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과 인간 / 시인을 찾아서 김현 문학전집 3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12월
평점 :
품절


 목차

 

[상상력과 인간/시인을 찾아서]에 대하여

 

상상력과 인간

자서

1부 관념과 방법

     한 외국 문학도의 고백

   글은 왜 쓰는가

  감상과 극기

 시와 암시

 꽃의 이미지 분석

 상상력의 두 경향

 산문시 소고

 여성주의의 승리

 시와 톨스토이주의

 한국시의 이해

 

2부 시와 삶의 양식

광태 연구

  1. 문화 접변시의 문학인
  2. 미조네이슴과 여성 편향

김춘수와 시적 변용

  1. 존재의 탐구로서의 언어
  2. 식물적 상상력의 개발
  3. 처용의 시적 변용

현대시의 존재의 깊이 : 김구용

한국 현대시에 대한 세 가지 질문 : [평균율]동인

시인의 상상적 세계 : 고은

바람의 현상학 : 정현종

 

3부 정황과 응전

1969년의 문학적 상황1

1969년의 문학적 상황2

1970년의 문학적 상황

1971년의 문학적 상황

이해와 공감

  1. 산문과 시
  2. 한국시의 가능성
  3. 시와 탐구의 태도
  4. 젊은 시인들의 정신적 방황
  5. 현실 파악과 비관주으
  6. 시와 정직함
  7. [바다의 무덤]에 대하여
  8. 시와 상투형
  9. 소리와 죽음
  10. 오규원의 변모
  11. 신춘시와 자기 세계

 

4부 시인을 찾아서

책머리에

마주치지 않고는 시를 읽을 수 없다

김춘수를 찾아서

김수영을 찾아서

김종삼을 찾아서

전봉건을 찾아서

박성룡을 찾아서

박재삼을 찾아서

고은을 찾아서

황동규를 찾아서

정현종을 찾아서

원문 출처


글을 쓴다는 개성적인 행위는 글을 쓰는 자의 자리에 대한 탐구가 없는 한, 도로(徒勞)에 그쳐버릴 우려가 많다. 자기 문화의 특수성을 깨닫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자기 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문화의 고고학은, 그러므로, 자기가 서 있는 상황을 투철히 인식하고, 그것을 고려하여 극복해나가려는 태도를 말함이다. 그것은 수동적인 현실 파악이 아니라, 글은 왜 쓰는가 하는 근본적인 명제로 자기를 이끌고 가는 각성의 필요성이다. 글은 왜 쓰는가? 한국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화의 고고학에 집착할 수 밖에 없다. 28

 

* 시가 긴장의 소산이 아닐 때 그것은 상투어의 나열이 되어버린다. 그 상투어들은 정신이 긴장하여 사물을 단단한 질서의 틀 안으로 끌어들이지 못하고, 관습의 틀 속에서 응고해버릴 때에 얻어진다.  

* 자아가 실존하지 않을 때, 그리고 대상의 벌거벗음을 인식하고 놀라지 않는 한, 대상은 바라봄의 단순한 도구이며 대상과 자아 사이에는 아무러한 단절도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시는, 진정한 시는, 바타이유가 말하는 내적 경험으로서의 시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적 오브제에 대한 놀람이 없는 한, 그것은 리트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분명히 시가 아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시는 존재의 괴로움, 단절에서 오는 아픈 신음 소리이다. 그것을 뛰어 넘을 수는 없을 것인가. 이러한 문제는 낭만주의 이후 서구 시의 하나의 전통을 이루고 있는 듯이 보인다. 물론 그들은 거의 전부 실패하고 있다. 그러나, 사르트르도 말하고 있듯이 시란 실패하므로 존재하는 것이다. 실패 속에서 새로운 도전의 양식은 발견되고 시도된다. 그래서 시도 또한 새로운 형식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꽃이라는 이 아주 정적인 이미지에서 단절을 이끌어내온 몇몇 시인들의 언어에 우리는 경의를 표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분열을, 단절을 알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몇몇 시인들의 언어는 새로운 시의 지평을 열어주고 있는 셈이다. 79-80

* 상상력은 동적 이미지를 산출하는 능력과 형태적 이미지를 산출하는 능력의 둘로 나누어질 수 있다. 물론 이 말은 상상력이 개념화와는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개념화는 정확한 가치는 그 내역에 갖고 있지만 상상력은 "추상적 가치를 살(生)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형태적이건 동적이건 그것은 추상적 가치만을 얻을 따름이다...예술에 있어서는, 그러므로, 항상 추상적 가치가 선행하는 상상력이 작용한다. 시의 해석이 다양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82-83

