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한국 문학의 이론 / 사회와 윤리 김현 문학전집 2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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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부 현대 한국 문학의이론 -한국 문학에 대한 역사적 성찰

1장 한국 문학의 양식화에 대한 고찰

2장 한국 문학의 가능성

3장 한국 소설의 가능성

4장 한국 비평의 가능성

5장 한국 개화기의 문학인

6장 식민지 시대의 문학

 

2부 사회와 윤리

1장 샤머니즘과 허무주의

  1. 문학이란 무엇인가1
  2. 문학이란 무엇인가2
  3. 비평 방법의 반성
  4. 염상섭과 발자크
  5. 허무주의와 그 극복
  6. 민족문학의 의미
  7. 무협소설은 왜 읽히는가
  8. 테러리즘의 문학
  9. 미지인의 초상1
  10. 미지인의 초상

 

2장 분석과 이해

  1.  위장된 조화와 분열.이효석
  2. 소박한 수락. 황순원
  3. 신념과 체념의 인간상 김성한
  4. 에피메니드의 역설. 장용학
  5. 소시민의 한계. 이범선
  6. 최인훈에 대한 네 개의 산문

    1) 헤겔주의자의 고백

    2)최인훈의 정치학

    3)풍속적 인간

    4) 정신의 치유술

  7. 일탈과 콤플렉스에서의 해방.이제하
  8. 구원의 문학과 개인주의.김승옥

    1)자기 세계의 의미

    2) 존재와 소유

  9.  60년대 작가 소묘

1) 굴욕과 수락:홍성원

2) 장인의 고뇌. 외 : 이청준

3) 방황과 야성 : 박태순

4) 요나 콤플렉스의 한 표현 : 박상륭

5)수동적 세계관의 극복:박원일

6)수동적 세계관의 극복:김원일

7)좌절과 인간적 삶: 송영

10.  초월과 고문.최인호

 

통시적인 문학 연구와 공시적 문학 이해의 모순된 문제를 문학 전체로 파악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 몇 개의 사실형을 추출해내고 사실형의 배후를 흐르는 진실을 파악해야한다.

양식화가 행해진 현실들을 사실형으로 파악하고 그 양식화 내부를 흐르는 질서를 파악하는 것. 13

양식화와 고정화 : 양식화는 유동화고 있고, 질서를 갖고 있지 않고, 혼란되어 있는 것에, 질서를 부여하고 통일시키는 능력이다. 반대로 고정화란 질서화를 반드시 요구하지 않는다. 어떤 것이 고정된다라는 말은 질서 이전에 응고된다는 것. 응고되어 흐르지 않는 물처럼 썩는다. 어떤 것의 고정화는 그러므로 반드시 맹목적인 신앙과 결부되어 그 치부를 노출한다. 양식화는 그러나 질서에 대한 욕구이다. 그것은 질서 이전에 그대로 응고되어버리는 일이 없다.

삶 자체가 일종의 양식화의 총체이듯이, 문학 작품 역시 그런 것의 총체이다.

우리는 우리안에서 어떤 것을 절단하여 그것을 고려하고 비판한다. 이러한 작업은 항상 양식화의 한 변형이다. 양식화는 질서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학 작품이 현실의 질서화나 양식화를 말해주지 않을 때, 그것은 다만 혼돈과 무질서뿐일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든지 작품은 무질서와 혼돈 속에서 질서를 갖고 있는 세계를 재현해내는 작업이다. 무질서하고 탁하고 찐덕거리고 혼란되어 있는 세계를 조정하여 작품은 거기에 질서를 부여한다. 14

어떤 것이 양식화된다면, 반드시 그 양식화에 대한 반발이 그 속에 내재하여 있지 않으면 안된다. 많은 우수한 평론가들의 말대로 양식화란 의미를 이루려는 부분과 의미를 이루지 않으려는 부분의 부단한 대립이다. 양식화하려는 노력 속에는 이 두개의 힘이 항상 서로 반대의 작용을 함으로써 서로의 균형을 유지한다. 의미를 이루려는 부분이 너무 지나칠 때 그것은 고정화되고 썩어버린다. 그리고 의미미를 이루지 않으려는 부분이 지나칠 때, 그것은 넌센스와 무, 다시 혼란으로 되돌아간다. 15

