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린 사람들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5
제임스 조이스 지음, 김병철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소년일 때 그는 아마도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떠난다. 새롭고 신기한 것을 보기 위해 그들은 떠나지만, 모험에서 자신들이 조금 파괴되는 것을 느낀다. <만난 사람>에서 소년들은 배를 타고 길 건너 항구에 도착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거기서 만난 이상한 사람 때문에 소년의 마음은 부서진다. 그 이상한 사람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기댄 친구를 사실 “멸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전의 마음을 간직할 수 없다.

<애러비>에서도 마찬가지다. 소년은 토요일 저녁에 있는 시내의 바자에 꼭 가고 싶어한다. 바자에 가는 계획이 조금 지연되지만 그는 기어이 밤 늦게 혼자서 바자에 도착한다. 그러나 그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바자는 너무도 보잘 것 없으며, 무언가를 사기에도 적합하지 않다. 그가 너무 늦은 것일까, 아니면 바자란 원래 그런 곳이었을까. 알 수는 없다. 그는 그저 이렇게 생각한다. “그 어둠 속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자니까 나 자신이 마치 허영에 몰리고 또 허영의 조롱을 받은 짐승만 같았다. 그리고 내 두 눈은 고뇌와 분노에 활활 타고 있었다.”(43)

친구들과 실컷 밤을 새고 허세롭게 트럼프를 하며 돈을 잃은 청년(<경주가 끝난 뒤>), 여자 꼬시는 일로 실컷 잘난 척을 하지만, 여자에게 몸을 팔고 결국 금화 한 닢을 손 안에 넣은 레네한과 코얼리(<두 부랑자>), 도시로 떠났던 친구 갤러허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의 천한 취향을 탓하고 어린 아이를 울려버린 꼬마 챈들러(<구름 한 점>), 팔씨름을 하다가 술값을 내게 되어 집으로 돌아온 패링튼은 어떠한가. 그는 괜히 아이에게 분풀이를 한다. 아이는 두 손을 모아 높이 쳐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때리지 마세요, 아빠! 저 아버지를 위해 기도 드릴게요…….아빠, 때리지 않으면 기도 드릴게요……기도 드릴게요…….”(<분풀이>)

아일랜드로 흘러들어오는 것, 즉 영국으로 대표되는 자본과 영국 왕의 환영 인사를 이야기하다가 문득 죽어버린 아일랜드의 국민당 당수 파넬을 떠올리는 <10월 6일의 위원실>사람들, 음악회에서 딸의 권리를 찾기 위해 애쓰지만 결국 비난 당하는 <어머니>, 술집 계단에서 넘어져 다친 자신을 위해 찾아온 친구들에게 강제로 개종을 당하는 커난. (<은총>) 커난은 결국 그 제수이트 성당에 나가 앉아있지만 그날 설교는 커난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하다. “예수는 우리 인간의 사소한 잘못도 이해하시고, 타락한 본성의 약점도 이해하시고, 이 세상살이의 여러 유혹도 이해하십니다...만일 여러분의 장부가 모든 점에 있어 잘 부합되면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자 수지계산을 맞춰보았더니 다 잘 되었습니다.’라고.”

부서진 마음들은 그러나 잊혀지지 않는다. 이 마음은 잊혀진 것 같지만 오래도록 사람의 마음에 숨어있다가 어느 순간 모습을 드러낸다. 마지막에 실린 소설 <死者>는 이 부서진 마음을 오랜 뒤에 해후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온갖 사람이 초대된 크리스마스 파티가 끝난 뒤, 가브리엘은 부인이 어떤 노래를 듣고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이상한 질투에 휩싸인다. 그러나 그 질투의 대상이 실은 아주 오래 전에 죽은 자임을 알고서 그는 망연자실한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나무 밑에 서 있는 한 청년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다른 모습들도 그 곁에 보였다. 그의 영혼은 무수히 많은 죽은 사람들이 사는 영역으로 벌써 다가갔다. 걷잡을 수 없이 어른거리는 死者들의 존재를 그는 의식하면서도 붙잡을 수가 없었다. 자기라는 존재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뿌연 세계로 사라져가고, 그들 죽은 사람들이 한때 살던 현실의 세계 그 자체는 허물어져 점점 줄어드는 것만 같았다.”(290-291, <사자死者>)

부서진 마음은 꼭 죽은 사람들처럼 붙잡을 수 없는 것이리라. 죽은 사람들이 살던 세계는 허물어지고 없어지지만, 결국 그 죽은 사람들의 부서지는 세계를 인식하는 것은 자기 자신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부서진 것들을 꼭 쥐고 싶어한다. 사실 조이스의 인물들은 자기 안에서 뭐가 부서져 나갔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래서 조이스는 그 부서진 것들을 알기 위해 그렇게 일상적인 대화, 사람들이 의미없이 흘려버린 그 행위들을 읊조리며 놓친 시간대를 더듬거린다.

아프게도 삶에서 파괴되는 것들은 언제나 내가 지키고 싶어하는 것들이다. 아마도 붙잡고 싶어하는 것도, 부서지는 것을 애닯아 하는 것도 내 마음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 마음은 도대체 어디에 정박해 있는 것일까. 아니 정박해 있기나 한 것일까. 이렇게 끝없이 흔들거리며 헤매는 마음이 과연 내 것이기나 한 것일까. 조이스는 그런 흔들리는 수많은 마음, 이미 파괴된 것들과 자신을 향해 떠밀려 오는 새로운 것들 앞에 서 흔들리는 자신의 이름을 ‘더블린 사람들’이라고 호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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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Z 2012-07-02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임스 조이스는 더블린 마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지만, 사실 이 소설에는 더블린 사람들에 대한 깊은 연민이 묻어 있다. 그 연민은 자신이 관찰하는 사람을 단순히 대상화한 것이 아니다. 그 연민은 지나간 자신의 과거와 자기 자신을 깊숙이 들여다보는데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내가 읽은 조이스는 너무 쓸쓸했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을 몇 편 마무리하고 율리시즈에 들어간다!
 

  소설의 화자는 자그마치 천 개이다. 따라서 이 소설에는 중심이라는 것이 없다. 게다가 목소리를 가지는 화자 역시도 인격을 지닌 존재보다 관념적인 화자(예를 들면, 만남 혹은 이혼 같은)나 사물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 추상적 주체들은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서술하며 세계를 드러낸다.

 

“나는 만남이다. 오늘 나는 항상 지구의 회전에 맞춰 현재를 사는 요이치에게 물거품 호수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담수어를 소개하였다... 한편 잉어는 요이치의 흐물흐물한 몸에서 심상치 않은 기가 전류처럼 생생하게 흐르고 있음을 인식하고, 백 년 남짓 살면서 이제야 비로소 대등하게 사귈 만한 인간을 만났다는 기분이 들었다. 둘은 보편의 물과 대기를 뚫고 잠시 서로의 가슴속을 들여다보았다. 그 동안 물결은 잠잠했고, 나는 새는 공중에 정지하였다.”(1권 72쪽)

 

관념과 사물의 세계는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리기 일쑤다. 즉 소설에서 한번 쯤 목소리를 얻었던 것들은 단 하루만에 온전히 사라지고 만다. 그것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생명을 얻은 것이라면 응당 죽어야 마당하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사물이나 관념이 드러낸 의지 역시도, 하루 만에 무의지로 변화하는 것도 이 소설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인다.

 

 

“나는 따스한 기운이다. 열렬한 애국심에 찬물을 끼얹고, 서민들의 속사정을 다 아는 척하는 위정자에게 자학의 미소를 띠게 하고, 치정으로 치닫기 쉬운 자의 머리를 식히고,....이렇게 하여 나는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으나 해가 기울면서 다시금 청량한 가을이 나를 밀어내, 해가 지고 나서는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았다.”(2권 279쪽)

 

이렇게 화자가 쉽게 사라지기 때문에, 마호로 마을을 감싸는 이 ‘나’라는 주체는 무한한 증식이 가능해 보인다. 그들은 매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노을이나 눈과 같은 자연현상 같기도 하고, 우두커니 집에서 잠자고 있는 사물들이 갑자기 생명을 얻어서 내는 목소리가 될 수도 있다. 아니 무엇이든 ‘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수많은 ‘나’들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이 있다. 그것은 요이치라는 병든 소년이다.

 

소설에서 요이치도 단 한번 자신의 목소리로 말을 한다. 늘 무언가의 배경 혹은 풍광으로 존재해서 일까. 요이치의 목소리는 마호로 마을의 수많은 사물의 목소리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어쩌면 요이치는 인간으로서 자신을 드러내기에 앞서, 사물로서 자신을 인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사물의 운명처럼 요이치의 세계도 금방 사그라드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요이치, 사람과 사물의 경계에 선 이 뇌성마비 소년은 제법 단단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이 의지는 사물들처럼 세계를 드러내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자신이 키우는 큰유리새가 ‘되고’ 싶을 뿐이다. 자신을 매혹시킨 단 하나의 대상이 ‘되기’ 위해 요이치는 자신의 전생애를 아픈 몸뚱이를 거의 투신한다. 큰유리새라는 중심에 다가가기 위해서 세계를 배회하고 맴돈다. 쉽게 사그라드는 의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하나의 고정된 상이 되려고 하지도 않고, 흔들리는 몸을 고정하여 거리 위에 우뚝 서려고 하지 않는다. 눕거나 굴러버린다.

 

요이치가 그렇게 천일이라는 시간을 어슬렁거린 결과 머리칼이 저절로 유리색으로 변하고 마침내 천 일이라는 시간도 요동을 치며 변화한다.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는 온 몸의 경련이 새의 날개짓이 된 것이다. 마침내 천 일은 영원이 되고 요이치도 새가 된다.

