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육에 이르는 병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시공사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아아,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무서운 이 병과 비참함을 더욱 두렵게 만드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 이 병은 걸린 본인마저도 깨닫지 못하고 사람들 사이에 숨어 지내게 된다는 것이다.

-- page 7

 영화나 소설을 보기 전에 리뷰나 줄거리는 거의 읽지 않는 대신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의 평이 좋거나 좋아하는 작가라거나 하는 이유로 대강 결정하고 보는 편입니다. 지뢰를 밟을 때도 있지만 그 위험부담보다는 아예 아무 정보 없이 봄으로써 얻는 재미가 더 크다고 느끼니까요.

읽다 포기한 기억이 있는 키에르케고르의 책 제목을 패러디했기에 유독 눈에 띄었습니다. 어떤 정보도 읽지 않고, 책을 감싸는 띠지도 늘 그러듯 눈의 초점을 흐릿~ (=_=) 하게 하고 떼어냈지요. 띠지의 접착제가 있는 부분에 또 뭐라 써 있더군요. 여기에 문구를 쓰는 경우는 처음 보네? 아 궁금해 죽겠네.. 하면서도 일단 미루었다가 지금 보았습니다. 뒷표지도 지금 처음 봤어요. 아하~ 오홍~ 하면서 말이죠. ^^

 - 프롤로그 첫 문장부터 범인의 이름 등장. 에엥? 순간 잘못 읽었던 겁니다. 프롤로그가 아니라 에필로그를 맨앞에 두었군.. '음, 결말부터 쓰고 "이렇게 되어버린 연유는.." 하는 식의 얘기니까 특별한건 없지..'

 - 첫 챕터 첫 문장부터 아들의 범행을 의심하는 엄마 등장. '생각한거랑 달리 쫓고 쫓는 도서추리물인가보다..'

질질 끌면서 분위기 잡지 않고 시작부터 들이대는 전개를 보니 뭔가 작가의 자신감이 보인다고 할까요? ㅎㅎ

 (나중에 생각한 것이지만 에필로그에서 작가의 대담성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비유가 좀 이상하지만 문제집의 객관식 해답을 맨 첫 장에 실은 격이라고 할까요. 해답 숫자들만은 아무리 봐도 무의미하지만 문제 풀다 미리 답을 맞춰보는데는 도움이 될지도..)

 아니나 다를까, 초반부터 쉽게 이해될만한 설정과 구도를 독자의 머리에 쏙쏙 심어주시면서 아주 술술~ 잘 읽히는 긴박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교차서술되는 플롯은 아귀가 잘 맞게 매끄럽게 배열되어 있고, 흥미로웠습니다. 군더더기가 전혀 없는 문체. 굉장한 스피드. 서스펜스가 상당해서 땀을 잘 흘리지 않는 저도 계속 손에 땀이 차는걸 닦느라 혼났습니다.

 그 긴장감은 범죄의 엽기성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너무 엽기적인 이야기인지라 거리감이 느껴질 법도 한데.. 여러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불안, 공포, 죄책감, 광기, 컴플렉스, 이상심리, 회피를 위한 자기기만 등의 심리묘사가 너무나 실감나게 느껴졌기 때문인것 같네요. 특별히 가슴에 남는 문장을 꼽으라면 다 읽고 난 지금도 딱 하나 이렇게 생각나진 않는데, 쭉~ 읽으면 자연스럽게 와닿는 그런 심리묘사. 저는 이렇게 좋더군요. 눈에 확 들어오는 멋있는 문장들로 도배된 문체는 왠지 작위적인듯 할 때도 있지요.

 이게 좋은건지 나쁜건지 모르겠지만 초반에 결정적인 답을 알아차리긴 했습니다. 대략 초반 50페이지 내에 있는 어떤 어휘가 딱 하고 눈을 사로잡더군요. 이게 이런 종류의 트릭이라고는 생각조차 안하고 있었기 때문에 흠칫 했는데, 뭐 내 생각이 맞을수도 있고 아님 말고 식으로 계속 단서를 모으면서 읽었죠.

이 얘기를 꺼낸 것은 답을 일찍 짐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내내 너무 너무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상하고 있기 때문에 더 재미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거 아닐까? 하고 읽을 때만 새로이 추가되는 다른 종류의 서스펜스가 있습니다. 내막을 짐작하는 순간 맥이 빠져야 할텐데, 그러기는 커녕 갑자기 바윗돌 같은 걱정거리가 하나 얹어집니다. "아, 어떻게 되려고.." 휴,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이미 예정된 파국에서 만나기 위해 치닫는 3명의 주인공들.. 특히 마지막 챕터에서는 분(minute) 단위로 쪼개서 관점이 교차되는데 두근두근 숨넘어가는 줄 알았습니다. 저의 경우 과장 안 보태고 어릴적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벌벌 떨면서 부여잡던 때 이후 최고 긴장하며 읽은 책입니다. 마지막 장을 덮을때 불현듯 로스 맥도널드의 "소름"이 생각나더군요.

 반전 타령이 유행이라 그런지 오로지 반전에만 목숨 걸고 뒷통수만 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그 앞까지의 작품 내용을 희생하기까지 하는 예를 적잖이 보게 됩니다. 뒷통수를 세게 맞긴 했는데 내가 왜 맞았지? 아 기분나빠.. 이렇게까지 생각이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다행히 마지막 반전이 작품을 진정 빛나게 만드는 좋은 예가 아닐까 싶네요. 반전과 플롯 구조가 주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이 충격이 확실히 큰 "감동"을 줍니다. 감동이란 표현이 좀 이상하다면, 강한 여운과 함께 정말 진지하게 어떤 것을 생각하게끔 만듭니다.

 그래서 다시 읽어도 재미있고, 심지어 저같이 추리소설 범인 맞추기 타율 1할이 될까말까 하는 8번타자가 운좋게 답을 예상하고 읽었는데도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서스펜스 스릴러라는 관점에서만 봐도 훌륭하니까요.

 헌데 다시 읽어보니 어라, 어쩌면 반전이 이 작품의 핵심은 아니로구나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것은 본격물의 탈을 쓴 아주 독특한 사회파 미스터리가 아닐까 하는 느낌마저 들게 합니다. 가사이 기요시의 해설을 읽으니 사회적인 메시지를 더 공감할 수 있었고, 80년대말엽에 시의적절한 작품이었겠다 싶었습니다. "백야행", "범인에게 고한다"에서도 언급되는 미야자키 사건의 파장은 대단했나봐요. 물론 그것을 낳은 사회 분위기도..

 미스터리 작품들을 늘어놓은 스펙트럼이란게 있다면 대략 반대편에 놓여 있음직한 본격물과 사회물.. 이 작품은 그 중간 어디에 있는것이 아니라, 양쪽편에 깊게 걸쳐있는 것 같습니다. 

갈라질 걱정 없어 보이는 단단한 제본 상태, 인상적인 표지 디자인부터 작품의 질, 해설, 옮긴이 후기까지, 말 그대로 cover-to-cover로 "정말 좋은 작품을 읽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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