 

 양식화란 결국 의식의 문제다. 의식은 수럴이 밝힌대로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다. 그 어떤 것이 소위 이름의 적음으로 인해서 한정되어 있다면 의식 자체가 한정된 것임에 틀림없다. 그 한정성을 나는 양식화의 경향이라는 말로써 표현하고 싶다. 15

 양식화의 경향을 찾아내는 것은 한국인의 근본적 사상 체계를 찾아내는 것과 근사한 일의 분량을 요구한다. ...어떤 나라의 문학이 아무리 다양하고 복잡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 나라의 소산인 이상 기본적인 양식화의 현상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기본적 양식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아마 같은 지역, 기후, 풍토, 언어, 습관 에서 기인할 것임에 틀림없다. 15

나는 한국인의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양식화의 태도를 박종홍의 다음 부분에서 얻어내려고 한다. "신라 말엽에 국세가 쇠잔하여 군웅이 할거하는 난세가 되자.....높은 수준의 교양을 쌓으며 사상의 학적인 추구를 일삼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고, 그런 까다롭고 힘든 생활 태도보다 불가사의한 힘에 의한 요행을 바라는 풍조가 싹튼 것이다. ...이러한 추에세 발맞추어 미래의 성쇠화복을 상징적으로 예언하는 참설 또는 지세를 상하여 택지나 도읍 내지 묘소를 택함으로써 앞날의 번영을 도모하려는 풍수설 즉 감여술의 성행이요 더 나아가 미륵불의 출현에 대한 현혹이다. ..이런 미래상의 현실적 집약은 오히려 한국 사상을 일관하는 밑받침으로서의 생활 신조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17-18

 

이 미래상의 현실적 집약은 박에 의하면 대강 세 가지의 큰 양태로 구분될 수 있다. 풍수도참 사상과 미륵불 숭앙 사상과 선종 사상이 그것이다.

가장 오랜 것은 풍수도참설인데, 창시자인 도선 이전에 벌써 형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예가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

여러 소론을 종합해보면 한국인의 본래적 사고 양식은 영원한 것에의 동경이 아니고, 현세적인 것을 영원히 지속시키려는,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다시 복을 누리겠다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는 몇 가지 독특한 틀이 생겨난다.

첫째, 개인 의식의 소멸이다. 원시 사상에서도 자기란 타인의 생을 여기서 현재 살고 있는 일종의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깊은데, 이런 생각에서 자아의 표정은 영원히 성립되지 않는다. 자아와 타자의 거리가 없으므로 아예 자아란 성립불가하다. 현세에 혜택을 입는다해도 그것은 전생의 타인이었던 자기를 통해서이다.

둘째로는 사고의 미분화이다. 개인이 없는 곳에서 사고가 분화할 수 없다. 나와 타인이 같다면 사고 분화란 생겨날 수 없다...

셋째, 사고 미분화는 반드시 또 맹목적인 신앙을 부른다. 이 맹목적인 신앙은 미륵 하생 사상과 밀접히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인데, 어떤 메시아적 선언이 들리기만 하면 거기에 현혹되는 경향은 바로 이 맹목적 선언이 들리기만 하면 거기에 현혹되는 경향은 바로 이 맹목적 신앙을 웅변으로 말해준다. 21

 

한국인의 양식화는 세번의 편차를 보여준다. 1) 신라. 고려기의 불교적 양식화 2) 유교적 양식화 3) 최근 1890년대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적 양식화.