 

그러나 이 새가 된 경험은 요이치를 죽이고 말았다. 의지 그 자체가 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해 풍경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풍광이 된다는 것, 영원이 된다는 것은 죽음을 불사한다는 것이다. 의지라는 것은 애초에 드러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풍광처럼 힐끗 포착되었다 사라지는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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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과 인간 / 시인을 찾아서 김현 문학전집 3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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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목차

 

[상상력과 인간/시인을 찾아서]에 대하여

 

상상력과 인간

자서

1부 관념과 방법

     한 외국 문학도의 고백

   글은 왜 쓰는가

  감상과 극기

 시와 암시

 꽃의 이미지 분석

 상상력의 두 경향

 산문시 소고

 여성주의의 승리

 시와 톨스토이주의

 한국시의 이해

 

2부 시와 삶의 양식

광태 연구

  1. 문화 접변시의 문학인
  2. 미조네이슴과 여성 편향

김춘수와 시적 변용

  1. 존재의 탐구로서의 언어
  2. 식물적 상상력의 개발
  3. 처용의 시적 변용

현대시의 존재의 깊이 : 김구용

한국 현대시에 대한 세 가지 질문 : [평균율]동인

시인의 상상적 세계 : 고은

바람의 현상학 : 정현종

 

3부 정황과 응전

1969년의 문학적 상황1

1969년의 문학적 상황2

1970년의 문학적 상황

1971년의 문학적 상황

이해와 공감

  1. 산문과 시
  2. 한국시의 가능성
  3. 시와 탐구의 태도
  4. 젊은 시인들의 정신적 방황
  5. 현실 파악과 비관주으
  6. 시와 정직함
  7. [바다의 무덤]에 대하여
  8. 시와 상투형
  9. 소리와 죽음
  10. 오규원의 변모
  11. 신춘시와 자기 세계

 

4부 시인을 찾아서

책머리에

마주치지 않고는 시를 읽을 수 없다

김춘수를 찾아서

김수영을 찾아서

김종삼을 찾아서

전봉건을 찾아서

박성룡을 찾아서

박재삼을 찾아서

고은을 찾아서

황동규를 찾아서

정현종을 찾아서

원문 출처


글을 쓴다는 개성적인 행위는 글을 쓰는 자의 자리에 대한 탐구가 없는 한, 도로(徒勞)에 그쳐버릴 우려가 많다. 자기 문화의 특수성을 깨닫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자기 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문화의 고고학은, 그러므로, 자기가 서 있는 상황을 투철히 인식하고, 그것을 고려하여 극복해나가려는 태도를 말함이다. 그것은 수동적인 현실 파악이 아니라, 글은 왜 쓰는가 하는 근본적인 명제로 자기를 이끌고 가는 각성의 필요성이다. 글은 왜 쓰는가? 한국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화의 고고학에 집착할 수 밖에 없다. 28

 

* 시가 긴장의 소산이 아닐 때 그것은 상투어의 나열이 되어버린다. 그 상투어들은 정신이 긴장하여 사물을 단단한 질서의 틀 안으로 끌어들이지 못하고, 관습의 틀 속에서 응고해버릴 때에 얻어진다.  

* 자아가 실존하지 않을 때, 그리고 대상의 벌거벗음을 인식하고 놀라지 않는 한, 대상은 바라봄의 단순한 도구이며 대상과 자아 사이에는 아무러한 단절도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시는, 진정한 시는, 바타이유가 말하는 내적 경험으로서의 시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적 오브제에 대한 놀람이 없는 한, 그것은 리트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분명히 시가 아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시는 존재의 괴로움, 단절에서 오는 아픈 신음 소리이다. 그것을 뛰어 넘을 수는 없을 것인가. 이러한 문제는 낭만주의 이후 서구 시의 하나의 전통을 이루고 있는 듯이 보인다. 물론 그들은 거의 전부 실패하고 있다. 그러나, 사르트르도 말하고 있듯이 시란 실패하므로 존재하는 것이다. 실패 속에서 새로운 도전의 양식은 발견되고 시도된다. 그래서 시도 또한 새로운 형식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꽃이라는 이 아주 정적인 이미지에서 단절을 이끌어내온 몇몇 시인들의 언어에 우리는 경의를 표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분열을, 단절을 알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몇몇 시인들의 언어는 새로운 시의 지평을 열어주고 있는 셈이다. 79-80

* 상상력은 동적 이미지를 산출하는 능력과 형태적 이미지를 산출하는 능력의 둘로 나누어질 수 있다. 물론 이 말은 상상력이 개념화와는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개념화는 정확한 가치는 그 내역에 갖고 있지만 상상력은 "추상적 가치를 살(生)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형태적이건 동적이건 그것은 추상적 가치만을 얻을 따름이다...예술에 있어서는, 그러므로, 항상 추상적 가치가 선행하는 상상력이 작용한다. 시의 해석이 다양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82-83

동적 이미지와 형태적 이미지는 상상력이 나타나는 두 패턴이다. 두 패턴으로 상상력이 작용하는 것은 과거의 흔적에 의한 것인 듯하다. 상상력이 동적 이미지를 통해 나타나는 경우와 형태적 이미지를 통해 나타나는 경우는 다른 과거의 집적을 필요로 한다. 형태적 이미지를 통해 상상력이 작용하는 경우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생활에 필요한 이상의 물건들을 소유해본 사람이나 생활에 필요한 만큼의 물건을 소유해보지 못한 경우에 특히 그렇다. 새오할에 필요한 물건으로 채워진 생을 살아간 경우네는 그것들은 오랜 세월 사용한 사람의 의식에 녹아 혈육의 일부를 구성한다. 그러나, 그 이상이나 이하를 산 사람들에게는 물건이란 감정을 자극하는 애완물이 아니면 신경을 건드리는 자극적인 필수물이다. 그러한 물건들의 모습은 그런 사람들의 정신 깊숙이 인각되어, 하나의 콤플렉스를 형성한다. 그런 사람들에겐 과거란 세간이 많은 집과 같은 것이다. 그 집 속에 그들은 과거의 흔적들을 배열해놓고 그 흔적의 형태를 모든 것의 원형으로 생각한다. 지금의 모든 것은 과거의 그 흔적으로 귀환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람들에게는, 지금이란 과거의 한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화된 과거이다.....그 과거의 깊숙한 곳에는 흔적의 원형 같은 것이 숨겨져 있다. 그 원형은 과거를 배열한 집이며 경험의 한 극점이다. 모든 경험이 그 원형으로 귀환하여 과거를 형태를 이룬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것을 형태적 이미지라고 부를 수 있다.

반대로 우리가 동적 이미지를 산출하는 상상력이라고 부르는 경우에 있어서는 경험의 극점이 형태를 얻고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정신의 안벽을 격렬하게 스쳐지나간 '어떤' 힘에 의해 자극될 뿐이다. 이렇게 상상력이 작용하는 경우란 대부분 생활에 필요한 만큼의 물건을 소유하고 있고 필요한 만큼의 정신적 만족을 취할 수 있었던 사람에게 나타난다고 생각된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어느 정도의 만족을 얻을 수 있을 때는 물건이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것에 속한다. 그때에는 다만 정신의 안벽을 스쳐가는 감정의 질감만이 문제된다. ...동적으로 이미지를 구축하는 상상력을 소유한 사람들은 그러한 전이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계속 살아옴으로써 생활에 콤플렉스를 느끼는 것보다는 오히려 형이상학적이고 질적인 것, 정신을 구속하는어떤 힘에 콤플렉스를 느낀다. 그들에게 있어서 과거란 현재화된 그것이며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의 위치이다.

* 형태적 상상력이 가장 강하게 작용하는 경우를 최하림, 김화영, 이승훈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상상력이 동적으로 작용하는 경우를 우리는 이성부. 강호무. 정현종 등에게서 알아볼 수 있다. 83-88

 

 *위대한 정신들은 한 사회의 정신적 분위기를 폭넓고 첨예하게 제시함녀서 동시에 자기 자신이 그 문화의 모순으로 자기 자신을 규정함으로써 그 문화의 완전한 원에 흠을 가게 만드는 것이다....자신이 높은 완성자이면서 날카로운 모순이 되는 정신이나 그 역의 정신은 반드시 광태를 포용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광태는 생태적인 것이 아니라, 완성이며 동시에 모순인 이항 대립을 몸으로 체현하는 정신을 표현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광태야말로 폐쇄된 사회에서 뚫을 수 있는 유일한 정신의 양태라는 미셸 푸코의 말에 동의한다. 문화사적인 의미의 광태가 아닌 광태는 허무와 절망의 제스처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하듯이 제스처는 그것 자체로 폐쇄되어버리고 타인에게로 전이되지 않는다. 150

왜 문화 접변시에는 죽림 칠현의 허무주의, 해좌 칠현의 달관, 체혐, 구인회의 회고조의 체념이 청담이라는 관념과 술이라는 풍속을 얻어 나타나는 것일까? 그 원인은 무엇이며 그 의미는 무엇일까? 아주 거칠게 표현한다면, 한 문화의 강대한 힘이 그 문화에 어울리지 않는 사회를 압도할 때 그 문화에 물이 든 사람들의 의식을 사로잡는 것은 대부분이 회의와 체념이다.152

* 사대부적 교양인의 세계에 속해 있던 구인회는 근대주의와 그것에 의해 배태된 문학관을 수입하여 받아들인다. 그러나, 근대 문학이 가지고 있는 날카로운 현실 인식과 비판력은 일제의 강력한 문화 정책에 의해 의도적으로 배제되며, 그래서 근대 문학은 깔끔한 문장주의(이태준)으로 환원해버린다. 자기가 속한 계급의 모순과 갈등을 표현해야 할 근대 문학이 구인회에 오면, 지나간 시대를 회고조로 그리는 문장으로 변모해버리는 것이다. 후기 구인회에 이상과 같은 과격주의자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구인회는 새로운 시대의 이념을 일제의 악랄한 문화 정책에 의해 왜곡해서 우요하여 허무 의식을 노출한 그런 집단이다. 그때 남는 것은 문사로서의 깔끔한뿐이다.

