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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아송 ㅣ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2월
평점 :
우리에겐 중국문학평론가로도 익숙한 왕더웨이(王德威 David Der-Wei Wang) 하버드대 교수는 2009년, 문학평론지『당대작가평론(當代作家評論)』제1기에 발표한 글에서 옌롄커(閻連科)의 장편소설『풍아송(風雅頌)』을 일컬어「시경(詩經)의 도망」이라고 지칭한 바 있다. 옌롄커의 글쓰기에 의해 이미 소설 작품이 되어버린『풍아송』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시경’의 자취와 흔적은 기껏해야 각각의 장과 절의 구분명이 전부인 까닭에서다. 작가 스스로에게 있어서도 집필의 과정 중 상당히 고심하였을 부분 가운데 하나야말로 제목의 선택과 차례의 구성이었을 터인데, 그렇다면 과연 옌롄커가『풍아송』의 수사를 빌려 진정으로 전하고 싶었던 속뜻은 무엇일까.
우선『풍아송』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사상 최초의 하계 올림픽 개최로 인해 여러모로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었던 지난 2008년 6월에 옌롄커의 장편 역작으로 출간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타이완에서는 마이톈출판사(麥田出版社)를 통해 출판되었고, 한국에서는 이로부터 약 6년이 지난 2014년에서야 출판사 문학동네를 통하여 국내 독자들이 번역본을 접하게 되었다. 한편 작품의 발표 때마다 거듭된 판금조치를 마주한 옌롄커의 작가적 이력은 아이러니하게도 국내외로 그에 대한 명성을 홍보하여준 의외의 수확이기도 하였다. 이번에 국내에 소개된『풍아송』은 그나마 부분 삭제나 편집의 덧칠이 더해지지 않은 타이완의 판본을 원작으로 삼은 것으로서 옌롄커의 수사적 기교를 엿보기에 충분하다. 특히 이미 수차례 옌롄커의 저작을 지속적으로 번역한 바 있는 김태성 번역가의 정교하고 숙련된 솜씨는 가독성 면에서 작품으로의 몰입을 십분 끌어올려준다.
작가로서의 옌롄커 스스로는 자신의 작품이 가진 비평의 칼날은 철저하게 ‘나’ 자신에 대한 탐구를 향해 있는 것이라며, 정부 및 정책에 대한 비판의도가 깔려있다는 의혹들에 대해서는 확실히 금을 그어두고 있다. 하지만 『풍아송』 속에는 지금의 중국과 중국인들에 대한 시사적인 비평과 심리적인 묘사가 명쾌한 방식으로 작품의 요소요소에 자리해있음이 분명하다. 다만 그것이 모호한 함축적 비유에 기대어 있기에 한눈에 드러나지 않을 따름이며, 이는 마치 과거의『시경』이 풍·아·송에 대한 해석을 자유자재로움에 맡기고 있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갖게 한다.
『풍아송』은 본 작품의 주인공이라 보아도 괜찮을 양커(楊科)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개인의 가정사로부터 파생되는 이야기에 철저하게 집중한다. 언뜻 보기에 소설의 서사는 바러우(耙耬)산자락에 위치한 외딴 시골에서 상경 후 가정을 일궈낸 한 명의 지식인이 끝내 미치광이로 전락해버리고 있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양커의 타락과 몰락에 대한 책임을 독자로 하여금 고민해보게 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도드라지고 있는 것은 지식인에 대한 작가의 고발의식이다. 때문에 텍스트가 지식인 형상에 대한 명확한 비판의 의도를 가지고 집필되었다고 예단하기 쉽다. 물론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직접적인 표현이 자중되고 있을 뿐, 저자는 분명하게 되묻고 있다. 이 소설이 긴 호흡을 통해 얘기하고 싶은 것이 비단 중국지식인에 대한 비판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말이다.
『풍아송』에서 전개되는 갈등의 양상은 단지 칭옌대학(淸燕大學) 교수들의 비양심적인 작태로부터 양산된 부조리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표면적으로는 작중에서 등장하는 가상의 공간 칭옌대학이 현실에 실재하는 칭화대학(淸華大學)과 베이징대학(北京大學)을 연상시키고 있기에 중국 최고의 지성계를 향해 던지는 작가의 비수인양 비쳐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상상은 어디까지나 독자들의 몫이며, 자칫 텍스트가 가진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들을 단순화 내지 축소시켜버릴 수 있다. 다시 말해 지식인 간의 암투와 상호 비판 내지 양커의 도덕적 타락에 관련한 물음들이 작품 내부로 진입하는 데에 훌륭한 이정표가 되어주지만, 기실 『풍아송』 의 핵심이 되는 주제는 양커가 맞닥뜨리고 있는 혼란 속에서 찾아져야 하는 일종의 정신적 가치라는 것이며 이는 분명히 지식인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보다 우선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주인공 양커가 가정의 파탄 속에서 자신만의 연구를 계속해 나아가는 모습은 매우 인상 깊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비현실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의 모호한 일상이 지속됐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러한 계기로 인하여 양커는 진실된 연구의 목적과 가치에 한걸음 다가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중 갈등 요소의 본격적인 전개 이전부터 양커가 천착하여 왔던 『시경』에 관한 연구는 말 그대로 이미 경전화(經典化)되고 박제화 되어버린 권위적 텍스트에 대한 관찰 과정에 지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는 날것 그대로의 각종 위선과 불신을 경험하는 속에서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끝내 현실 감각마저 상실해버리는 나약한 인간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지식인이라는 껍데기가 스스로를 구원해줄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 오히려 양커는 희열과 자유를 만끽하게 된다. ‘천당거리’를 배회하며 그가 보여주는 거리낌 없는 행보는 마치 방종에 가까운 모습으로까지 그려지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스스로에게 엄습한 불안감과 초조함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하는 것이며 지극히 솔직한 자전적 표현이자 용기있는 고백의 반증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