동적 이미지와 형태적 이미지는 상상력이 나타나는 두 패턴이다. 두 패턴으로 상상력이 작용하는 것은 과거의 흔적에 의한 것인 듯하다. 상상력이 동적 이미지를 통해 나타나는 경우와 형태적 이미지를 통해 나타나는 경우는 다른 과거의 집적을 필요로 한다. 형태적 이미지를 통해 상상력이 작용하는 경우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생활에 필요한 이상의 물건들을 소유해본 사람이나 생활에 필요한 만큼의 물건을 소유해보지 못한 경우에 특히 그렇다. 새오할에 필요한 물건으로 채워진 생을 살아간 경우네는 그것들은 오랜 세월 사용한 사람의 의식에 녹아 혈육의 일부를 구성한다. 그러나, 그 이상이나 이하를 산 사람들에게는 물건이란 감정을 자극하는 애완물이 아니면 신경을 건드리는 자극적인 필수물이다. 그러한 물건들의 모습은 그런 사람들의 정신 깊숙이 인각되어, 하나의 콤플렉스를 형성한다. 그런 사람들에겐 과거란 세간이 많은 집과 같은 것이다. 그 집 속에 그들은 과거의 흔적들을 배열해놓고 그 흔적의 형태를 모든 것의 원형으로 생각한다. 지금의 모든 것은 과거의 그 흔적으로 귀환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람들에게는, 지금이란 과거의 한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화된 과거이다.....그 과거의 깊숙한 곳에는 흔적의 원형 같은 것이 숨겨져 있다. 그 원형은 과거를 배열한 집이며 경험의 한 극점이다. 모든 경험이 그 원형으로 귀환하여 과거를 형태를 이룬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것을 형태적 이미지라고 부를 수 있다.

반대로 우리가 동적 이미지를 산출하는 상상력이라고 부르는 경우에 있어서는 경험의 극점이 형태를 얻고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정신의 안벽을 격렬하게 스쳐지나간 '어떤' 힘에 의해 자극될 뿐이다. 이렇게 상상력이 작용하는 경우란 대부분 생활에 필요한 만큼의 물건을 소유하고 있고 필요한 만큼의 정신적 만족을 취할 수 있었던 사람에게 나타난다고 생각된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어느 정도의 만족을 얻을 수 있을 때는 물건이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것에 속한다. 그때에는 다만 정신의 안벽을 스쳐가는 감정의 질감만이 문제된다. ...동적으로 이미지를 구축하는 상상력을 소유한 사람들은 그러한 전이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계속 살아옴으로써 생활에 콤플렉스를 느끼는 것보다는 오히려 형이상학적이고 질적인 것, 정신을 구속하는어떤 힘에 콤플렉스를 느낀다. 그들에게 있어서 과거란 현재화된 그것이며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의 위치이다.

* 형태적 상상력이 가장 강하게 작용하는 경우를 최하림, 김화영, 이승훈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상상력이 동적으로 작용하는 경우를 우리는 이성부. 강호무. 정현종 등에게서 알아볼 수 있다. 83-88

 

 *위대한 정신들은 한 사회의 정신적 분위기를 폭넓고 첨예하게 제시함녀서 동시에 자기 자신이 그 문화의 모순으로 자기 자신을 규정함으로써 그 문화의 완전한 원에 흠을 가게 만드는 것이다....자신이 높은 완성자이면서 날카로운 모순이 되는 정신이나 그 역의 정신은 반드시 광태를 포용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광태는 생태적인 것이 아니라, 완성이며 동시에 모순인 이항 대립을 몸으로 체현하는 정신을 표현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광태야말로 폐쇄된 사회에서 뚫을 수 있는 유일한 정신의 양태라는 미셸 푸코의 말에 동의한다. 문화사적인 의미의 광태가 아닌 광태는 허무와 절망의 제스처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하듯이 제스처는 그것 자체로 폐쇄되어버리고 타인에게로 전이되지 않는다. 150

왜 문화 접변시에는 죽림 칠현의 허무주의, 해좌 칠현의 달관, 체혐, 구인회의 회고조의 체념이 청담이라는 관념과 술이라는 풍속을 얻어 나타나는 것일까? 그 원인은 무엇이며 그 의미는 무엇일까? 아주 거칠게 표현한다면, 한 문화의 강대한 힘이 그 문화에 어울리지 않는 사회를 압도할 때 그 문화에 물이 든 사람들의 의식을 사로잡는 것은 대부분이 회의와 체념이다.152