* 한문을 현실에 맞게 재조립하였을 때 생겨나는 것은 자기가 속한 사회의 의미에 대한 철학이며 체념하지 않는 높은 정신이다. ([찬기파랑가]). 그러나 한문 습득을 교양인의 필수 조건으로 이해하게 되면 민중과 치자 사이의 간극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사대부 이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상당수가 내부적으로 신분적 불평들을 수락하고 있는 것은 그것 때문이며 바로 그 점에서 보들레르의 저주받은 시인과 그들의 분기점이 생겨난다. 보들레르의 저주받은 시인은 사회내에서 소외된 자들을 의미하지만 임춘의 곤액당하는 시인은 민중과 분리된 시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보들레르처럼 심각하게 절망하지 않고, 체념의 제스처를 취하지만 그 속에도 자신의 교양인임에 대한 의식은 깊이 인각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민중과 권력에게서 분리되어 있찌만 이념과 친구들에게서까지 소외된 것은 아니다. 그의 가난은 그의 죄가 아니라, 그를 이해해주지 못한 자들의 죄이다. 157

*  어떤 사람들은 거짓말을 한다. 가능한 사실, 사물의 실재, 발레리의 표현을 빌면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를 포기하고, "인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수락하고, 사랑받기 위해서"(사르트르) 그들은 언어를 사용한다. 삼류 시인들의 전형적 패턴이다. 그러나, 이렇게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침묵하기 위하여 말을 한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말한다. 발레리의 말을 빌면 그들의 언어는 부정으로서의 언어이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 하기 때문이다. 182

* 시는 행위를 언어 속에 이끌어들이고 그 속에서 녹이고 용해시키는 반면에 산문은 행위가 언어를 학대하고 이끌고 다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시와 산문의 구별점이란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217

* 마종기 시에서 가족. 가족은 그것을 산출시킨 사회의 최 단위이다. 거기서 지켜지는 것은 그 사회의 최소한의 터부이다. 그것을 지키고 극복한다는 것은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을 발견하려는 시인의 의지를 나타낸다. 그리고, 그 의지는 가족 개개인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그 의지는 삶의 전제 조건이지, 그것이 곧 삶은 아니다. 마종기의 시적 공간이 내보여주는 서정성은 그 의지의 확인에서 온다. 그러나 그의 시에는 의지의 체현이 없다. 233

*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능한 한 산문적인 요소는 배제되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는 말라르메가 말하듯이 '암시'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 나는 '이다'체로 끝나는 것을 산문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행위가 언어의 밖에 노출되어 있을 때, 그것이 산문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335              

* 많은 시인들이 시는 언어다라는 가장 단순한 명제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나는 알았다. 적어도 시인으로서 한국어의 가능성, 이 사랑스런 모국어의 가능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이 적다는 그 놀라운 사실을 지적할 뿐이다....모국어가 가지는 가장 큰 약점인 사고의 내용을 어색함 없이 밝혀줄 관념어가 드물다는 점과 청각적 이미지를 나타낼 시의 형태와 시어의 부족에서 그것이 야기되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이러한 부족을 시인들은 산문적인 행위로서 억지로 메우려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들은 실패하고 있다...이 빈사의 모국어에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모국어의 가능성을 보여줄 때까지 나는 기다릴 수밖엔 없다. 343-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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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 문학의 이론 / 사회와 윤리 김현 문학전집 2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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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부 현대 한국 문학의이론 -한국 문학에 대한 역사적 성찰

1장 한국 문학의 양식화에 대한 고찰

2장 한국 문학의 가능성

3장 한국 소설의 가능성

4장 한국 비평의 가능성

5장 한국 개화기의 문학인

6장 식민지 시대의 문학

 

2부 사회와 윤리

1장 샤머니즘과 허무주의

  1. 문학이란 무엇인가1
  2. 문학이란 무엇인가2
  3. 비평 방법의 반성
  4. 염상섭과 발자크
  5. 허무주의와 그 극복
  6. 민족문학의 의미
  7. 무협소설은 왜 읽히는가
  8. 테러리즘의 문학
  9. 미지인의 초상1
  10. 미지인의 초상

 

2장 분석과 이해

  1.  위장된 조화와 분열.이효석
  2. 소박한 수락. 황순원
  3. 신념과 체념의 인간상 김성한
  4. 에피메니드의 역설. 장용학
  5. 소시민의 한계. 이범선
  6. 최인훈에 대한 네 개의 산문

    1) 헤겔주의자의 고백

    2)최인훈의 정치학

    3)풍속적 인간

    4) 정신의 치유술

  7. 일탈과 콤플렉스에서의 해방.이제하
  8. 구원의 문학과 개인주의.김승옥

    1)자기 세계의 의미

    2) 존재와 소유

  9.  60년대 작가 소묘

1) 굴욕과 수락:홍성원

2) 장인의 고뇌. 외 : 이청준

3) 방황과 야성 : 박태순

4) 요나 콤플렉스의 한 표현 : 박상륭

5)수동적 세계관의 극복:박원일

6)수동적 세계관의 극복:김원일

7)좌절과 인간적 삶: 송영

10.  초월과 고문.최인호

 

통시적인 문학 연구와 공시적 문학 이해의 모순된 문제를 문학 전체로 파악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 몇 개의 사실형을 추출해내고 사실형의 배후를 흐르는 진실을 파악해야한다.

양식화가 행해진 현실들을 사실형으로 파악하고 그 양식화 내부를 흐르는 질서를 파악하는 것. 13

양식화와 고정화 : 양식화는 유동화고 있고, 질서를 갖고 있지 않고, 혼란되어 있는 것에, 질서를 부여하고 통일시키는 능력이다. 반대로 고정화란 질서화를 반드시 요구하지 않는다. 어떤 것이 고정된다라는 말은 질서 이전에 응고된다는 것. 응고되어 흐르지 않는 물처럼 썩는다. 어떤 것의 고정화는 그러므로 반드시 맹목적인 신앙과 결부되어 그 치부를 노출한다. 양식화는 그러나 질서에 대한 욕구이다. 그것은 질서 이전에 그대로 응고되어버리는 일이 없다.

삶 자체가 일종의 양식화의 총체이듯이, 문학 작품 역시 그런 것의 총체이다.

우리는 우리안에서 어떤 것을 절단하여 그것을 고려하고 비판한다. 이러한 작업은 항상 양식화의 한 변형이다. 양식화는 질서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학 작품이 현실의 질서화나 양식화를 말해주지 않을 때, 그것은 다만 혼돈과 무질서뿐일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든지 작품은 무질서와 혼돈 속에서 질서를 갖고 있는 세계를 재현해내는 작업이다. 무질서하고 탁하고 찐덕거리고 혼란되어 있는 세계를 조정하여 작품은 거기에 질서를 부여한다. 14

어떤 것이 양식화된다면, 반드시 그 양식화에 대한 반발이 그 속에 내재하여 있지 않으면 안된다. 많은 우수한 평론가들의 말대로 양식화란 의미를 이루려는 부분과 의미를 이루지 않으려는 부분의 부단한 대립이다. 양식화하려는 노력 속에는 이 두개의 힘이 항상 서로 반대의 작용을 함으로써 서로의 균형을 유지한다. 의미를 이루려는 부분이 너무 지나칠 때 그것은 고정화되고 썩어버린다. 그리고 의미미를 이루지 않으려는 부분이 지나칠 때, 그것은 넌센스와 무, 다시 혼란으로 되돌아간다. 15

 

 양식화란 결국 의식의 문제다. 의식은 수럴이 밝힌대로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다. 그 어떤 것이 소위 이름의 적음으로 인해서 한정되어 있다면 의식 자체가 한정된 것임에 틀림없다. 그 한정성을 나는 양식화의 경향이라는 말로써 표현하고 싶다. 15

 양식화의 경향을 찾아내는 것은 한국인의 근본적 사상 체계를 찾아내는 것과 근사한 일의 분량을 요구한다. ...어떤 나라의 문학이 아무리 다양하고 복잡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 나라의 소산인 이상 기본적인 양식화의 현상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기본적 양식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아마 같은 지역, 기후, 풍토, 언어, 습관 에서 기인할 것임에 틀림없다. 15

나는 한국인의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양식화의 태도를 박종홍의 다음 부분에서 얻어내려고 한다. "신라 말엽에 국세가 쇠잔하여 군웅이 할거하는 난세가 되자.....높은 수준의 교양을 쌓으며 사상의 학적인 추구를 일삼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고, 그런 까다롭고 힘든 생활 태도보다 불가사의한 힘에 의한 요행을 바라는 풍조가 싹튼 것이다. ...이러한 추에세 발맞추어 미래의 성쇠화복을 상징적으로 예언하는 참설 또는 지세를 상하여 택지나 도읍 내지 묘소를 택함으로써 앞날의 번영을 도모하려는 풍수설 즉 감여술의 성행이요 더 나아가 미륵불의 출현에 대한 현혹이다. ..이런 미래상의 현실적 집약은 오히려 한국 사상을 일관하는 밑받침으로서의 생활 신조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17-18

 

이 미래상의 현실적 집약은 박에 의하면 대강 세 가지의 큰 양태로 구분될 수 있다. 풍수도참 사상과 미륵불 숭앙 사상과 선종 사상이 그것이다.

가장 오랜 것은 풍수도참설인데, 창시자인 도선 이전에 벌써 형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예가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

여러 소론을 종합해보면 한국인의 본래적 사고 양식은 영원한 것에의 동경이 아니고, 현세적인 것을 영원히 지속시키려는,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다시 복을 누리겠다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는 몇 가지 독특한 틀이 생겨난다.

첫째, 개인 의식의 소멸이다. 원시 사상에서도 자기란 타인의 생을 여기서 현재 살고 있는 일종의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깊은데, 이런 생각에서 자아의 표정은 영원히 성립되지 않는다. 자아와 타자의 거리가 없으므로 아예 자아란 성립불가하다. 현세에 혜택을 입는다해도 그것은 전생의 타인이었던 자기를 통해서이다.

