiro: “he even translated “Joyce's style” into Japanese. Yanase's translation is a novel in its own right and a great masterpiece of Japanese literature…. However, his translation is too esoteric for the general reader: only a very limited number of academic and patient readers could finish it.”
from “Two Japanese Translations of Finnegans Wake Compared:Yanase (1991-1993) and Miyata (2004)”
- 이 논문은 2004년 11월 한국제임스조이스학회가 서울에서 개최한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되고, 위 학회가 발간하는 James Joyce Journal(JJJ) 2004년 12월호에 실렸다고 되어 있는데, 위 학회 홈페이지(www.joycesociety.or.kr)에서 다운받을 수 있는 자료를 보면, 제목에는 나오는데 내용은 빠져있다(pp.117-162 missing). 이는 아마도 판권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 내용은 아래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것이며, 판권이 있는 자료(copyrighted material)이다. 지금 일어번역과 관련된 내용은 다 이 자료를 참고하였다. 필자는 일어 능력이 없다.
(http://p-www.iwate-pu.ac.jp/~acro-ito/Joycean_Essays/FW_2JapTranslations.html)
필자가 이 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변죽만 울리고 있는 형편에(사실 다른 방법이 없기도 했다) 서평을 쓰는 만용을 부리는 것은, 필자가 발견한 이 책의 비밀을 여는 키 중의 하나를(물론 키는 하나가 아니라 무수할 것이다)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어서이며, 이 책과 같이 나온 "김종건, 피네간의 경야 안내, 범우사, 2002. 3"을 다시 사야 하는 고민과 함께, 우리나라에서도 일반 독자를 위한 미야타 교코 같은 번역자가 나올 수는 없나 기대를 가져보기 때문이다.
이 책을 다 읽을 능력도 없고 번역에 대한 기본적 입장마저 다른 처지에, 무슨 서평을 쓰며, 게다가 만점 평점까지 주느냐 욕할 사람도 있겠지만, 필자로서는 이 큰 산을 옮긴 노교수의 정열에는 이의(異義)가 없으며, 앞으로 이 위에 연구성과가 계속해서 쌓이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이다. 관점이 다르다고 그 존재와 의의마저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의 더 큰 부분을 놓치기에 딱 좋은 방법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