1890년대 이후 자유시 이전까지 한국 문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던 향가의 틀이 결정된 것은 바로 이 시대다. 향가의 폭넓은 보급과 우리 문학이 보여줄 수 있었던 아주 높은 상태에의 도달은 신라인의 정신, 현실을 보는 눈이, 우리 민족의 그것에 아주 적합하게 접촉되어 있다는 좋은 증거이다.  ...향가가 동방의 많은 노래 중에서도 무가의 가장 정제된 형태라는 많은 사람들의 소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현세 집약적 사고는 본래적으로 생활적인 것에 속한다. 그것은 문학의 양식화를 근본에 있어 흔들어버린다. 세속적인 것에는 장식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시적인 것에는 장식적인 것이 반드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문학과 사상이 부딪쳐 현세 이익이 승하면 문학은 양식화되지 않는다. 그러면 어디서 문학의 양식화가 불러내졌는가. 그것은 그 샤먼적 요소이다...

향가 성립에서 무축 신앙의 "정서적 긴장을 조성하는 환경" "주문 주술자의 조건, 주술의 전통" 중요한 것은 주문인데 그 주문의 힘은 주로 "음성적 효과, 자연음의 묘사, 목적을 선택하여 부른 말, 선조나 영을 부르는 것"에 의거한다.

이 무축 신앙의 대표적 상징이 처용이다.

 주술로서의 시가가 점차 고도의 형태를 만들어가서 향가라는 높은 시 양식을 만들엇음에 틀림없다. 26

 1880년대는 한국 문학이 가장 비극적인 모습이 점철된 때이다. 기독교는 너무나 당돌히 한국 문화에 접목되었기 때문이다. 파머에 의하면 한국에서 기독교가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독교가 민족주의의 증오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데 있었다. 한국의 경우 민족주의의 증오의 대상은 일본이다. ...일본의 침략이 시작된 이래 유교적 태도가 그 응고된 규범 때문에 그것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힘들게 되자 서구화에 의한 방법으로 그것을 물리쳐보겠다는 생각이 팽배한 셈이다. 45

한국을 모든 면에서 서구화시키지 않으면 일본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비할 수 없다는 것을 기독교는 가르쳤다. 그러기 위해서는 합리주의와 이원론이 뿌리박지 않으면 안된다. 규범보다는 개인의 논리가 더 존중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것을 가르쳐주어야 할 기독교는 사실상 한국적 현세 집약적 사상과 밀접히 관련을 맺고 그 세력을 넓힌다. 한국 기독교의 가장 큰 비극은 기독교가 박봉랑의 말대로 기독교의 논리 속에 한국의 현세 집약적 사상을 지양시키지 못하고, 기독교 자체가 그 속에서 응고해버린데 있다. 45

 과거의 정신태도는 현실에대처할 수 없게 되어버리고 이런 기독교와 발을 맞추어 서구 문학이 수입된다. 소설과 시. 희곡 등의 전연 새로운 쟝르들이 수입된다. 이 새로운 쟝르의 수입은 1896년의 찬송가의 번역에 큰 힘을 얻고 있다..

찬송가에 의해 근대화.서구화 경향, 혹은 애국 애족을 주제로 하는 창가의 급속한 발달을 보앗고, 1919년의 주요한의 '불놀이'발표 이후 서구시와 서구 소설이라는 새로운 쟝르는 완전히 판소리 같은 재래 쟝르를 제압하고 문학사의 전면에 나타난다. 이러한 사정을 비극적으로 잘 보여준 것이 이인직의 혈의 누이다. 46

기독교적인 영향력의 확대, 즉 기독교적 양식화의 경향 확대가 이루어져서 대립의 사고 양식이 형성되고 합리주의와 이원론이 올바로 정착하여 한국적 현세 집약적 사상을 올바르게 지양시킬 수만 있었다면 한국 문학의 가능성은 퍽 커졌을 것이다. 아니면 판소리의 정당한 발전이 이루어져서 그 장르의 분화로서 16세기 이후의 서구 문화의 발전을 계속할 수 있었다면 한국 문학의 앞날은 퍽 밝았을 것이다.

염상섭의 <삼대>의 조상훈은 기독교의 표피적 이식을 전형적으로 육화한 개인이다..48-49

가령 향가라는 형태는 불교적 이념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형태면에서 일구 사음보를 밟음으로써 안정된 정신 세계를, 내용면에서느 개인의 초월을 노래함으로써 불교적 이념을 샤머니즘의 와중에서 구출한다. 불교적 이념이 샤머니즘 대신 신라 지배층을 사로잡게 된 것은 불교의 호국 신앙때문이다. 