둘째로는 사고의 미분화이다. 개인이 없는 곳에서 사고가 분화할 수 없다. 나와 타인이 같다면 사고 분화란 생겨날 수 없다...

셋째, 사고 미분화는 반드시 또 맹목적인 신앙을 부른다. 이 맹목적인 신앙은 미륵 하생 사상과 밀접히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인데, 어떤 메시아적 선언이 들리기만 하면 거기에 현혹되는 경향은 바로 이 맹목적 선언이 들리기만 하면 거기에 현혹되는 경향은 바로 이 맹목적 신앙을 웅변으로 말해준다. 21

 

한국인의 양식화는 세번의 편차를 보여준다. 1) 신라. 고려기의 불교적 양식화 2) 유교적 양식화 3) 최근 1890년대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적 양식화.

1890년대 이후 자유시 이전까지 한국 문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던 향가의 틀이 결정된 것은 바로 이 시대다. 향가의 폭넓은 보급과 우리 문학이 보여줄 수 있었던 아주 높은 상태에의 도달은 신라인의 정신, 현실을 보는 눈이, 우리 민족의 그것에 아주 적합하게 접촉되어 있다는 좋은 증거이다.  ...향가가 동방의 많은 노래 중에서도 무가의 가장 정제된 형태라는 많은 사람들의 소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현세 집약적 사고는 본래적으로 생활적인 것에 속한다. 그것은 문학의 양식화를 근본에 있어 흔들어버린다. 세속적인 것에는 장식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시적인 것에는 장식적인 것이 반드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문학과 사상이 부딪쳐 현세 이익이 승하면 문학은 양식화되지 않는다. 그러면 어디서 문학의 양식화가 불러내졌는가. 그것은 그 샤먼적 요소이다...

향가 성립에서 무축 신앙의 "정서적 긴장을 조성하는 환경" "주문 주술자의 조건, 주술의 전통" 중요한 것은 주문인데 그 주문의 힘은 주로 "음성적 효과, 자연음의 묘사, 목적을 선택하여 부른 말, 선조나 영을 부르는 것"에 의거한다.

이 무축 신앙의 대표적 상징이 처용이다.

 주술로서의 시가가 점차 고도의 형태를 만들어가서 향가라는 높은 시 양식을 만들엇음에 틀림없다. 26

 1880년대는 한국 문학이 가장 비극적인 모습이 점철된 때이다. 기독교는 너무나 당돌히 한국 문화에 접목되었기 때문이다. 파머에 의하면 한국에서 기독교가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독교가 민족주의의 증오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데 있었다. 한국의 경우 민족주의의 증오의 대상은 일본이다. ...일본의 침략이 시작된 이래 유교적 태도가 그 응고된 규범 때문에 그것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힘들게 되자 서구화에 의한 방법으로 그것을 물리쳐보겠다는 생각이 팽배한 셈이다. 45

한국을 모든 면에서 서구화시키지 않으면 일본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비할 수 없다는 것을 기독교는 가르쳤다. 그러기 위해서는 합리주의와 이원론이 뿌리박지 않으면 안된다. 규범보다는 개인의 논리가 더 존중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것을 가르쳐주어야 할 기독교는 사실상 한국적 현세 집약적 사상과 밀접히 관련을 맺고 그 세력을 넓힌다. 한국 기독교의 가장 큰 비극은 기독교가 박봉랑의 말대로 기독교의 논리 속에 한국의 현세 집약적 사상을 지양시키지 못하고, 기독교 자체가 그 속에서 응고해버린데 있다. 45

 과거의 정신태도는 현실에대처할 수 없게 되어버리고 이런 기독교와 발을 맞추어 서구 문학이 수입된다. 소설과 시. 희곡 등의 전연 새로운 쟝르들이 수입된다. 이 새로운 쟝르의 수입은 1896년의 찬송가의 번역에 큰 힘을 얻고 있다..

찬송가에 의해 근대화.서구화 경향, 혹은 애국 애족을 주제로 하는 창가의 급속한 발달을 보앗고, 1919년의 주요한의 '불놀이'발표 이후 서구시와 서구 소설이라는 새로운 쟝르는 완전히 판소리 같은 재래 쟝르를 제압하고 문학사의 전면에 나타난다. 이러한 사정을 비극적으로 잘 보여준 것이 이인직의 혈의 누이다. 46

기독교적인 영향력의 확대, 즉 기독교적 양식화의 경향 확대가 이루어져서 대립의 사고 양식이 형성되고 합리주의와 이원론이 올바로 정착하여 한국적 현세 집약적 사상을 올바르게 지양시킬 수만 있었다면 한국 문학의 가능성은 퍽 커졌을 것이다. 아니면 판소리의 정당한 발전이 이루어져서 그 장르의 분화로서 16세기 이후의 서구 문화의 발전을 계속할 수 있었다면 한국 문학의 앞날은 퍽 밝았을 것이다.

염상섭의 <삼대>의 조상훈은 기독교의 표피적 이식을 전형적으로 육화한 개인이다..48-49

가령 향가라는 형태는 불교적 이념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형태면에서 일구 사음보를 밟음으로써 안정된 정신 세계를, 내용면에서느 개인의 초월을 노래함으로써 불교적 이념을 샤머니즘의 와중에서 구출한다. 불교적 이념이 샤머니즘 대신 신라 지배층을 사로잡게 된 것은 불교의 호국 신앙때문이다. 

 

 <한국 문학의가능성>

오늘날의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이념형은 어떤 것이며, 어떤 것이 고취도고 있는가. 그것은 과연 한국 사회의 정당한 발전과 얼마나 대응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회의 이념형은 그 사회를 지배하고 이끌어나가는 지배 계층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18세기 불란서 부르조아지들의 객관성, 세련된 취미, 명료성 등의 규범을 내세운 것은 그 좋은 증좌이다. ...

한 시대의 문화, 한 사회의 문화를 그 지배 계층의 이념과 결부시켜 이해하려는 태도를 나는 문화의 고고학적 태도라고 불러왔는데, 골드만은 그런 태도를 '발생론적 구조주의적 방법'이라는 현학적 어휘로 명명하고 있다. "발생학적 구조주의의 근본적 성격은 문학 창조의 집합적 성격이 작품 세계의 구조가 어떤 사회 집단의 심리적 구조와 대응한다, 혹은 그것을 인지할 만한 관계를 갖는다라는 사실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향가는 신라의 불교적 이념과 밀접한연관이 있다...불교 이념이 샤머니즘 대신 신라 지배층을 사로잡게 된 것은 불교의 호국 신앙 때무니다..

개화기 이후에는 외국이론이 그대로 이념형으로 채택될 따름 57

 순수 문학과 참여 무학의 대립은 언어의 특성에 대한 깊은 오해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그 두 문학 유파는 서로 극단적으로 배치되는 이념형을 주장한다. 순수 문학은 언어의 세련도=정치 배제의 문학을, 참여 문학은 언어의 활동성=정치 참여의 문학을 주장한다. 언어의 질서에 관심을 갖고 있느냐, 갖고 있지 않느냐, 남북분열, 도시 농촌격차에 관심여하에 따라 순수 문학과 참여 문학으로 결정된다. 61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세워야 할 이념형은 무엇인가. 나로서는 현상황을 주어진 환경으로 수락하는 문화의 고고학적 태도가 가장 바람직하게 생각된다. 새로운 이념형을 무턱대고 세우려 하는 것보다는, 새 이념형의 설정이 새것 콤플렉스의 소산이라는 것, 문화 담당층이 아직 형성되지 않은 탓에 혼란이 계속된다는 것, 그새 계층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사고의 악순환만 계속됨을 투철하게 인식하는 문화의 고고학적 태도가 사태를 호전시킬 것이다. 의식이 혼란을 일으킨 것이 사실이라면, 그 혼란을 다른 방법을 진정시키려 하다가 그것을 더욱 조장시키지 말고, 그 혼란을 의식함으로써 진정시키는 일. 의식인의 윤리라 부를 수 있는 이런 태도는 60년대 문학의 한 기조를 이룬다. 최인훈, 김승옥, 이청준, 박태순, 박상륭, 홍성원, 이성부, 이승훈, 정현종. 63

 상상력은 시대와의 계속적인 긴장 관계를 통해 그 시대에 알맞는 구조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그 구조는 무이다. 그러나 그 무는 현실을 조명하면서 그 무엇이 되어간다.

 

 예술에서 진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로브 그리예가 주장하듯 개인의 상상력의 현실에 대한 반응이다. 그것은 올바르거나 올바르지 않다. 다만 개인적이다. 그것은 물론 환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환상은 공상, 가능성 없는 헛된 꿈이지만, 상상력은 물질, 다시 말하자면 환경이나 현실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몽상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상상력은 그러므로 물질적이다. 그것은 유동하고 있지만 개인의 경험을 통해 점차로 형태를 얻기 시작한다. 그 형태는 그것이 개인의 진실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해석의 다양성을 갖는다. 그 개인의 상상력이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개인적인 편차라든가 차이 같은 것은 그 시대적 분위기에 비하면 큰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이 진술의 어느 한 측면을 이룬다. 87

 

 상상력은 한 시대의 분위기를 자기 나름을 파악하여 그것을 논리화한다. 그러나 그것이 논리화되는 순간 상상력은 다시 새로운 시대의 분위기를 민감하게 파악한다. 상상력은 계속 유동하고 배반한다. '촉발적'이다. 87

 

"도식화하지 말라, 당신의 상상력으로 시대의 핵을 붙잡으라. 내가 할 수 있는 충고는 이것 뿐이다."94

 

<문학의 기원>

:문학의 기원을 논하는 것은 인간이 자기를 표시하게 되는 인간 정신의 형성 과정을 논의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인간이 상징적 기호를 산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는가의 문제는 대부분 희망과 추측의 심리학에 지나지 않는다. 기원에 의한 논의는 가능한 한 없어지는 것이 좋으며, 그것은 문학 자체에 대한 탐구로 바뀌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다. 156

 

문학은 인간 정신이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폭넓은 공간이며, 그래서 거기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 정신의 자유로움이다. 물론 장르에 따라 내용과 형식이 미리 주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위대한 정신은 언제나 그러한 제약을 뛰어넘는다. 자기를 표현할 능력을 가지지 못한 정신은 정신이 아니다.