* 사대부적 교양인의 세계에 속해 있던 구인회는 근대주의와 그것에 의해 배태된 문학관을 수입하여 받아들인다. 그러나, 근대 문학이 가지고 있는 날카로운 현실 인식과 비판력은 일제의 강력한 문화 정책에 의해 의도적으로 배제되며, 그래서 근대 문학은 깔끔한 문장주의(이태준)으로 환원해버린다. 자기가 속한 계급의 모순과 갈등을 표현해야 할 근대 문학이 구인회에 오면, 지나간 시대를 회고조로 그리는 문장으로 변모해버리는 것이다. 후기 구인회에 이상과 같은 과격주의자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구인회는 새로운 시대의 이념을 일제의 악랄한 문화 정책에 의해 왜곡해서 우요하여 허무 의식을 노출한 그런 집단이다. 그때 남는 것은 문사로서의 깔끔한뿐이다.

* 한문을 현실에 맞게 재조립하였을 때 생겨나는 것은 자기가 속한 사회의 의미에 대한 철학이며 체념하지 않는 높은 정신이다. ([찬기파랑가]). 그러나 한문 습득을 교양인의 필수 조건으로 이해하게 되면 민중과 치자 사이의 간극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사대부 이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상당수가 내부적으로 신분적 불평들을 수락하고 있는 것은 그것 때문이며 바로 그 점에서 보들레르의 저주받은 시인과 그들의 분기점이 생겨난다. 보들레르의 저주받은 시인은 사회내에서 소외된 자들을 의미하지만 임춘의 곤액당하는 시인은 민중과 분리된 시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보들레르처럼 심각하게 절망하지 않고, 체념의 제스처를 취하지만 그 속에도 자신의 교양인임에 대한 의식은 깊이 인각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민중과 권력에게서 분리되어 있찌만 이념과 친구들에게서까지 소외된 것은 아니다. 그의 가난은 그의 죄가 아니라, 그를 이해해주지 못한 자들의 죄이다. 157

*  어떤 사람들은 거짓말을 한다. 가능한 사실, 사물의 실재, 발레리의 표현을 빌면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를 포기하고, "인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수락하고, 사랑받기 위해서"(사르트르) 그들은 언어를 사용한다. 삼류 시인들의 전형적 패턴이다. 그러나, 이렇게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침묵하기 위하여 말을 한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말한다. 발레리의 말을 빌면 그들의 언어는 부정으로서의 언어이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 하기 때문이다. 182

* 시는 행위를 언어 속에 이끌어들이고 그 속에서 녹이고 용해시키는 반면에 산문은 행위가 언어를 학대하고 이끌고 다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시와 산문의 구별점이란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217

* 마종기 시에서 가족. 가족은 그것을 산출시킨 사회의 최 단위이다. 거기서 지켜지는 것은 그 사회의 최소한의 터부이다. 그것을 지키고 극복한다는 것은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을 발견하려는 시인의 의지를 나타낸다. 그리고, 그 의지는 가족 개개인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그 의지는 삶의 전제 조건이지, 그것이 곧 삶은 아니다. 마종기의 시적 공간이 내보여주는 서정성은 그 의지의 확인에서 온다. 그러나 그의 시에는 의지의 체현이 없다. 233

*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능한 한 산문적인 요소는 배제되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는 말라르메가 말하듯이 '암시'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 나는 '이다'체로 끝나는 것을 산문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행위가 언어의 밖에 노출되어 있을 때, 그것이 산문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335              

* 많은 시인들이 시는 언어다라는 가장 단순한 명제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나는 알았다. 적어도 시인으로서 한국어의 가능성, 이 사랑스런 모국어의 가능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이 적다는 그 놀라운 사실을 지적할 뿐이다....모국어가 가지는 가장 큰 약점인 사고의 내용을 어색함 없이 밝혀줄 관념어가 드물다는 점과 청각적 이미지를 나타낼 시의 형태와 시어의 부족에서 그것이 야기되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이러한 부족을 시인들은 산문적인 행위로서 억지로 메우려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들은 실패하고 있다...이 빈사의 모국어에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모국어의 가능성을 보여줄 때까지 나는 기다릴 수밖엔 없다. 343-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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