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올해의 미숙 ㅣ 창비만화도서관 2
정원 지음 / 창비 / 2019년 2월
평점 :
추운 겨울 자신만의 길을 묵묵하게 걸어가던 여자가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독자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옅은 톤으로 그린 숲은 겨울의 추위와 외로움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제목에 등장하는 미숙이의 눈길은 책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고 있습니다.
책은 시작부터 덤덤한 어조의 그림과 글로 언니의 병을 다루고 있고 죽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등장하는 어린 자매의 모습은 주인공 미숙과 언니 정숙 두 자매의 이야기입니다. 시인 아버지와 어쩔 수 없이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엄마와 두 딸은 가난이라는 굴레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인세랑, 너 그... 버는 거랑 해서 하면 되지.”
“쥐꼬리만 한 걸로 무슨...”
“뭐?”
“무슨 시를 쓴다고 앉아 가지고, 니 꿈은 니가 뒷바라지해. 왜 꿈은 니가 꾸고 뒷바라지는 내가 하니.”
“뭐?”
“혼자 꿈꾸고 지랄하지 말라고.” p.79
시를 쓰고 싶은 아빠의 이상은 가족의 생계라는 현실과 마주하며, 잦은 부부 싸움으로 이어지고 부부 싸움은 아빠가 엄마를 때리는 것에 이릅니다. 미숙은 학교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기도 하고 부당한 상황에 대응하지 않는 내성적인 아이로 살아갑니다. 그나마 의지하고 있던 언니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에 사춘기까지 오며 낯선 대상으로 바뀌어 미숙은 더욱더 고립감을 느낍니다.
“언니는 내 우상이었고 인내였다.
그런 언니가 변하기 시작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무너지고 있었다.
눈에 띄게.
그렇게 희망이 절망하고 있었다.” p.118
그 무렵, 미숙은 이혼한 부모님 집을 오가는 재이라는 친구를 사귀게 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당하고, 경제적으로도 미숙이보다 여유로운 재이와 미숙은 금방 친해집니다. 재이로 인해 새로운 것을 경험하게 되는 미숙에게 집의 존재감은 갈수록 줄어듭니다.
“방학은 나와 재이의 세상이었다.
매일같이 재이를 만났다.
안 해 본 걸 하는 게 좋았고,
해 본 걸 같이 하는 게 좋았다.
난 재이가 좋았고,
재이도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p.127-p.131
재이가 있는 학교가 좋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재이는 학교에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강아지를 데리고 왔습니다. 진돗개인 줄 알고 정성을 쏟지만, 진돗개가 아닌 것을 알고 방치하기 시작합니다.
“...아껴 줄 거면
끝까지 아껴 주지...
씨이발.“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부족한 아버지의 대한 원망을 미숙은 강아지에 빗대어 토해냅니다. 또다시 재이를 만나 재미난 시간들을 보내던 미숙은 재이가 미숙의 아프지만 숨기고픈 가정사를 소설로 써서 청소년문학상 금상을 탄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충격과 배신감에 학교를 그만둡니다.
검정고시를 치고, 연애를 하며, 작은 컨테이너 박스 안에 있는 작은 회사에서 일을 시작하며 미숙의 홀로서기는 시작됩니다.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아빠와 자매로서 비슷한 아픔을 품고 있던 언니는 같은 병에 걸려 결국 죽음에 이릅니다.
우울하고 회색빛 가득한 미숙의 삶은 많은 부분들이 우리들의 삶과 맞닿아 있습니다. 원망의 대상이 배신의 대상이 조금 다를 수 있고, 우여곡절을 겪는 구간이 조금 다를 뿐 모두 우리네 삶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다소 세련되게 감정 선을 표현하고 있기에 작품에 대한 감정 이입이 더욱 쉽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책을 읽는 내내 친구 한 명이 생각났습니다. 미숙처럼 덤덤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던 친구는 엄마와 함께 사고를 당한 뒤, 안전핀이 뽑힌 소화기처럼 위태로웠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와도 단절되었습니다. 함께한 추억이 많아 그녀가 생각나지만, 그저 추억으로 곱씹을 뿐입니다.
열등감 가득할 것 같은 미숙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피해 의식도 크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성숙된 그녀는 자신의 삶의 패턴을 찾아가고, 주어진 환경 안에서 본인이 해야 할 것을 해나갑니다.
학창시절 친구들로부터 ‘미숙아’란 놀림을 당했지만,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일찍 철든 아이처럼 상황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 심지 곧은 어른으로 성장한 듯합니다. 아버지보다 더 유명한 작가가 되어 가족들을 고달픈 삶에서 구해주길 읽는 내내 바랬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현실적인 이야기로서 우리를 위로해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