아름다운 형식은 미리 만들어진 상태로 주어지는 법이 없다. 그것은 형식 자체를 부정하려는 강인한 정신과의 부단한 싸움 밑에서 얻어진다. 아름답다는 것은 '상투적인' 그리고 우리 앞에 널려 있는 것을 줍는 작업이 아니라, 인간 정신을 좁은 형식 속에 잡아가두어두려는 모든 음험하고 악랄한 것과의 싸움에서 얻어지는 보상인 것이다. 그러나, 참된 것 역시 아름다운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주위에 그대로 널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을 억압하고 축소시켜, 이때까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인간을 보다 큰 정신의 지평 속에서 생활하게 만든 공간을 파괴하려는 힘과의 싸움 속에 깃들여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름답고 착한 것이, 다른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는 착하고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것이 무슨 의미를 띠는 것인가를 반성하는 작업이야말로 문학 본래의 지평으로 문학인들을 이끄는 유일한 길이다. 문학은 단지 아름답고, 단지 착하고 진실한 것만이 아니다. 문학은 아름다우며 착하며 진실하며 그리고 그 이상의 것이다. 159

 

형태란 질서 개념이다. 혼란되어 있고 질서를 얻지 못한 것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노력처럼 힘든 것은 없으며, 좋은 형태는 그러한 질서화의 작업의 결과이다.

좋은 형태는, 그러므로 상투화된 질서를 오히려 배격한다. 상투화된 질서는 여러 사람들에게 이미 인지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전달이 쉽고 이해하기 쉽다. 그것은 잘 만들어진 질서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좋은 형태란 잘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때까지 질서화되지 아니한 부분을 새롭게 형태화하려는 노력 없이는 얻어지지 아니한다. 162

일상적인 삶 뒤에 감추어져 있는 진실은 그것을 질서화하고 거기에 형태를 부여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 질서로서의 형태에 대한 집착이 없는 한, 문학은 상투형에 지나지 않게 된다. 162

좋은 형태는 자유로운 탐구 밑에서 가능한 것이지, 억압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억압은 곧 획일이기 때문이다. 미리 주어지는 질서는 질서화하는 정신을 오히려 마비시킨다. 정신이 마비되면 형식만이 남는다.163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문학은 그런 윤리감의 혼란을 깨달은 문학이다. 대혁명 이후의 문학에서 항상 윤리 의식이 문제디고 있음은 그것이 그 어느 때보다 심한 이념과 풍속의 괴리를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여러 작품들은 그런 보편적 인간의 연애, 질투, 명예심, 우유부단함을 묘사하며 몰리에르, 코르네이유, 라신 등은 인간 감정의 드라마를 엄격한 고전주의 작시법에 의해 표현한다. 낭만주의자들은 혁명 이후 회의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윤리를 탐구하려는 자들은 절대적 진리를 믿지 않는다.168

윤리나 도덕은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다. 그것은 항상 교정될 수 있다. 그 주장은 그러나 인간성 개조론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성 개조론의 뒤에는 과거의 윤리에 대한 강한 동경이 숨어 있다. 인간성을 절대적인 자족체로 보고 그 최고의 상태를 미리 설정해놓은 다음 그것을 향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주장은 논리가 아니라 신앙이며,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비윤리적이다.

예술이나 윤리성은 작품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게 아니다. 그것은 작가가 속한 사회의 배분 원칙을 자세히 관찰하고 자기가 관찰한 것을 반성하여 그것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가운데서 얻어지는 어떤 것이다. 어떤 작가에게 있어서 윤리성이나 예술성은 그가 얼마나 정직하게 그가 속한 사회와 그 사회가 그에게 요구하는 금제들을 관찰하고 반성하고 있는가와 동의어이다. 그를 읽는 독자들은 그를 통해서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진실한 구조를 알아낼 수 있다. 169-170

 

<문학이란 무엇인가2>

 지식인의 죄는 그가 백수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엘리트주의를 포기한데에 있는 것이다. 그 과정은 최인훈과 이청준의 작품 속에 풍부히 드러나고 있다. 190

창작가는 한국적인 것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이 인간답게 살도록 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비평가는 그들의 지적 노력을 이해시키고 그것을 폭넓게 문화 전반으로 확대시킴으로써 창작가와 마찬가지로 민족을 위해 싸운다. 비평은 논리 조작의 기술이 아니라, 삶을 이해하고 반성하는 정신의 움직임인 것이다. 192-193

 

 모든 소설이 그러하듯 <화분> 역시 존재에 대한 하나의 태도의 기술이다. 존재에 대한 하나이 태도의 기술이라는 점에서 <화분>은 분열의 드라마이다. 구원되지 아니하고, 완전히 존재의 빛 속에 잠겨 있을 수 없으며 부단히 생기 되고 폐기되는 존재의 위치에 우리가, 소설의 히어로가 서 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존재에 대한 태도의 기술은 분열의 드라마를 요구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분>은 분열의 드라마는 아니다. 오히려 칼빈적인 의미에서 조화되어 있고 예정되어 있다. ..분열의 드라마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가 오히려 인물을 휩싸고 있는 언어 속에 완전히 녹아버려 다만 언어만이 남아 소설을 이룩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282-3)

 

생성되어 가고 있는 장용학의 주인공들의 입장에 선다면 그들은 모두 독특한 외상을 입은 노이로제 환자가 아니면 정신박약자이고, 소설 밖에서 그들을 바라본다면 그들은 현대의 가장 독특한 한 현상인 언어-주문의 병을 앓고 있는 실존적 개인이라는 것이다. (315)

장용학의 소설은 그 내부에서 바라보면 구질구질한 노이로제 호나자의 일지에 지나지 않지만, 밖에서 바라본다면 그것은 긍정적인 인간, 혹은 실존하는 인간을 찾기 위한 빛나는 노력의 기록으로 보인다. 그러면 장용학은 무엇을 현대의 병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무엇을 그 치료법으로 생각호고 있을까. ...아홉시병의 우화는 장용학 소설이 밖에서 바라보면 언어-주문, 혹은 말을 바꾸면 헛된 이름이라는 병을 앓고 있는 개인의 기록이라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면 장용학이 언어, 혹은 '이름'이라는 것으로써 말하려고 한 것은 무엇인가. ....그에게 있어서는 제도, 의무. 역사라는 것은 모두 이름의 비극이 빚어내는 포즈에 지나지 않는다. ..이름의 병폐는 이름이 '인간적'이라는 허울 밑에 인간을 말살하려 한다는 데에 있다. 사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언어, 아홉시병의 우화가 가르쳐준 대로 장난으로 시작한 언어가 마침내 사실을 지배하게 된다는 놀라운 사태ㅡ 이것이 현대의 큰 비극이라고 장용학은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토양에서는 모든 것은 언어에 의해 질서를 부여받고 인간을 지배해나간다. 진정한 인간은 이때 질식되고, 남은 것은 '허연 봉지'뿐이다. (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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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의 위상 / 문학사회학 김현 문학전집 1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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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목차>

1부 한국 문학사 시대 구분론

2부 한국문학의 위상

  1. 왜 문학은 되풀이 문제되는가
  2.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3. 문학은 무엇에 대하여 고통하는가
  4. 무엇이 지금 문제되고 있는가
  5. 문학 텍스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6. 한국 문학은 어떻게 전개되어왔는가

    1) 제1기의 문학

    2) 제2기의 문학

    3) 제3기의 문학

    4) 제4기의 문학

  7. 문학에 대한 논의는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8. 우리는 왜 여기서 문학을 하는가

3부 문학사회학

1장 1920-3-년대의 문학사회학

  1. 1920-30년대의 문학사회학
  2. 1970년대의 문학사회학

2장 서양에서의 문학사회학

  1. 스탈 부인과 텐느
  2. 2플레하노프, 루카치 그리고 바흐친
  3. 골드만과 프랑크푸르트학파
  4. 아우에르바하, 에스카르피, 그리고 콘스탄츠학파

 3장 문학사회학의 구조

  1. 문학사회학의 조건
  2. 문학사회학의 구조
  3. 분석의 한 예(1)
  4. 분석의 한 예(2)

    문학사회학 : 결론을 대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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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것은 희망의 추측 뿐이다." 26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 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유용한 것이 결핍되었을 때의 그 답답함을 생각하기 바란다. 억압된 욕망은 그것이 강력하게 억압되면 억압될수록 더욱 강하게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 그 부정적 힘을 인지한다. 그 부정적 힘의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 ..

문학은 억압하지 않으므로, 그 원초적 느낌의 단계는 감각적 쾌락을 도반한다. 그 쾌락은 반성을 통해 인간의 총체적 파악에 이른다....

그처럼 문학은 억압 없는 쾌락을 우리에게 느끼게 해준다. 그러면서 그것은 그것을 읽는 자에게 반성을 강요하여, 인간을 억압하는 것과 싸울 것을 요구한다. 인간은 이런 수모와 아픔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니 그것을 안 당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느끼게 한다. 인간은 이래야 행복하다, 그러니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50-51

 

"이 시대가 고통스럽고 간난한 시대이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행복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시대에 행복을 생각한다는 것은 고통스럽다.