 

 <한국 문학의가능성>

오늘날의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이념형은 어떤 것이며, 어떤 것이 고취도고 있는가. 그것은 과연 한국 사회의 정당한 발전과 얼마나 대응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회의 이념형은 그 사회를 지배하고 이끌어나가는 지배 계층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18세기 불란서 부르조아지들의 객관성, 세련된 취미, 명료성 등의 규범을 내세운 것은 그 좋은 증좌이다. ...

한 시대의 문화, 한 사회의 문화를 그 지배 계층의 이념과 결부시켜 이해하려는 태도를 나는 문화의 고고학적 태도라고 불러왔는데, 골드만은 그런 태도를 '발생론적 구조주의적 방법'이라는 현학적 어휘로 명명하고 있다. "발생학적 구조주의의 근본적 성격은 문학 창조의 집합적 성격이 작품 세계의 구조가 어떤 사회 집단의 심리적 구조와 대응한다, 혹은 그것을 인지할 만한 관계를 갖는다라는 사실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향가는 신라의 불교적 이념과 밀접한연관이 있다...불교 이념이 샤머니즘 대신 신라 지배층을 사로잡게 된 것은 불교의 호국 신앙 때무니다..

개화기 이후에는 외국이론이 그대로 이념형으로 채택될 따름 57

 순수 문학과 참여 무학의 대립은 언어의 특성에 대한 깊은 오해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그 두 문학 유파는 서로 극단적으로 배치되는 이념형을 주장한다. 순수 문학은 언어의 세련도=정치 배제의 문학을, 참여 문학은 언어의 활동성=정치 참여의 문학을 주장한다. 언어의 질서에 관심을 갖고 있느냐, 갖고 있지 않느냐, 남북분열, 도시 농촌격차에 관심여하에 따라 순수 문학과 참여 문학으로 결정된다. 61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세워야 할 이념형은 무엇인가. 나로서는 현상황을 주어진 환경으로 수락하는 문화의 고고학적 태도가 가장 바람직하게 생각된다. 새로운 이념형을 무턱대고 세우려 하는 것보다는, 새 이념형의 설정이 새것 콤플렉스의 소산이라는 것, 문화 담당층이 아직 형성되지 않은 탓에 혼란이 계속된다는 것, 그새 계층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사고의 악순환만 계속됨을 투철하게 인식하는 문화의 고고학적 태도가 사태를 호전시킬 것이다. 의식이 혼란을 일으킨 것이 사실이라면, 그 혼란을 다른 방법을 진정시키려 하다가 그것을 더욱 조장시키지 말고, 그 혼란을 의식함으로써 진정시키는 일. 의식인의 윤리라 부를 수 있는 이런 태도는 60년대 문학의 한 기조를 이룬다. 최인훈, 김승옥, 이청준, 박태순, 박상륭, 홍성원, 이성부, 이승훈, 정현종. 63

 상상력은 시대와의 계속적인 긴장 관계를 통해 그 시대에 알맞는 구조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그 구조는 무이다. 그러나 그 무는 현실을 조명하면서 그 무엇이 되어간다.

 

 예술에서 진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로브 그리예가 주장하듯 개인의 상상력의 현실에 대한 반응이다. 그것은 올바르거나 올바르지 않다. 다만 개인적이다. 그것은 물론 환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환상은 공상, 가능성 없는 헛된 꿈이지만, 상상력은 물질, 다시 말하자면 환경이나 현실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몽상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상상력은 그러므로 물질적이다. 그것은 유동하고 있지만 개인의 경험을 통해 점차로 형태를 얻기 시작한다. 그 형태는 그것이 개인의 진실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해석의 다양성을 갖는다. 그 개인의 상상력이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개인적인 편차라든가 차이 같은 것은 그 시대적 분위기에 비하면 큰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이 진술의 어느 한 측면을 이룬다. 87

 

