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문학과지성 시인선 278
김행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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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네 보석가게에서 / 김행숙


언니, 나는 비행기를 탈 거야. 나는 아무 것도 버리지 않았는데, 갑자기 너무 가벼워졌어. 마리오는 아름다운 남자야.


안녕. 나는 보따리 장사를 할 거야. 보석가게에서나는 아름다움을 감정하지. 가짜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아는 건 멋진 일이야. 언니, 곧 부자가 될게. 라인 강가에서.


한국 남자를 사랑해보지 못했어. 오늘밤에도 언니는 시를 쓰고 있니? 언젠가는 언니 시를 읽고 감동하고 싶어. 안녕.


11월에 나는 마리오를 만나지. 언니는 한국어로 사랑을 고백할 수 있어? 우리가 어렸을 때 문방구에서 마론인형을 훔치는 언니를 봤어. 눈물이 주르르 모래처럼 흘렀어.


언니,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 모래는 가장 아름다운 흙의 형상이었지. 나는 매일 밤 기도를 해. 언니가 우리 집을 떠나던 날에 나는 왜 쓸쓸해 지지 않았을까? 언니를 위해 기도할게. 안녕.


‪#‎시읽는_신학도‬


*사춘기 소녀같은 시. 가볍고 재밌다. 기분 좋고, 편안하다. 괜히 웃음이 난다. 시인과 언니 옆에서 같이 수다를 떨고 싶다. 항동규가 노래한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시의 내용은 무시해도 좋다. 그저 화자의 말하는 분위기만 느끼면 된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삶을 살아가는 시인은 행복할 것만 같아서 부럽기도 하다. 이 시 앞에선 무거운 짐이 내려지는 위로가 있다. 예수도 제자들과 놀고, 장난치고, 유머를 날리고, 판타지 소설 같은 이야기들을 나누며 재밌게 보냈겠지? 이 시가 보여주는 세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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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 시인이 밝힌 바와 같이 “서정에서 일탈하여 다른 서정에 도달한” 시인의 행보는 “ ‘현대시’의 어떤 징후”가 되었고, 이 첫 시집을 통해 그녀는 “시를 쓴다는 것은 윤리학과 온전히 무관한 사춘기적 ‘경계’에 머문다는 뜻”임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시가 난해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가 그만큼 협소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시가 혼란스럽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자아가 그만큼 진부하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에게 그녀의 시는 은은하게 권유하고 발랄하게 유혹한다. ‘시뮬라크르들을 사랑하라.’ 김행숙 시의 정언명령이다. 그리고 이것은 시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시만이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다. _신형철(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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