인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슐라르라는 프랑스 철학자의 표현을 빌면 행복스럽게 숨쉴 수 있도록 태어났다. 그러니 숨을 잘 쉬는 것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는가." 58

"확실히 소비 사회에 있어서, 문학 작품은 물건화 되어 있다. 문학 작품도 또한 가짜 욕망을 만들어낸다. 가짜 자유나 가짜 예의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

가짜 욕망은 문학 작품을 텔레비전의 광고처럼 단순화시킨다. 혹은 단순화된 문학 작품이 그런 가짜 욕망을 만든다. 그러나 진정한 문학 작품은 그런 가짜 작품이 아니라, 물건화되고 상품화되는 작품의 외적 조건을 뛰어 넘는 작품이다." 63

"잘 팔리는 대중물이란 그러므로 미리 주어진 해답을 갖고 있으면서도 문제를 제시하는 척하는 나쁜 놀이이다. 그러면 당신은 재미없는 글을 쓰라고 권하는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문제의 초점을 재미에 두는 태도 자체가 갖는 의미이다. 문제의 초점을 재미에 두는 한, 공식 문화. 대중화 현상 등의 현대 소비 사회의 중요한 문제들과 맞부딪칠 가능성이 전연 없다.

....

나는 알고 있다. 대중을 계발하여 문학에 취미를 붙이게끔 재미있는 작품을 쓰겠다는 작가들의 대부분이 현대 소비 사회의 가짜 욕망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을. 재미있게 쓰느냐,

재미없게 쓰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가짜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64

"어떤 진실이든 그것은 자기가 본 진실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진실은 주체자의 의식이 진실이라고 파악한 진실만이 진실이다. 어떤 주체자의 진실과 어떤 또 다른 주체자의 진실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있을 수 없는가? 진실은 고립된 것인가? 진실은 그래서 그것이 고립되지 않으려면 반성을 필요로 한다. 다시 한번, 그것이 고립된 것인가 아닌가 하는 번성을 통해서 진실은, 그 고립성에서 벗어나 타인의 진실과 부딪친다." 66

"작가는 작품을 통해 바로 그것을, 한 그룹과 다른 그룹 사이에 소통의 방법이 있음ㅇ르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 자기 자신이 그 소통의 징표가 됨으로써이다. 예술이 고통스러운 것은 그것 때문이다. 예술은 그 자신의 자율성을 획득해야 하며 동시에 사회적 사실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자율성에만 갇혀 있거나, 사회적 사실만이 되려고 노력하는 예쑬 작품이란, 예술 작품이 자신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사회적 사실이 되어야 한다는 그 예술의 애매모호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해체시켜 쉽게 해답을 찾아낸, 다시 말해 고통하지 않는 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고통하지 않는 작품이란, 감히 말하거니와 성실하지 못하다." 74

"문학만이 억압하지 않으면서 억압을 생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75

" 작품은 심하게 말하자면 작가의 이성과 무의식의 싸움의 장소이다. 앙드레 지드는 작가의 의도와 그 의도를 벗어난 것을 각각 작가의 몫, 신의 몫이라고 불렀다. 작품 속에는 작가의 몫과 신의 몫이 항상 공존하고 있는데, 어느 편이냐 하면 신의 몫이 많을수록 작품은 생기를 띤다는 것이다." 89

"그렇다면 누가 의미를 부여하는가? 작가 외에 작품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자는 화자이다. 플로베르에 의해 개진된 그 생각은 비개성적이고 전능한 하나의 의식을 설정하고 있다. 그 의식은 전체를 꿰뚫고 지배한다. 그러나 헨리 제임스나 사르트르 같은 작가들은, 전능한 화자의 시선을 벗어나는, 소설의 예를 들자면, 주인공의 자유를 주장한다. 텍스트 속에서도 한 개인은 타인에게 보이지 않는 그 나름의 개인성을 갖고 있다. 그는 그의 자유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문학 텍스트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오히려 각각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

데리다에 의하면 글쓰기의 주체란 텍스트를 이루는 여러 묘상들의 관계 체계이다. 1071년의 한 인터뷰에서 "글쓰기의 주체란 만일 그것으로 작가의 어떤 지고한 고독을 지칭한다면 존재하지 않는다. 글쓰기의 주체란, 마술적인 것, 정신적인 것, 사회.세계의 여러 묘상의 관계 체계이다."라는 명제를 둘러싸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텍스트의 주체 문제는 텍스트 안에서 찾아야 하며, 밖에서 찾을 때, 주체는 없다라는 것이다. 91

"위로받을 수 있는 고통은 절망적인 고통이 아니지 않은가." 96

 

<한국 문학은 어떻게 전개되어왔는가>

"내가 취하고자 하는 관점은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형성된 현대적 문학적 관점이며, 그 서술 방법은 역사적 서술 방법이다. 역사적 서술 방법에서 당연히 문제될 것은 시대 구분 문제이다. 역사학계에서 시대 구분 문제가 제기된 이후, 70년대초에 문학계에서도 시대 구분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었다. ....대체적인 경향은 왕조별로 나누는 재래식의 방법에 약간의 손질을 가하는 것이었다. ....

제1기 : 삼국 통일 이전 (676년 이전)

제2기 : 삼국 통일 이후부터 무신란까지 (676년부터 12세기까지)

제3기 : 무신란에서 이조 영.정조까지 (13세기부터 18세기까지)

제4기 : 영.정조에서 현대까지 106-107

 

 "제 3기의 문학

한국 역사에 있어서, 불교가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대두하게 되는 과정은 왕권 신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 사상적 기저에 신분적 불평등이 선험적인 것이라는, 지배층이 피지배자들을 자기가 지배하는 사회 속에 통합시키기에 썩 편리한 논리를 갖고 있는 불교는, 왕의 존재를 신격화하고, 그것을 절대화하여, 왕권의 신장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 불교적 이데올로기에서 자신의 신분적 불평등을 교정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찾을 수 없었던 지식인들은 대부분 유교적 이데올로기에 매달렸다." 125

 

 <문학 사회학: 서장을 대신하여>

 작가의 경제적 독립은 근대 사회의 기술적 발달과 밀접한 관계 197

문학과 사회의 관계 규명 : 문학을 위한 문학과 인간 사회를 위한 문학 198

"한국에서 순수 문학 참여 문학은 가짜 대립이다. 문학은 극서이 제작되어 판매된다는 점에서 사회적 현상이며, 형태를 가져야 한다는 점에서 표현 기구이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에서부터 문학의 그 이중적 성격은 분리할 수 없는, 이중적이며 단일한 성격이다. 그 이중적이며 단일한 성격을 파괴하지 않으려면 두 개의 차원으로 문제를 나눠야 한다.

위 두 명제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문학과 사회에 대한 개념 정의를 해야한다..199

문학이 비현실적 기능을 한다면, 사회는 인간이 질서있게 살 수 있도록 제도화시키는 것이라는 점에서 현실적 기능을 한다.

"문학적으로 사회를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이 질서 있게 살아가기 위해 제도화시킨것을, 쾌락 워칙에 의거해서 인간이 갖고 있는 꿈에 비추어서

재반성하는 것을 뜻한다. ..이 사회에서는 어떠한 꿈이 어떠한 형태로 제도화되어 있는가, 제도화는 어떤 모순을 드러냈는가, 그 모순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를

문학은 꿈. 행복에 비추어 드러내는데, 문학의 특수한 점은 그 드러냄이 결핍에 의지해 있다는 점이다. 199

"문학은 꿈에 비추어 어떤 것이 어떻게 결핍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드러낸다. 문학의 자율성이 획득한 최대의 성과는 현실의 부정적 드러냄이다. 그 부정적 드러냄을

통해서 사회는 어떤 것이 그 사회에 결핍되어 있으며, 어떤 것이 그 사회의 꿈인가를 역으로 인식한다. 200

 "꿈을 결핍의 형태로 드러내는 일은 복잡한 층위를 갖고 있다. 그것은 문학 형태상으로는 쟝르. 문체. 비유 등의 여러 층위의 약호의 제약을 받는다. 즉 언어의 제약을 받는다.

자기 시대와 환경을 완전히 벗어났다고 믿는 순간에도, 그의 노력은 그의 시대나 환경 속에 갇혀 있다. 따라서 꿈은 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어떤 꿈은 제도가 갖고 있는

모순, 갈등의 오랜 축적의 결과이다. 문학의 형태(쟝르. 문체. 비유)는 문학적 꿈이 문학으로  표시되기 위한 최소한도의 규제이다.

문학사회학적 접근의 지평을 연 것은 김기진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의 전국면을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관찰. 인식하는 것이었다. 203

현실의 여러 국면의 부분적 인식과 그것과 현실의 전국면의 관계의 인식은, 사회 현상의 전체적. 역사적 발전의 방향과 발전을 간으케하는 원동력을 파악해야

가능한 인식이다...그러나 김기진의 경향 문학론과 비평론이 깊이 있게 개진되지 못함. 205

박영희(1901-?)는 마르크스주의적 문학사회학적 접근을 반대한느 입장에서 임화(1908-53)는 사회사를 문학사 속에 끌어들이는 입장에서, 이헌구는 사회학적인

문학 연구 계보를 따져보는 소개. 비판자의 입장에서 문학사회학 접근.

박영희는 김기진과 함께 카프에 참가하다가, 카프 활동이 경직되자, 탈퇴하여 마르크시즘 문학 이론에 맞설 문학 이론을 수립하려고 애쓴다.

그 노력의 시발이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다."라는 구절을 포함한  논문과 책 <문학의 이론과 실제>이다.

그는 문학사는 사회사와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는 경제 생활은 토대를 이루고 그 토대 위에 정신 생활이 세워져 있다. 문학은 그런 의미에서 경제 생활의 반영이다.