 상상력은 한 시대의 분위기를 자기 나름을 파악하여 그것을 논리화한다. 그러나 그것이 논리화되는 순간 상상력은 다시 새로운 시대의 분위기를 민감하게 파악한다. 상상력은 계속 유동하고 배반한다. '촉발적'이다. 87

 

"도식화하지 말라, 당신의 상상력으로 시대의 핵을 붙잡으라. 내가 할 수 있는 충고는 이것 뿐이다."94

 

<문학의 기원>

:문학의 기원을 논하는 것은 인간이 자기를 표시하게 되는 인간 정신의 형성 과정을 논의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인간이 상징적 기호를 산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는가의 문제는 대부분 희망과 추측의 심리학에 지나지 않는다. 기원에 의한 논의는 가능한 한 없어지는 것이 좋으며, 그것은 문학 자체에 대한 탐구로 바뀌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다. 156

 

문학은 인간 정신이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폭넓은 공간이며, 그래서 거기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 정신의 자유로움이다. 물론 장르에 따라 내용과 형식이 미리 주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위대한 정신은 언제나 그러한 제약을 뛰어넘는다. 자기를 표현할 능력을 가지지 못한 정신은 정신이 아니다.

아름다운 형식은 미리 만들어진 상태로 주어지는 법이 없다. 그것은 형식 자체를 부정하려는 강인한 정신과의 부단한 싸움 밑에서 얻어진다. 아름답다는 것은 '상투적인' 그리고 우리 앞에 널려 있는 것을 줍는 작업이 아니라, 인간 정신을 좁은 형식 속에 잡아가두어두려는 모든 음험하고 악랄한 것과의 싸움에서 얻어지는 보상인 것이다. 그러나, 참된 것 역시 아름다운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주위에 그대로 널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을 억압하고 축소시켜, 이때까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인간을 보다 큰 정신의 지평 속에서 생활하게 만든 공간을 파괴하려는 힘과의 싸움 속에 깃들여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름답고 착한 것이, 다른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는 착하고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것이 무슨 의미를 띠는 것인가를 반성하는 작업이야말로 문학 본래의 지평으로 문학인들을 이끄는 유일한 길이다. 문학은 단지 아름답고, 단지 착하고 진실한 것만이 아니다. 문학은 아름다우며 착하며 진실하며 그리고 그 이상의 것이다. 159

 

형태란 질서 개념이다. 혼란되어 있고 질서를 얻지 못한 것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노력처럼 힘든 것은 없으며, 좋은 형태는 그러한 질서화의 작업의 결과이다.

좋은 형태는, 그러므로 상투화된 질서를 오히려 배격한다. 상투화된 질서는 여러 사람들에게 이미 인지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전달이 쉽고 이해하기 쉽다. 그것은 잘 만들어진 질서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좋은 형태란 잘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때까지 질서화되지 아니한 부분을 새롭게 형태화하려는 노력 없이는 얻어지지 아니한다. 162

일상적인 삶 뒤에 감추어져 있는 진실은 그것을 질서화하고 거기에 형태를 부여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 질서로서의 형태에 대한 집착이 없는 한, 문학은 상투형에 지나지 않게 된다. 162

좋은 형태는 자유로운 탐구 밑에서 가능한 것이지, 억압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억압은 곧 획일이기 때문이다. 미리 주어지는 질서는 질서화하는 정신을 오히려 마비시킨다. 정신이 마비되면 형식만이 남는다.163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문학은 그런 윤리감의 혼란을 깨달은 문학이다. 대혁명 이후의 문학에서 항상 윤리 의식이 문제디고 있음은 그것이 그 어느 때보다 심한 이념과 풍속의 괴리를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여러 작품들은 그런 보편적 인간의 연애, 질투, 명예심, 우유부단함을 묘사하며 몰리에르, 코르네이유, 라신 등은 인간 감정의 드라마를 엄격한 고전주의 작시법에 의해 표현한다. 낭만주의자들은 혁명 이후 회의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윤리를 탐구하려는 자들은 절대적 진리를 믿지 않는다.168

윤리나 도덕은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다. 그것은 항상 교정될 수 있다. 그 주장은 그러나 인간성 개조론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성 개조론의 뒤에는 과거의 윤리에 대한 강한 동경이 숨어 있다. 인간성을 절대적인 자족체로 보고 그 최고의 상태를 미리 설정해놓은 다음 그것을 향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주장은 논리가 아니라 신앙이며,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비윤리적이다.