박영희의 주장은 바로 그 두 사항이 반영의 관계가 아니라 다른 차원, 서로 관계는 있으나 종속의 관계는 아닌 차원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207

 

 "루카치의 전체성. 총체성 개념은 소설론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루카치는 현대를 헤겔과 함께 산문적인 세계 상황으로 규정하고 호머의 서사시에 나타나는 시적 세계 상황과 그것을 대비시키고 있다. 시적 세계 상황의 특징은 자연과 정신, 도덕과 법률, 개인과 공동체, 다시 말해 내면 세계와 외면 세계가 아직 분열되지 않은 형이상학적인 원의 세계이며, 인간의 의식은 자체 반성의 필요 없이 수동적으로 외부 세계에 순응하면 되는 것이며, 개인은 세계와 자신 속에 이미 주어져 있는 생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찾아다닐 필요가 없는 세계이다. 루카치는 바로 그 세계를 총체성. 전체성이 지배하고 있던 세계라고 말한다. 그것을 뒤집으면 루카치에게 있어 전체성이란, 외부와 내부가 분열되지 않은 형이상학적 원을 뜨한다. 호머의 서사시 이후에 전개된 세계는 그런 호머적인, 희랍적인 총체성이 상실된 세계이다. 그런 전체성이 상실된 세계에서 방황할 수 밖에 없는 의식인의 넋을 지배하는 것은, 호머적인 전체적 세계 상황에 대한 향수. 동경이며, 그것을 되찾으려는 노력이다. 소설은, 바로 그 향수. 동경. 노력의 표현이다. 소설은 더 정확히, 형이상학적 실향의 시대, 형이상학적 지붕이 없는 시대에, 전체적인 세계와 삶의 의미를 되찾으려는 문제적 개인의 이야기이다. 그 문제적 개인은 비록 시민 사회의 관습과 가치에 의미를 찾지 못하고 외롭게 방황하고 있으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뚜렷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전체성을 향한 동경과 추구이며,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심리적 지향성이다. 그 심리적 지향성이 형식화되기 위해서는 구체적이며 객관적 의식이 필요시되는데, 그것이 바로 윤리성이다. 서사시에서 윤리성은 세계내에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에, 서사시의 형태는 그 자체가 쉬고 있는 성격을 갖고 있다면, 소설에서 윤리성은 전체성을 찾으려는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소설 형식은 발전되어가는 성격을 갖고 있다. 그 윤리성을 교정. 극복하여 그것이 올바른 것이 되게 하는 통합적 요소가, 자기 작품에 대해 작가가 갖는 거리, 아이러니이다. 아이러니에 의해 가능해지는 전체성의 형상화로서의 소설 세계에 나타나는 전체성의 세계는 물론 호머의 서사시에 나타나는 총체성의 세계는 아니지만, 현대의 역사 상황의 한계 속에서 현대인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구조이며, 서사시적인 전체성에 가장 접근한 하나의 전체성이다. 그 의미있는 구조는 의미없는 삶에 대해,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식의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성숙한 남서이 세계이다.

루카치에 따르면, 서사시는 전체성의 유년, 의식과 죽음의 문학인 비극은 청년, 소설은 장년기 문학이다. 그의 의식에서 서사시-비극-철학 소설은 발전적 형태의 표현들이다. ...

초기 루카치는 신없는 사회에서 삶에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현대인의 고뇌에 바탕을 둔 사회학이다. 현실 밖으로 탈출하지 않고 의식으ㅗㄹ 자신의 위치를 보려한 비극적 세계관의 표본이며, ....그러나 실존주의로의 길을 포기하고 확실한 전망으로 사회주의를 택해 그것을 다시 비판하게 되는 것이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 원칙 수락은 그렇다....그때 그의 미학은 윤리학의 시녀가 된다.

 "루카치 소설 이론의 첫번째 유형은 이상소설. 세르반테스 동키호테 : 주인공이 역사적 상황,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의식 못하고 과격한 이상주의와 신이 없는 세계에서 자기가 신의 역할을 하려는 마성적 내면성 때문에 외부 세계를 잘못 판단해 함부로 행동하는 소설.(적과 흑)

두번째 유형은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으로 대표되는 낭만소설 : 완전히 산문화된 세계에서는 이상을 실현할 수 없다고 처음부터 인식, 주인공이 외부 세계와 담을 쌓고 내면으로 후퇴하고 그 속에서 이상을 실현하려는 유형.

세번째 유형은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같은 교양소설 : 주인공이 세계 상황, 즉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의 단절을 인식하고 그 속에서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유형. 괴테식의 교양소설의 특색은 그 주인공이 소설의 구성원들과 함께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인격을 도야함으로써 휴머니즘에 도달하려는 이상을 갖고 긴 교양의 길을 가는데 있다. 여기서 형성되는 내면성은 현재 상황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정신 세계, 예술 형식, 살므이 형식이다. 루카치가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 베케트를 비판하는데 이같은 미학이 크게 작용했다.

 

 바흐친. 사회학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는 말에 있어서의 억양, 문체의 톤을 중요시한다. 그것은 고립된 말이 아니라, 사회적 문맥 속에 있는 말에 그가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바로 여기에서, 그의 이론의 중심을 이루는 대화주의가 생겨난다. 그의 대화주의는, 언표와 언표 사이의 관계를 말하는 개념이다. 다른 언표와의 관계를 맺지 않는 언표란 없다. 바로 그 대화주의를, 크리스테바는, 텍스트 상호 관련성, 혹은 간단히 간텍스트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intertextualite'라는 말로 옮기고 있는데, 그것은 문학 연구에서 대단한 효과를 내는 개념이다. 언표가 항상 다른 언표와 관련을 맺고 있듯이, 텍스트 역시 다른 텍스트와 항상 관련을 맺고 있다. 그 관련은, 한 작품내의 여러 문장들의 관계, 한 작가의 전작품내에서의 서로의 관계ㅡ, 여러 작가의 여러 시대의 작품 사이의 관계 등등을 총괄한다. 그 고나련이 바로 작가-작품=독자의 상호 관련성의 근거를 이룬다. 그것은 작품이 여러 개의 목소리를 가질 수 있음을 뜻하며, 그 여러 개의 목소리가 다양하게 울리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다. ...사실상 바흐친의 대화주의는 독자의 작품 참여도를 최대한도로 늘린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의 사회 시학은 콘스탄츠학파의 수용 미학에 가깝다.

 

<골드만과 프랑크푸르트학파 : 새로운 문학사회학을 향하여>

 

예술의 자율성의 인정이라는 측면에서는 골드만과 의견을 같이하면서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예술 이론가들, 로웬달, 벤야민, 마르쿠제, 아도르노 등은 예술 작품이 사회 현실에서 맡고 있는 부정적 위치에 더욱 주목하여, 루카치와는 정반대로, 보들레르, 로브 그리예, 베케트, 카프카 등의 예술적 가치, 그 부정성을 옹호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그들이 브레히트의 의도적 전위주의에서도 벗어나, 전위주의의 과격성을 예술적 부정성으로 극복한 것을 보여준다.

 <숨은신>

<소설사회학을 위하여>

골드만이 인문.사회과학 연구 방법론으로 제시하는 것은 과학적. 실증적 방법이다. 그렇다면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방법. 즉 변증법적 방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 인간과 관계된 사실은 언제나 실제적. 이론적. 감성적 성격을 동시에 띠는 전체적 의미 구조를 구성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 구조는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다. 구조가 설명되고 이해된다함은 변증법적으로 하나의 중간항 역할을 맡는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의 의미 구조는 그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은 그것보다 큰 주고 속에 삽입되어 설명될 수 있다. 그 구조가 중간항일 수 있다는 것은 그러한 의미에서이다. 의미 구조가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은 계속해서 더 큰 구조를 상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변증법적이다. 왜냐하면 변증법적 사고는 부분/전체의 보완적 관계에 의해 사고하는 사고이기 때문이다.

부분적인 진실, 의미 구조의 해명은 이해 과정이며, 더 큰 구조, 전체 속에 그것을 삽입하는 설명 과정이다...작은 의미 구조는 큰 의미 구조 속에 삽입되어야 설명될 수 있다. 큰 의미 구조는 감싸는 구조, 감싸는 것이다. 이 인식의 조작적 기능은 골드만 사고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해. 설명. 감싸기 등을 문학 작품에 적용하게 되면, 작품-전작품-인간-사회 집단의 방향으로 감싸기 진행되면서 그 부분적 진리 인식이 진전되어 큰 의미 구조에 이르게 된다.

..그 감싸기의 결과로서 골드만은 문화 창조 주체는 개인이 아닌 사회 계급이라는 충격적 결론에 이른다.

...인간 관계의 복잡하고 다양한 총체가 개인의 일상적 삶과 그의 개념적 사고나 창조적 상상력 사이의 단절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것은 가능하다...

변증법적 감싸기, 편입에서 골드만이 발견해낸 것은 사회 그룹이다. 그런데 이 사회 그룹이 모든 사회 계급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계급은 바뀌고, 이데올로기의 국면에서 현재 인간 총체, 그 질, 결점, 이상 등에 대한 시점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 시점은 한 계급의 가능한 의식의 최대치이다. 한 그룹의 성원을 모아주며 다른 그룹에 대립되게 하는 한 그룹의 열망, 감정, 사고의 총체를 골드만은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소설사회학의 이론적 발단으로 골드만은 근대 소설에 왜 문제 제기적 인물들이나오는가 따진다. 루카치의 도움을 받아, 타락한 사회에서 타락한 방법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다보면 죄인이나 광인과 같은 문제 제기적 인물이 생겨난다는 것. 소설에 있어서는 주인공과 세계 사이에 뛰어넘을 수 없는 단절이 있는 것이다. 267

소설은 단절 문제에 따라 서정시와 서사시로 나뉘는 장르 이론에서 중간에 위치. 그러나 이것으로 인물을 설명하면, 소설 발생을 사회적 경제적 정화속에 끼워넣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루카치는 가설을 제시하는데, 소설 세계의 형태는 시장을 위한 생산으로부터 발생된 개인주의의 사회에서 일상적인 삶이 문학적인 차원으로 뒤바뀌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인간과 재물과의 자연스럽고 건강한 관계는 생산이 미래의 소비에 의해서, 물건의 구체적인 품질에 의해서, 즉 사용가치에 의해서 지배되는 관계이다. 그런데 시장을 위한 생산 특징을 이루는 것은 그와 반대로 교환가치라는 생산형태에 의해서 만들어진 새로운 경제적 현실의 중개로 인간적인 의식의 관계가 배제되거나 혹은 내재화되어버린다.

 의식적이고 표면적인 차원에서 경제적 생활은 교환가치, 다시 말해 타락한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들로 구성되며, 생산의 측면에서는 이러한 사람들 외에 소수의 사람들, 모든 방면에서의 창조자들이 남아 있어 본질적으로 사용가치를 지향하는 바로 그 점 대문에 그들은 사회에서 밀려나 문제적 개인이 되는 것이다. 소설 쟝르의 구조와 교환 구조 사이에 대응. 상동이 있다.

그렇다면, 경제 구조와 문학적 표현 사이의 관계가 집단 의식을 떠나서 이루어지는사회라면 그 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1) 경제적 행위가 이루어지고 교환가치가 존재하면서부터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이느이 사고에는 간접화라는 범주가 발생한다. 간접화된 가치는 점점 절대적 가치가 된다. 돈이나 명예는 절대적 가치가 된다.

2) 그런 사회에는 사고와 행동이 질적인 가치에 의해 지밷받는 문제적 개인들이 생겨나는데 그렇다고 그들이 사회의 전체적 구조에서 일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타락한 간접화 현상의 현실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3) 중요한 작품치고 순전히 개인적인 경험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은 없다. 감정적 욕구가 사회의 모든 계층, 아니면 소설가가 속한 중간 계층에서만이라도 누적되어 있을 경우메나 발견될 수 있다.

4) 시장을 위한 생산 체계의 자유 경쟁 사회에서도 자유로운 개인주의의 가치가 생겨난다.

 

문제제기적 인물의 소설은 부르조아지 역사와 발전에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 문학 형태지만, 부르조아 계층의 실제 의식이나 가능한 의식 표현 형태가 아니다. ..

부르조아 사상의 합리성 때문에 예술의 존재마저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바로 거기서 골드만은 긍정적 인물의 소설이 생겨나지 못한 근거를 보고 있다.

 

 <벤야민>

문학사회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는 내부에서 하나의 소우주 그 이상인 소우주로 형성되는 작품의 운명을 인정하면서, 새로운 역사적 정황의 예술의 테크닉을 혁신시키고 예술 개념 자체를 바꾸게 되는 새로운 역사적 변이를 문학사회학적으로 규명하고,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비평에 반발하여 문학적 정치의 개념을 확립한 이론가이다.

그가 아우라라고 하는 것은 "예술 작품에서 개성을 구성하는 계기로, 예술 작품이 지니고 있는 아주 미묘하고도 개성적이며 고유한 본질같은 것을 의미"(차봉희 <문학과 지성>36호 478-9) 예술 작품이 풍기는 고고한 분위기는 아우라 때문이며 그 개성적이며 근접하기 어려운 분위기 때문에 자율적 존재로서의 예술이 가능해진다. 그 개성적이고 접근하기 어려운 분위기는 예술 작품이 갖고 있는 제의적. 의식적 성격에서 나온다.

 종교, 신적인 것은 예술 작품에 어떤 사적인 힘을 부여하고 작품을 신비스러운 분위기로 감싼다. 그의 아우라는 예술 작품의 제의적 가치를 시간.공간적인 감지의 범주에서 표현하고 있다. 초현실주의는 그 아우라를 제거해버린다. 이것은 예술의 탈의식화에 다름아니다. 초현실주의 작품들은 고전적인 의미의 예술 속에 끼어들 수 없는 선언,ㅡ 말. 자료, 모조품이지만, 거기서 예술 작품에 대한 제의적 거리감을 제거해주고 있다는 새로운 경험이 생겨난다. 그것은 일종의 해방이며, 종교적 트임이 아닌, 세속적 트임, 비종교적 트임이다.

 가장 신비스러운 것을 일상에서 발견하는 초현실주의적 경험은 개방적인 것이다. 작품에서 분위기를 지우는 것은, 작품을 고독한 예술 행위라는 명상적 감상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것이 벤야민의 해방이다. 그 해방은 행복의 경험인데 "범속한 트임의 자세로 아우라적인 껍질을 깨뜨리는, 즉 아우라 상실의 경험은 모든 세상사람들에게 이해되고 통용되는 가장 범속한 의미에서 외면적이고 공적인 것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벤야민의 행복은 가장 감각적이며 물질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세속적 경험에 자리잡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아우라의 상실-해방의 논리는 기술 복제 가능성이 압도적인 새로운 예술의 기능 변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술 작품의 기술 복제 가능성이 의식에 대한 기생적인 존재라는 예술작품의 역할을 세계사내에서 처음으로 실현시켰다...그 순간 예술의 전반적인 사회적 기능 자체도 전복되었다. 예쑬의 의식에 기초를 두지 않고 다른 유의 어떤 실천에 기반을 두게 되는 현상이 대두되었다. 이 새로운 기반은 다시 말해 정치다."(차봉희 역 56-57)

 

 <마르쿠제: 쾌락원칙의 우위>

 마르쿠제에 의하면 예술은 전산업사회에서는 현실과 다른 차원을 이룩한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욕망을 상상력에 의한 환상 속에서 달성혹은 해소하게 만들어준다. 전산업사회의 예술은 기존 질서의 부정. 부패와 부의 힘인 동시에 불가능한 욕망에 사로잡혀, 만족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형태적인 아름다움을 매개로 생존과 화해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방법이다.

<에로스와 문명>에서 말하듯 예술 속에는 양가 감정 즉 낯선 감정과 안도의 감정이라는 두 가치가 대립하고 있다. 예쑬은 고통이 제거되고 승화된 세계를, 공포가 절제 있게 규제된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거기서 예술의 소외가 생긴다. 예술은 사회를 거부하는데서 생겨났지만 그것은 사회에 매달려 있다. 예술적 소외란 그러므로 "의식적이며 거리감이 있는 형태에 병합된 소외"이다. 결국 전산업 사회의 예술은 부정에서 마술적 힘을 끌어오지만 부정이 극단회되어 사회를 해체하는 것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사회의 긍정에 협력한다. 그런 의미에서 전산업 사회 에술은 낭만적이다.

산업 사회에서 예술은 낭만적 부정과대립의 힘을 잃어버린다. 과거 작품이 대량 보급되어 충격적 낯선 느낌을 잃어버림. 금지가 없을 때, 예술의 형태속에 숨길 필요도 없다.

현대문학이나 예술의 대부정이 모두 사호에 편입되었다면 에술에서 기대할게 무엇인가. 억압 없는 유토피아 사회에서 예술이란 현실과다른 차원에 있지 않으면서, 모든 모순을 화해시킬 수 있으리라는 벤야민적 신념을 피력한다. 283

 그는 <에로스와 문명>에서 억압 없는 문명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믿고 있다. 그의 신유토피아론은 쾌락 원칙의 현실 원칙에 대한 우위에 근거해 있다. 쾌락 원칙은 억압 없이 욕망을 자유스럽게 달성하려는 원칙이며, 현실 원칙은 인간의 본능을 억압하며 질서와 진보를 이룩하려는 원칙이다.

 

 <아도르노: 고통의 언어>

<미학이론>에서 그는 예술 작품이란 경험적 세계의 반영이라는 고전적 명제에서 출발해 현대 예술론의 중요한 부분인 앙가쥬망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허구성을 밝히는 어려운 작업을 해내고 있다. 아도르노는 마르쿠제가 일차원적 사고라고 부르는 긍정 정신을 산업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라고 부르고 현대 예술이란 그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감추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란 언사는 일상 생활에서 개인을 억압하여 이차원적 사고를 불가능케 하는 모든 것을 지칭한다. 그것은 가짜 욕망과 기구를 만들어내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억압적인 공식적 문화를 만들어낸다. 현대 예술이 표현하고 있는 고통은 그 공식 문화 속에 편입되지 않으려는 모든 노력의 결과이다. 그 노력은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내는 공식 문화의 허위성을 밝히고, 그것이 거짓으로 세계와 인간을 화해시킨다는 것을 드러낸다. 예술은 그 거짓 화해를 드러내는 고통의 언어이다.

앙가쥬망론과 경향문학론의 최대 약점은 예술의 내용과 형식을 구별하고, 혁명적 작가는 내용을 쉽게 써야 한다는데 있다. 예술의 형식은 침전된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 쓉게 써야 한다, 혹은 리얼하게 써야 한다는 것은 현대 예술이 그토록 벗어나려고 애쓴 가짜 화해를 20세기의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요구하는 상품화를 통해 이룩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285

아도르노의 태도는 벤야민과 흡사하다. "한 작품의 경향성이란 그것이 문학적으로 옳을 때에야 정치적으로 옳다"(벤야만 <브레히트론>)

"작품이란 그 모습과 형식 구조에 의해 비화해가 살아 남아 있는 세계의 고통을 증언하는 법이므로, 그것의 약속은 직접적일 수가 없고, 가능한 행동의 약속일 따름이다."그렇게 본다면 양가주망이나 경향성을 주장하는 것은 이미 정치적으로 참여된 작품이란 체제 속에 흡수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비전술적 방법이다. 즉 뇌관을 제거당한 폭탄인 셈. 286

 아도르노 이론의 충격은 인간을 사물화시키고 소외시키는 지배적 이데올로기 비판을 결국 그것에 흡수될 이데올로기적 방법으로 행하지 말고,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형태로서 행해야 한다는데 있다. 새로운 형태는 그것 자체가 비판 인 것이다. 그의 전위 예술,베케트 옹호는 거기서..

쇤베르크 표현을 빌면 "사람은 화폭을 그리는 것이지, 그 화폭이 재현하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화폭은 소외, 사물화 바로 그 자체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나치 문화와 같은 억압 문화 속의 인간의 불행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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