예술이나 윤리성은 작품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게 아니다. 그것은 작가가 속한 사회의 배분 원칙을 자세히 관찰하고 자기가 관찰한 것을 반성하여 그것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가운데서 얻어지는 어떤 것이다. 어떤 작가에게 있어서 윤리성이나 예술성은 그가 얼마나 정직하게 그가 속한 사회와 그 사회가 그에게 요구하는 금제들을 관찰하고 반성하고 있는가와 동의어이다. 그를 읽는 독자들은 그를 통해서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진실한 구조를 알아낼 수 있다. 169-170

 

<문학이란 무엇인가2>

 지식인의 죄는 그가 백수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엘리트주의를 포기한데에 있는 것이다. 그 과정은 최인훈과 이청준의 작품 속에 풍부히 드러나고 있다. 190

창작가는 한국적인 것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이 인간답게 살도록 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비평가는 그들의 지적 노력을 이해시키고 그것을 폭넓게 문화 전반으로 확대시킴으로써 창작가와 마찬가지로 민족을 위해 싸운다. 비평은 논리 조작의 기술이 아니라, 삶을 이해하고 반성하는 정신의 움직임인 것이다. 192-193

 

 모든 소설이 그러하듯 <화분> 역시 존재에 대한 하나의 태도의 기술이다. 존재에 대한 하나이 태도의 기술이라는 점에서 <화분>은 분열의 드라마이다. 구원되지 아니하고, 완전히 존재의 빛 속에 잠겨 있을 수 없으며 부단히 생기 되고 폐기되는 존재의 위치에 우리가, 소설의 히어로가 서 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존재에 대한 태도의 기술은 분열의 드라마를 요구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분>은 분열의 드라마는 아니다. 오히려 칼빈적인 의미에서 조화되어 있고 예정되어 있다. ..분열의 드라마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가 오히려 인물을 휩싸고 있는 언어 속에 완전히 녹아버려 다만 언어만이 남아 소설을 이룩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282-3)

 

생성되어 가고 있는 장용학의 주인공들의 입장에 선다면 그들은 모두 독특한 외상을 입은 노이로제 환자가 아니면 정신박약자이고, 소설 밖에서 그들을 바라본다면 그들은 현대의 가장 독특한 한 현상인 언어-주문의 병을 앓고 있는 실존적 개인이라는 것이다. (315)

장용학의 소설은 그 내부에서 바라보면 구질구질한 노이로제 호나자의 일지에 지나지 않지만, 밖에서 바라본다면 그것은 긍정적인 인간, 혹은 실존하는 인간을 찾기 위한 빛나는 노력의 기록으로 보인다. 그러면 장용학은 무엇을 현대의 병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무엇을 그 치료법으로 생각호고 있을까. ...아홉시병의 우화는 장용학 소설이 밖에서 바라보면 언어-주문, 혹은 말을 바꾸면 헛된 이름이라는 병을 앓고 있는 개인의 기록이라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면 장용학이 언어, 혹은 '이름'이라는 것으로써 말하려고 한 것은 무엇인가. ....그에게 있어서는 제도, 의무. 역사라는 것은 모두 이름의 비극이 빚어내는 포즈에 지나지 않는다. ..이름의 병폐는 이름이 '인간적'이라는 허울 밑에 인간을 말살하려 한다는 데에 있다. 사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언어, 아홉시병의 우화가 가르쳐준 대로 장난으로 시작한 언어가 마침내 사실을 지배하게 된다는 놀라운 사태ㅡ 이것이 현대의 큰 비극이라고 장용학은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토양에서는 모든 것은 언어에 의해 질서를 부여받고 인간을 지배해나간다. 진정한 인간은 이때 질식되고, 남은 것은 '허연 봉지'뿐이다. (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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